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지는 밀알 하나가 되리라고 각오는 하였지만, 투옥 생활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13년 전 고향에서 친구 대신 몇 달 옥살이를 한 적이 있었지만, 정치범으로 독방을 써야 하는 이번 투옥 생활은 성격이 전혀 달라 불안과 공포, 절망과 고독이 점철되는 예측불허의 생활이었다. 예심을 받기 시작하고 얼마 않되 소위 칠성판이라 불리는 작은 상자에 갇히기도 했다. 이는 독립운동가들의 기를 꺾어 놓기 위해 한 사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상자에 가두는 형벌이었다. 그도 이 상자 속에 갇혀 꼬박 하루 동안 지냈는데 훗날 상자에서 나와서 감옥소로 간즉 내 집에 간 것처럼 평안했다고 증언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체험이었다.

두 달이 지난 526일 양한묵이 갑자기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손병희와 의형제를 맺은 천도교 중앙지도자였다. 58세 젊지 않은 나이이기는 하였지만, 감옥에서도 냉수마찰을 할 정도로 건강하고, 저녁까지 잘 지냈는데 밤중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감옥 안에는 독살 혹은 고문으로 희생되었다는 소문이 돌아 공포의 분위기가 휩싸이기 시작했다.

신석구 목사에게도 두려움이 찾아온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앙으로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 인생이 이렇게 허무함을 몹시 놀라 탄식하는 동시에 나도 어느 때에 그같이 될지 알지 못함을 생각하니 매우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세간의 모든 복잡한 생각들을 다 포기하고 다만 묵상기도 하는 중에 영혼을 예비하고 앉아 있으니까 이 감방이 나에게는 천당같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자나 깨나 주님께서 늘 내 우편에 계심을 든든히 믿으니 말할 수 없는 환희 속에 잠겨 지냈다 나는 40여 년 신앙생활 중 그때 5개월간 독방생활 할 때같이 기쁨의 생활을 한때가 없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글 한 자 읽은 수 없는 독방생활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도와 묵상뿐이었다. 처음 독방 생활에서 나도 양한묵처럼 언제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가 엄습했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기에 죽음의 순간이 올지라도 당황하지 않고 받아 드릴 것이라는 자신감이 회복되었다. 그것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의 확신에서 오는 자신감이었고 바깥에 있을 때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기쁨이었다.

신석구 목사에게 감옥은 보다 완전한 목사가 되기 위한 훈련과정이었다. 그는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위에 병이 들어 고생하였는데, 기도하는 중 기적적으로 그 병이 완쾌되어 더는 그 병으로 고생하지 않게 되는 이적을 체험하였다.

그는 감옥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해주었다. 그의 자서전에서 옆방에 정태용 씨라 하는 정년이 있어 서로 대화를 통하여 알게 되었는데, 며칠 뒤부터는 조급한 마음에 번민을 이기지 못하여 밤에도 자지 못하고 정신이상이 생길 듯하였다. 그럴 때마다 신앙으로 권유하며 위로하여 주기를 2, 3일간 1차례씩 하여, 그는 마침내 평안히 있다가 나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나의 옆방으로 인도하신 것에 감사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정태용은 지금의 대한성서공회 직원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아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는데 신석구 목사가 매일 그를 위로함으로 기력을 회복하고 무사히 출옥할 수 있었다. 이처럼 감옥 안에서 낙심하고 두려워하는 청년 학생들에게 든든한 힘이 되었다.

신석구 목사가 감옥에서 받은 신앙 훈련은 지금까지 받은 그 어떤 훈련보다 혹독하였지만, 결과는 감격스러웠다. 그가 기쁨과 감격 속에 감옥 생활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고비마다 그를 인도하시는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감옥에서 받은 은혜로 기쁘게 수형생활을 할 수 있었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도울 수 있었다. 또한, 이전보다 더 확고한 신앙과 강력한 민족정신으로 무장하게 되어 출옥 후에 교회와 민족을 섬기는 일에 더욱 정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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