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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중산 안동준 선생을 처음 뵙게 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1973년이었다.그때 중산 선생은 9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괴산 연풍 장터에서 벌였던 선생의 열정적인 사자후를 보며 정치라는 것과 유세라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카랑카랑하고 격정적인 목소리, 50년 세월을 넘은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4선 의원이었음에도 ‘정치적 배경’에 휩쓸려 1973년과 1978년, 그는 9대와 10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20% 미만의 득표율에 그쳤다.어렸을 적 선친께서 말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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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5.08.28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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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 얼 되살리는 원구지원 건립안동준은 역사 연구 뿐만아니라 여러 방식으로 민족정신을 고양하기 위한 활동을 펼쳤다.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국조전(國祖殿) 건립이었다.국조전은 민족의 조상을 모시는 전당이다. 안동준이 국조전 건립을 구상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였다고 한다. 될성부를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그만큼 그는 민족의 자존과 긍지를 어려서부터 키워왔다.중앙 정치에서 상처를 받고 타의에 의해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그는 국조전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국조전에 배향할 대상은 단군은 물론 염제 신농씨 이래 역대 왕조의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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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5.08.26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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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동지회 회장 맡아 수기집 발간1・20동지회는 안동준이 국회의원동우회와 함께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단체였다.1963년 1월 20일 쿠데타 주역 중 한 명인 장경순이 주도해 창립했는데 1944년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됐던 학병 출신들의 모임이다. 1월 20일은 이들이 학병에 끌려간 날이었다.1970년대까지 1・20동지회에서 안동준의 활동은 서화전에 작품을 출품하는 걸 제외하면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4년 6대 회장에 선출됐고 한 차례 중임한 후 1998년 다시 10대 회장에 취임했다.회장으로서 안동준이 주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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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5.08.21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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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평 증천동에 설립한 농업공동체안동준이 견지한 사상은 보수주의였다. 그럼에도 그가 실행한 일을 보면 매우 진취적인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증평 협업농장’이 그것이었다.‘증평 협업이상촌’으로도 명명된 협업농장은 그이 이상이 담긴 프로젝트였다. 농업・농촌 문제에 관심이 많던 안동준이 7대 국회의원 시절인 1968년 괴산군 증평읍 증천동에 설립한 일종의 농업 공동체가 그것이었다.이 같은 공동체를 세운 계기에는 그가 1965년 이스라엘 농촌을 시찰한 경험이 있었다.그는 그가 저술한 ‘기적의 나라 이스라엘’에서도 한 장을 할애해 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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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5.08.19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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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공사 총재 재임, 돋보인 활약국제관광공사 총재로서 안동준의 활약은 두드러졌다.파주 임진면 장산리에 전망대과 승공전시관을 건립하고 반도아케이드에 외국인 전용 한식점을 개장하는 계획을 세웠다. 또 1971년 12월 워커힐에 한꺼번에 2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유스호스텔을 개관했다.관광진흥 사업은 1972년 들어 더욱 활발히 추진됐는데, 안동준이 주력한 과제는 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관광산업을 수출업으로 지정하는 것과 관광기금 조성, 외국인 관광객 확대 유치 등이었다. 그는 민간자본 4억, 정부융자 40억,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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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5.08.1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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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 유지 위해 진행한 10월유신공화당이 안동준을 공천에서 탈락시킨 건, 이를테면 유신체제로의 전환을 앞둔 포석이었던 셈이었다. 다선과 중진 의원들을 교체하고 신진을 발탁하려는 권력 핵심부의 속내가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판을 뒤집어 엎기 위해선 새로운 얼굴, 정권에 순응하는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일정 부분 당내 세력을 가진 중신 의원들은, 그래서 같이 가기 힘든 존재였던 것이다.공천 파동 이후 1년 뒤, 이른 바 ‘10월 유신’으로 불리는 개헌은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독재체제를 구축하게 된, 한국 헌정사상 최악의 오점이었다.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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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5.08.12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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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 정책위 부의장으로 큰 활약 3선 의원으로 정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안동준은 1965년 12월 31일 공화당 정책위원회 부의장에 임명됐다. 