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뉴스
UPDATED. 2018-11-18 21:53 (일)
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35>
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35>
  • 김명기 기자
  • 승인 2016.04.03 17: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 신문학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재산 ‘낙동강’
▲ 1928년 5월 7일 ‘낙동강’·‘민촌’ 공동출판을 기념하여 사진 보도한 동아일보 지면. ‘낙동강·민촌의 출판기념회’란 사진 제목으로 이날 행사를 설명하고 있다. 보도된 사진설명을 원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미 보도한 바와가티 지난 오일 하오 다섯시부터 시외청량사에서 조명희씨의 ‘락동강(洛東江)’과 리긔영씨의 ‘민촌(民村)’ 창작출판긔념회를 예뎡과 가티 열게 되엇는데 당일에 문예가 제씨 이십명이 출석하얏더라. (사진은 귀념에 참예한 제씨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포석이 ‘낙동강’을 발표하자 김기진(팔봉)은 그 감격스런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만큼 감격으로 가득찬 소설이-문학이 있었던가. 이만큼 인상적으로 우리들의 눈앞에 모든 것을 보여준 눈물겨운 소설이 있었던가. 이것은 어떤 개인의 생활 기록이 아니다. 이것은 현재 조선-1920년 이후 조선 대중의 거짓없는 인생 기록이다.

……

이 소설이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단순한 개인의 생활 기록이 아니고 현재 생장하는 일계단의 인생을 기록코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작자의 놀라울 만한 수완은 작중의 개개 인물에 그에 상응한 성격과 풍모를 부여하여 안면에 방불케 하였다. 다시 읽어도 눈물겨운 일편의 시다. 그렇다. 정히 우리가 이때까지 가져보지 못하던 새로운 감격이다.

- 김기진, 시감 2편 ‘낙동강’, 1927년 8월, 조선지광 70호.

 

임화(51)는 1928년 4월 20일 백악출판사에서 발간된 ‘낙동강’ 소설집을 해방 이듬해인 1946년 포석의 조카 조벽암과 조중협이 운영한 건설출판사(建設出版社)에서 중간할 때 중간사(重刊辭)를 넣었다.

임화는 중간사에서 포석의 낙동강을 두고 ‘우리 신문학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재산’이라고 평했다.

 

抱石 趙明熙兄은 우리나라의 新文學初期를 장식하는 낭만적 시인이요, 또한 新文學이 1924~25년대의 진통기를 거쳐 新傾向派時代로 轉移되든 시기에 소설의 붓을 잡은 作家였다.

崔曙海, 李民村과 더부러 抱石兄의 작품은 新傾向派의 소설문학을 代表하는 중요한 재산의 하나이거니와 특히 이 창작집 가운데 수록된 ‘洛東江’은 소위 자연발생적문학으로부터 이른바 목적의식적문학으로의 방향전환이 논의될 시기에 문제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이다. 그리하여 당시의 비평가들은 ‘洛東江’이 과연 第二期作品이냐 그렇지 않으면 종전대로 第一期作品이냐 하는 논쟁을 전개했든 일이었다.

이러한 논쟁은 이미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化하여 이 작품의 가치 평가와 언제까지 부합시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나 그러나 어떠한 의미에서이고 ‘洛東江’은 우리 문학사의 한 ‘모뉴멘트’임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 될 것이요, 또 모든 역사적인 特殊條件을 제외한다 하드래도 이 작품이 우리 新文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재산임은 역시 변치 아니할 것이다. 유랑하는 우리 민족의 눈물겨운 기록, 조국에 대한 비길 데 없는 애정, 자유에 대한 눌을 수 없는 희망은 소설가이기보다는 더 많이 우리의 민족시인으로서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이얘기하고 있다.

抱石兄이 祖國을 떠난 지 어언 18년, 그가 夢時間에도 그리든 祖國에 自由가 차저오려는 날, 아즉도 兄은 異域에서 도라오지 않었다. 하로 바삐 많은 收穫과 건강한 몸으로 도라오기를 바라는 것은 나 한사람에 머므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抱石兄의 귀중한 업적이 형이 도라오기에 앞서 重刊됨에 當하여 멧마듸의 말로 형에 대한 그리움의 情과 바램의 마음을 적고, 아울러 그 업적에 대하여 두어 마듸의 말을 적어 重刊辭에 대신하는 것이다.

발행 당시 일본제국주의의 압박으로 인하여 복자(伏子)를 쳤든 것을 소생식히려 하였으나 역시 함부로 손을 대일 바가 아니어서 그대로 印行하고, 兄이 도라올 날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모든 양해를 빈다.

