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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창고 사건은 2007년 11월 13일이 되어서야 관련 희생자 315명이 확정되었다. 이어 유족 492명은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생명권·적법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당했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국가에 냈지만 소멸시효가 경과했다는 이유로 패소하였다. 그러자 유족들은 서울고법에 항소하여 2010년 10월, 정부의 손해배상책임을 이끌어 내었다. 정부는 즉시 상고하여 하였으나 대법원은 이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상고심의 판결을 원심대로 확정하였다. 국가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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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2018.11.05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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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4일 국민보도연맹집단희생자 합동위령 추모제가 괴산 보광초등학교에서 봉행되었다. 괴산 , 증평, 청주 지역 국민보도연맹 희생자 유족회가 주관하고 괴산군에서 후원하는 행사였다. 이날 식전행사로는 아직도 해원에 이르지 못한 영현들과의 접신 의례가 펼쳐졌는데, 진혼무와 성주풀에 조금란, 이우순 무용가가 그리고 진혼가에는 윤용길 소리꾼이 출연하였다.초헌관으로 제단 앞에서 영현들께 잔을 올리는 이차영 군수의 얼굴에는 비장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이는 집단학살은 국가권력의 남용으로 빚어진 불행한 일이었으니, 현 군정책임자로써 갖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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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2018.10.22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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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정은 의주에서 명나라에게 원병을 청해 놓고 불안에 떨고 있었다. 조선의 국정지표는 배불승유였으니 유생들의 세상이었다. 그러나 세조는 유생들을 불러 모을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하고 가까운 묘향산에 기거하고 있는 서산대사를 불러 내렸다. 나라가 위급하니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서산대사는 전국 사찰에 승병모집 격문을 붙이고, 순안 법흥사에서 1500명의 승병을 모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격문을 보자마자 자신이 모은 승병을 끌고 법흥사로 달려가 합류하였다. 사명은 서산대사의 명에 의해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되어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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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2018.09.10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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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1590년 3월 6일 조선통신사의 일본 파견이 결정되었다.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기록관(記錄官) 허성 등을 포함해서 약 200여명이었다. 이들의 임무는 일본의 전쟁수행 의지와 능력에 대한 정탐 활동이었다. 드디어 통신사가 1591년 1월 28일 돌아오게 된다. 정탐내용에 대한 귀국보고회가 조정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우리 역사상 희대의 국정농단 사건이 벌어진다. 통신사 단장인 황윤길은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하자 부단장인 김성일은 '신은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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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2018.08.27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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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4·3사태가 해결되지 않자 미군정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는 제14연대의 제주 출동을 명령하였다. 그러자 지창수와 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1948년 10월 19일 저녁 8시경 기습적으로 전 연대 병력을 집결시킨 다음 선동과 위협으로 인민 반란군을 결성하였다. 이 인민군 3천여 명은 군부대에 인공기를 내걸고“경찰타도, 제주도 출동거부, 남북통일을 위하여 인민군으로 행동하자”라고 구호를 외치며 시가로 진출하였다. 순식간에 여수와 순천, 거제도가 인공기 물결로 출렁거렸다. 경찰서 등의 관공서가 접수되고 우익인사와 더불어 무고한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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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2018.08.13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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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그치지 않고 볼과 귀를 가져가는 혹한의 땅 연해주(블라디보스톡)는 시베리아의 동남단에 위치해 있는 나라 잃은 우리민족의 아픔을 다독이여 주던 유서 깊은 곳이다.이 바람의 땅, 연해주에는 4만여 동포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우리의 옛 영토였던 고구려와 발해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120 Km 쯤 떨어진 우스리스크에는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가 서 있고, 그 가까운 곳에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고택이 있다. 이곳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각종 훈련과 지원이 이루어졌으며, 안 의사는 우리민족의 수탈자 이토 히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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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2018.07.3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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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7월 25일이 되면 영동 노근리 평화사랑공원에서는 위령제가 열린다. 이 공원의 위령탑과 평화기념관, 교육관에는 한 해에 13만 명의 추모객이 줄을 잇는다. 