그는 6대 국회 임기 후반기 동안 당 정책위 부의장으로서 정부・여당 경제정책심의회의에 참석해 각종 경제 현안들을 협의하고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작성할 당시엔 정부안에 대한 공화당의 수정안 마련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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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5.08.0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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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의에 빠져 백화산 흰드뫼로의회로 돌아온 안동준은 1960년 9월 26일 중요농산물적정가격보장법안을 제출하는 등 의욕적으로 의정활동에 임했다. 이 법안의 골자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요농산물적정가격보장위원회를 설치하고 주요 농산물에 대해 생산비와 적정 이윤을 합한 기준 가격을 책정해 정부에서 등락을 조절하도록 한 것이었다. 안동준의 소속 상임위는 농림위원회였다. 농림위는 농민의 아들인 안동준에겐 몸에 맞는 옷과 같았다. 의욕이 솟았다.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랄까, 5대 의원으로서 안동준의 활동은 길지 않았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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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5.08.0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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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룡, 친일 지우려 반공 선봉에김창룡이 한 일은 군 내의 공산주의자 색출이었다.이병주 소령을 비롯한 좌익 장병들을 대거 옭아맸고, 이후 여순 반란 사건을 계기로 숙군 작업이 본격화되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면서 그에게는 출세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그는 또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한 배후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기도 하다.안두희가 김구를 살해한 직후 경교장 주위에 있던 대한민국 육군 헌병들에게 체포돼 끌려갔는데, 바로 김창룡 앞이었다고 한다. 이때 그는 안두희에게 “안 의사, 수고하셨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안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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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5.07.29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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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장관 이기붕의 보좌관이 되다국방부 총무국에서 안동준이 담당한 업무는 정훈국 창설이었다.당시에는 미군 측의 반대로 ‘정훈’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제2국’이라고 불렀다. 국장은 송면수였다.원래 이범석이 국방부에 설치한 것은 ‘정치국’이었다. 그러나 미 군사고문단에서 ‘정치국’을 두고, 나치 독일이나 공산국가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국방부장관 직속의 정치장교단 설치에 반대했다. 결국 이범석이 물러난 뒤 정훈국은 육군본부 정훈감실로 흡수 통합됐다.안동준은 정훈장교 200명을 직접 선발하는 등의 실무 역할을 담당했다. 정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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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5.07.15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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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우익 충돌로 빚어진 비극14연대의 진압 명령 거부는 숙군의 위협과 14연대의 제주도 파병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연대 내 남로당 하사관들의 급조된 계획에서 시작됐다. 1948년 10월 15~16일 육군본부는 제주4·3사건 진압을 목적으로 14연대의 제주도 파병 계획을 하달했다.그러나 숙군에 대한 불안감과 제주도 파병에 대한 반발감이 겹치면서 14연대의 일부는 진압 명령 거부를 결정하게 된다.사실 제주4·3사건 또한 여순사건과 더불어 좌우익의 충돌로 빚어진 민족의 비극사였다. 그 피해가 오롯이 민간인들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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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5.07.08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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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문단의 거두 월탄 박종화안동준이 여순 사건 당시 인연을 맺게 된 박종화는 한국 문단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었다.박종화(1899년 10월 29일~1981년 1월 13일)의 호는 월탄이다.안동준이 1919년생이니, 박종화와는 20년 차이. 그럼에도 군인과 문인조사반 신분으로 만난 두 사람은 뜻이 통했다. 나라의 안정과 강군에 대해 그들은 많은 의견을 나눴다.월탄은 소년시절 사숙(私塾)에서 12년간 한학을 수업한 뒤 1920년 휘문의숙(徽文義塾)을 졸업했다.1947년 성균관대 교수와 서울시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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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5.07.0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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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족스런 충주중 교사 생활안동준은 충주중학교 최종인 교장의 요청으로 2년 정도 교사로 일했다.1학년은 2개반으로 이뤄졌다. 한 반에 50명씩 100명을 뽑았는데, 충북 북부의 준재(俊才)들이 모두 모여들었다.최 교장의 배려로 교사들은 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나라의 동량을 기르는 일은 그에게 큰 만족감을 주었다. 주말마다 부모님을 뵙고, 아내와 젖먹이 아이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기쁜 일이었다.1년 가까이 교사 생활을 할 즈음, 어느 날 집에서 급보가 날아왔다.큰어머니께서 위독하다는 전갈이었다. 지난 일요일에 가서 뵈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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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5.06.24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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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중한 생명 살린 작은 목선제방공사에는 돌이 많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물살을 견뎌야 하는 석축 하단엔 큰 돌이 필요했다. 