- 임화, ‘낙동강’ 소설집 중간사, 1946년 3월 20일, 건설출판사 간행.

 

그러나 안타깝게도 임화가 포석의 귀환을 염원하며 중간사를 썼던 1946년은 포석이 죽은 지 이미 8년이나 지난 뒤였다.

포석이 프로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단편소설 ‘낙동강’을 집필하게 된 기저에는 1927년 카프의 신강령 채택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카프의 ‘방향 전환’은 몇 가지의 단계를 거친다. 첫번째 1926년 기관지 ‘문예운동’을 발간한 시기이다.

그리고 이해 말 ‘우리는 단결로써 여명기에 있는 무산계급 문화 수립을 기한다’고 발표한 카프강령에 따라 작가들은 ‘현장’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두번째 1927년 카프는 이념과 노선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문학을 창작할 때 명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창작해야 하고, 자연발생적인 문학에서 목적의식적인 문학으로 바꾸어야 한다’며 카프의 ‘제2의 방향전환’을 꾀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했던 카프는 ‘예술이 특정한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하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단정했던 것이다. 포석의 단편소설 ‘낙동강’은 목적의식기 문학으로 여기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세번째 1930년을 전후한 2차 방향전환에서는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를 내세워, 예술가가 바로 노동 계급의 선두에 서야한다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변신을 꾀했던 것이다. 그러나 방향전환은 실패로 돌아갔고, 곧바로 카프검거가 이뤄져 결국 카프는 해산 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한설야는 이 시기에 대해 현장 속으로 들어가려했던 작가군들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카프 작가들은 1927년 카프 신강령을 채택한 이후, 보다 많이 공장이나 노동자의 생활을 주제로 한 작품을 쓰게 되어서 우리들은 누구나 공장 지대로 갈 것과 노동자들과 접촉할 것을 생각하였고 의식적으로 그런 기회를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때 형편으로는 이 일이 비상히 곤란하였다. 공장 견학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노동자들과 만난다는 것도 결코 수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무슨 방법과 권도로든지 이 난관을 헤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때 마침 흥남에 질소 비료공장이 들어앉게 되어 회사측의 토지 매수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이름이 매수지 실상은 강탈이어서 불피코 회사대 주민 사이에 분쟁이 야기되었다.

회사 앞잡이로 일제 경찰이 연장을 들고 나섰던 것은 두말할 것이 없다.

……

그래서 현지민들의 의견을 들은 후 서울에 올라 가 조명희선생을 비롯한 크루쇼크 동지들과 먼저 토론해 보려고 하였으나 그때는 조명희 선생이 서울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명희 선생도 역시 다른 작가들 모양으로 어느 공장지대나 그렇지 않으면 고향으로 간 것이나 아닌가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그가 조국을 탈출하여 소련으로 간 것을 알게 되었으나 때가 때이라 이 말은 절대 비밀에 붙여 두었다. 그의 가족들이 박해 받을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 한설야, 정열의 시인 조명희, 1957년 8월, 조명희선집.

 

그러나 실상 포석은 그 이전부터 이미 조선문단을 깜짝 놀라게 할 ‘문학적 비수’를 마련해 두고 있었다.

낙동강의 현장 ‘구포벌’로 향했던 포석은 그곳 주민들을 만나며 소설을 형상화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상황에 대해 이기영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명희의 단편소설 중에는 그 사상 예술적 원숙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작품은 아마도 1927년에 발표된 ‘낙동강’일 것이다.

이 작품을 창작하기 위하여 조명희는 낙동강의 비옥한 지대인 구포벌로 멀리 찾아가서 약 석달 동안 그곳 농민들과 좌담을 하였다.

구포벌의 역사에 대하여 낙동강을 젖줄기 처럼 물고 있는 이 비옥한 땅에서 오히려 빈궁과 무권리의 암담한 생활을 하고 있는 빈농민들의 실지 생활에 대하여 그는 연구하였다.

그 결과 이 작품에는 1920년대 조선 농촌의 생활 처지와 환경에 대한 전형화가 생동하게 주어져 있으며, 그러한 환경에서 탄생된 새 영웅, 빈궁과 암흑을 낡은 제도와 함께 영원히 매장하기 위하여 역사적 필연 속에 태어난 사회주의적 투사들의 고난에 찬, 피의 투쟁이 전개되어 있다.

사회주의적 투사들의 고난과 희생에 대한 작자의 깊은 인도주의적 태도는 이 작품으로 하여금 혁명적 낭만주의와 서정적 빠포쓰로 충만되게 하였다.