이제 노근리는 추모공간을 뛰어 넘어 인류의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가슴에 담는 역사 교육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다.영동 노근리의 쌍굴다리는 1934년 만들어졌으며 2003년 6월 30일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서 1950년 7월 25일 부터 29일까지 5일간 후퇴하는 미국 제1기병사단 제7연대 2대대 H 중대에 의한‘양민학살’사건이 벌어진 것이다.이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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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2018.07.16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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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성은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났다. 1913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국적을 취득한 후 보정군관학교를 거쳐 중국 군벌의 기병사단장을 지낸다. 1942년 한국광복군 제5지대장을 지내면서 임시정부의 일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는 특이하게도 해방이 되자 고향인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한에 와서 조선경비대 사관학교에 입학한다. 그 후 조선경비대 제2대 총사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1947년 영광스럽게도 육군 최초의 장성인 준장이 된다. 광복군, 족청, 대동청년단, 장총단, 학병단, 학도대, 대한무관학교 등 30여 개에 달하는 군벌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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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2018.07.02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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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제노사이드(대량학살) 연구는 대상에서 가해자를 빼고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주제로 다루 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쩌면 이것은 국가나 그 주변 권력의 개입으로 진행된 사례가 대 부분이므로 연구자들의 접근 자체가 수월하지 않은데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대령학살에 대한 역사적 접근과 아울러 사회과학적 접근이 필요하지만 접근에는 용기가 수반될 필요성 이 뒤 따른다. 더구나 그것이 살아 있는 권력과 보이지 않게 연계되어 있을 때는 더욱 그러 하다. 나치의 인종주의 정책은 모든 유대인을 공직에서 추방하고 유대인과의 혼인을 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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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2018.06.18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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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김병우 교육감 예비후보는 지난 달 5월 17일, 충청북도교육청 브리핑룸에서‘4차 산업혁명시대, 교육대혁신’으로 기초학력부터 미래학력까지 책임지는 교육에 대한 공약을 발표했다. 이제까지 학생들의 학력을 접어두고 행복싸앗학교에 매진한 김병우 교육감의 교육정책을 잘 알고 있던 학부모들은 김 후보가 선거가 다가오니까 ‘학력향상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가.’ 하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초등학교에서 학력고사가 없어진 후, 자녀학력을 가늠할 수 없어, 자녀 손목을 끌고 학원가를 기웃대던 학부에게는 더욱 큰 관심사가 아닐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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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2018.06.04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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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이석우 기자) 행복씨앗학교는 3~4천만 원의 지원금을 받는다. 이 지원금은 까다로운 증빙절차 없이 학생들을 위해 간식비 등으로 행복하게 지출할 수 있다. 교육활동이 끝나고 그늘나무 밑에서 간식을 나누며 웃고 있는 교사와 학생들의 모습은 참으로 행복한 그림이다. 그러나 이 회화 구도에는 90%에 가까운 일반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구경꾼이 되어 바라만 보고 있는 형편성에 문제가 있다. 더 큰 문제는 학생들의 학력 저하다. 2017년 교육부 자료에 의하면 혁신학교 기초미달학생 비율이 일반학교보다 평균 3배 이상 높은 것으로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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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2018.05.07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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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이석우 기자) 산과 들이 꽃잎으로 뒤덮였다. 산수유가 노랗게 웃는 가운데 산벚나무는 눈송이 꽃잎을 지운다. 언제부터였을까 창꽃은 갈참나무 아래서 연분홍 볼에다 수줍음을 얹고 있다. 꽃이파리가 대수던가 모든 나뭇잎이 자신만의 빛깔로 잎새 꽃잎을 펴들고 자신의 봄을 구가하고 있다.6.25 전쟁 중에 전선에 투입된 학도의용군은 모두 2만 7700여 명에 이른다. 그리고 후방 전투지원군도 20만 명에 달한다. 당시 학제는 중학 6년제였으니 이들은 모두 중학생으로 군번과 계급장도 없이 교복 차림으로 조국을 구하겠다고 포연이 자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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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2018.04.2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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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1950년 7월 6일, 괴산군, 청원군의 각 마을 국민보도연맹원(이하 보련)들이 소집되어 군용트럭에 실려 와 증평의 양조장 창고와 농협창고에 아무런 법적절차도 없이 예비검속되었다. 정부에서 만든 단체에 가입한 터에 경찰서장의 강연이 있다하니 바쁜 일손을 접고 소집에 응했던 것이다. 처형될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몸을 피했던 사람도 스스로 돌아와 몸이 묶였다. 돌아오지 않으면 가족을 모두 죽이겠다는 협박 때문이었다. 출타중인 형 대신 동생이 검속되었다가 다시 교체되는 사례도 있었다. 