그러나 인근엔 그런 돌이 없었다.강물을 따라 멀리 올라가 큰돌을 옮기게 됐는데, 여기엔 안동준이 만든 배가 요긴하게 쓰였다.그런데 그가 미루나무로 만든 배가 급하게 쓰이는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그의 자형 홍순영씨가 급격한 복통으로 응급환자가 됐던 것이다. 시골이다 보니 가까운 곳에 병원이 있을리 만무하고, 그래서 자형을 그 배에 태워 충주 단월까지 가게 됐던 것이다.응급실에 도착할 즈음 환자는 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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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5.06.1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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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향 후 이담국민학교 설립안동준이 군사영어학교 입교가 아닌 귀향을 선택했던 것은 출세보다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겠다는 의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나라를 위해 일을 하려면 스스로를 먼저 닦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귀국하고도 반년이 더 지나 돌아온 고향에서 그는 달천(達川)의 범람을 막기 위해 제방을 쌓고 사재를 털어 이담국민학교를 설립하는 등 지역 활동에 열정을 쏟았다.안동준의 백부에겐 아들이 없었다. 백부가 타계한 뒤 안동준이 입양됐는데, 이담국민학교 설립엔 백부의 유산이 많은 몫을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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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5.06.1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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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납할 수 없었던 ‘친탁 통치’ 학병동맹의 좌익 성향에 대해 안동준이 반발한 것은 나라의 ‘자주성’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에도, 일본군으로 징집돼 끌려갔을 때도 늘 일제로부터 자주적 독립국가로서의 조선을 꿈꾸었다. 비록 힘이 없어 조선이 패망했을지언정, 독립을 향한 그 정신만은 살아있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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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5.06.03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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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혼란했던 ‘해방공간’ 해방공간(解放空間)은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일제로부터 ‘빛을 되찾은 시기(光復)’로 온 국가가 환희의 물결을 뒤덮여 있었을 이 기간은, 그러나 역설적으로 가장 혼란한 시기였다. 온 나라를 휩쓸어버린 이데올르기의 광풍은 정치, 사회적 혼란을 낳았고 분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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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5.05.27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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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망만 안게 된 조선학병동맹그는 우리나라가 패망한 원인이 군대가 약했던 탓이라고 생각했다.일본 군대로 끌려갔다 살아온 당사자로서 강군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더욱 굳건해졌다.안동준은 이튿날인 9월 2일 삼청동에 있는 조선학병동맹(朝鮮學兵同盟)을 찾아갔다. 그리고 조직의 위원장인 왕익권(王益權)의 강력한 권유로 총무부장직을 맡게 된다.물어물어 찾아간 학병동맹은 삼청동 꼭대기에 있었다.‘ㄷ’자 형으로 된 단층 건물이었다. 여관방처럼 20여 개의 온돌방을 연결시켜 지은 집이었다.그곳에선 60명 가량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계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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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5.05.2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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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막에서 탈영 감행8월 15일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했다.그러나 일본군은 8월 15일 히로히토 일왕이 항복을 선언한 뒤에도 조선인 학도병의 귀환과 관련해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그저 밥만 먹이면서 아침 저녁으로 점호만 계속했다. 조선 학도병들은 쉬쉬하며 정보를 나누었다. 국내 정치 상황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웠다.그리고 즉각 돌려보내지 않고 조선 학도병을 억류하고 있는 것은 월권이니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우리끼리 뜻을 모아 임의로 귀국하자는 의견을 모았다.장교는 영문을 임의로 출입할 수 있기 때문에 갑간(甲幹) 출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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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5.05.13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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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병제 거부한 전국적 저항운동여기서 일제의 징병과 이에 대한 거부 운동에 대해 살펴본다.안동준처럼 일제에 의해 강제로 입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에 대항해 징병 자체를 거부했던 이들 또한 많았다.이른 바 조선에서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징병거부운동(徵兵拒否運動)은 일제가 추진한 학도병특별지원병제에 대한 반발에 따른 것이었다. 일제가 조선 청년을 강제동원해 일본군에 투입키로 한 징병제(徵兵制)의 시행에 반대해 일어난 전국적인 저항운동이었는데, 그 연원은 일제가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한 1943년 3월 1일자로 개정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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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5.05.06 1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