박성운과 로자의 성격 속에 있는 혁명적 정열과 영웅주의 인도주의적 애정의 깊이와 미래를 확신하는 아름다운 낭만주의적 지향에도 불구하고 조선 농촌에서 전개되는 투쟁의 온갖 고난성과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낙동강’은 비극적 사건들로 충만되어 있으며 구슬픈 정서를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곤란한 투쟁과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쓰러진 혁명 투사의 뜻을 이어 투쟁의 더 큰 길을 걷기 위하여 북으로 떠나는 그의 애인 로자의 눈문 속에서 독자들은 다만 그들의 사업의 곤란성을 느끼고 거기에 동정을 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러한 독자들은 곤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더 큰 투쟁을 준비하기에 바쁜 그들의 불굴의 혁명적 의지를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예술적 구상으로 말미암아 ‘낙동강’은 현대 조선 문학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발전에 대한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항상 그 토론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즉 ‘낙동강’이 평론계에 의하여 에증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낙동강’은 일제 경찰에 의한 무수한 복자에도 불구하고 해방 전후를 통하여 조신 인민이 가장 애독하여온 작품중의 하나로 되고 있다.

조명희의 창작활동-특히 프로레타리아 작가로서 국내에서 활동한 기간은 그가 소련으로 들어간 1928년까지의 약 4~5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에 그가 발표한 작품들의 수량과 그것들을 통하여 조선 근로자의 투쟁에 기여한 업적은 결코 적지 않다.

- 이기영, 포석 조명희에 대하여, 1957년 1월, 조명희선집.

 

(51) 임화(林和)

 

1908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53년 사망했다. 시인, 평론가, 문학운동가.

본명은 임인식(林仁植). 문필 활동을 시작했던 1926년에는 성아(星兒)라는 필명을, 1928년부터는 임화·김철우(金鐵友)·쌍수대인(雙樹臺人)·청로(靑爐) 등의 필명을 썼다.

1921년 보성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25년에 중퇴하였고, 1926년부터 시와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영화와 연극에서도 활동을 했다.

시 ‘지구와 빡테리아’, ‘담(曇)-일구이칠(一九二七)’ 등 그의 작품은 이 무렵 그가 다다이즘(dadaism)과 프롤레타리아 사상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928년 박영희(朴英熙)와 만났으며, 윤기정(尹基鼎)과 가까이 하면서 카프(KAPF)에 가담했다.

1929년 ‘우리 옵바와 화로’, ‘네거리의 순이(順伊)’, ‘어머니’, ‘병감(病監)에서 죽은 녀석’, ‘우산받은 요꼬하마의 부두’ 등의 시를 쓰면서 일약 대표적인 프로 시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이들 작품들은 프롤레타리아 사상으로 요약되는 주제와 이야기시 또는 단형서사시라는 형식이 결합되어 이뤄진 것이다. 1930년 일본으로 가서 이북만(李北滿) 중심의 ‘무산자’ 그룹에서 활동했고, 이듬해 귀국하여 1932년에 카프 서기장이 되면서 카프 2세대의 주역이 됐다.

카프 전주사건이 터진 그 이듬해인 1935년에 카프 해산계를 낸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임화는 폐결핵을 앓으면서 시집 ‘현해탄’을 간행했고, 출판사 ‘학예사’를 운영했으며, 일제 신체제문화운동에 대한 협조 등의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1947년 11월에 월북하기 전까지 박헌영(朴憲永)·이강국(李康國) 노선의 민전의 기획차장으로 활동했으며, 월북 후에는 6·25까지 조·소문화협회 중앙위 부위원장으로 일했다. 6·25 때는 다시 서울에 왔다가 그 뒤 낙동강 전선에 종군하기도 했다.

휴전 직후 1953년 8월에 남로당 중심 인물들과 함께 북한정권의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미제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 당했다.

생전에 80편에 가까운 시와 200편이 넘는 평론을 쓴 것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한국 현대시사와 비평사 그리고 현대문학연구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임화는 1920∼1930년대의 프로문학과 해방 직후의 좌익문학을 논할 때 필수적으로 살펴봐야 할, 문학운동사·한국 현대문학사에 있어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충청대로 103 (율량동)
  • 대표전화 : 043)218-7117
  • 팩스 : 043)218-7447,7557
  • 창간 : 1991-12-29
  • 제보전화 : 043)218-722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원중
  • 명칭 : 동양일보
  • 제호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 등록번호 : 충북 가 00003
  • 등록일 : 1991-12-27
  • 발행일 : 1991-12-27
  • 회장 : 조철호
  • 발행/인쇄인 : 유영선
  • 편집인 겸 편집국장 : 김영이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18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ynews@dy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