용변을 보라며 도망칠 기회를 주었으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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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2018.04.09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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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알려진 베트남 미라이 촌이나 90년대 이후 르완다나 코소보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보고되었을 때 우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디 그뿐인가 제주 4.3 사건이나 거창 사건 그리고 보도연맹 사건 등이 특별법 제정 등을 통해 설마 했던 일들이 잔혹한 참상으로 국민들에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충격과 비분함을 어디에 비견할 수 없었다. 또한 누구나 다른 선택의 길은 없었을까하는 안타까운 생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특히 국민보도연맹 사건(이하 보련)의 경우 더욱 안타까움을 가중시켰다.1949년에 이르자 한국정부는 국가보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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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2018.03.26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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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시인) 국민보도연맹(국민보호선도연맹, 약칭은 보련)은 일제 강점기의 정치범 전향 교화 시설인 대화숙을 모방해서 1949년 6월 5일 만들어진 정부기관이 아닌 임의 단체이다. 이 아이디어는 정치검사 오제도에서 나왔다.1947년~1948년에 좌익 활동가는 이미 박헌영이 주도하는 남로당에 가입되어 있었고 이들은 대부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상태였으므로 보련이 결성될 때는 좌익분자는 별로 없었다.때문에 공무원이나 경찰은 할당된 가입 인원을 확보하려고 식량과 비료를 무기로 삼거나 가입하지 않으면 외부 출입을 10리 이상 못한다고 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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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2018.03.12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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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시인) 정지용 시인이 사회주의자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에 대한 환상의 끈을 놓지 못한 흔적들이 있다. 그것은 1945년 12월 13일 창립된 조선문학가동맹에서 아동분과위원장을 맡았었다든가, 경향신문 주필시절에는 ‘인민’, ‘유물사관’등의 용어를 사설에 올리며 좌경문인들과 다시 가깝게 지냈다던가, 1948년 9월 12일 독립신문에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지지발언을 실은 사실 등이 그것이다. 또한 카프의 서기장이었던 임화도 실상 정지용의 경향문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지용과 임화의 시를 읽어보기로 한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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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2018.02.26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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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시인) 숲 속의 언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겨울바람은 연신 땅바닥의 낙엽을 다정하게 들추고 있다. 어디선가“따다다 따라라라라”하고 딱따구리가 나무의 표피를 찍는 연발음을 낸다. 나도 이에 질세라, 톱날을 돌려 매끄럽게 나무를 자르고 다듬는다. 두 개의 앞 기둥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살아있는 버드나무를 이용하고 뒷기둥 두 개는 은행나무를 잘라 세운다. 나머지 원두막 바닥과 벽체를 모두 버드나무로 완성할 요량이다. 나는 성급함을 감당하지 못하고“버듣 도서원두막”을 이미 마음속에다 완성하였다.봄이 되면 봄바람의 성가심을 견디지 못하
풍향계
이석우
2018.02.12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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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시인) 1586년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부하 야스히로가 조선정부에 사신으로 왔다. 그의 무례한 행동은 참아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천하는 짐의 손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의 국서를 손에 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조선 정부는 통신사를 파견해 달라는 도요토미의 요청을 무시하고 "바닷길이 험하니 사신을 보낼 수 없다"는 답서를 일본 사신에게 쥐어 주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도요토미는 성과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온 사신과 그의 일족을 몰살 시켜
풍향계
이석우
2018.01.29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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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시인) 4세기 후반 백제의 근초고왕은 중앙집권화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였다.영산강 유역에 떠돌던 마한의 세력을 복속시키고 낙동강 서쪽에 남아 있던 가야의 세력을 영향권에 넣는다. 모름지기 백제는 가야의 해상권을 이어받아 신라와 더불어 해상왕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371년에는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이고 대방고지까지 차지하였다.한편 신라와 우호관계를 수립하고 중국의 동진과는 원만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중국이 혼란해지자 요서지역에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는 발빠름을 보여주기도 한
풍향계
이석우
2018.01.15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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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시인) 영도는 1995년에 부산광역시 영도구가 되었고 지금은 인구가 16만 명을 육박한다. 동삼동 패총와 영선동 패총 같은 선사유적의 발자취를 거쳐, 삼국시대에는 거칠산국(居漆山國), 고려조에는 동래현, 조선조에는 동래부가 영도를 품었던 행정구역이다.영도를 이야기 하려면 영도다리를 건너뛸 수가 없다. “……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 ”이 노래는 6·25 전쟁 당시 영도다리를 소재로 부른 현인의 「굳세어라 금
풍향계
이석우
2018.01.01 2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