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구 목사가 천안읍교회에서 목회한 지 3년째 되는 1938년은 한국 교회사의 일제 말기 수난사가 시작되는 해였다. 일제는 중일전쟁이 끝난 후 전쟁체제를 갖추기 위해 종교분야에서도 강력한 통제를 추진하였다. 이에 일본의 국가 종교인 신도 교육을 강화하여 1935년부터 기독교계통의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1938년에 이르러 교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이미 천주교는 1936518일 교황청의 훈령을 받고 신사참배를 시행하였고, 장로교도 1938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였으며, 구세군 성공회 등도 수용하고 말았다.

감리교회는 장로교회처럼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는 형식은 갖추지 않았지만 1936년 기관지 감리회보에 신사참배는 종교 행위가 아닌 국민의 의무를 행하는 것이다.’는 총독부 학무국장의 통첩문을 그대로 수록함으로 사실상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고 말았다.

신사참배를 수용한 감리회는 193810월 서울 감리교신학교에서 3차 총회에서 양주삼 총리를 비롯한 총대 일동이 동방요배는 물론이고 총독부에 가서 총독의 훈시를 들은 후 남산의 조선 신궁을 참배하고 돌아와 회의를 진행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한국교회가 무기력하게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오욕의 역사를 시작할 때 신석구 목사의 외로운 투쟁이 시작되었다. 신석구 목사의 며느리가 일본인 형사에게 단무지 담그는 법을 배웠을 정도로 일제 고등계형사들이 따라다녔고, 그의 행적은 낱낱이 보고되었다. 그러나 그는 기죽지 않았다. 언어와 옷은 민족혼이 담긴 것이므로 민족 문화를 버리는 것은 민족혼을 버리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마지막까지 일본말을 하지 않았으며 식구들에게도 일본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양복을 입지 않고 한복을 고집하였다.

1938년도에 이르러 천안경찰서장이 직접 찾아와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닌 국민의례다.’라며, 회유와 협박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지만 신석구 목사는 수용하지 않았다. 천안경찰서는 사흘이 멀다 하고 신석구 목사를 호출하여 조사를 벌였고, 어느 때는 설교 중에 연행하기도 하였다. 마침 7월에는 정식으로 연행되어 긴 조사를 받았는데, 경찰서에 갇혀 있는 동안 악성종기가 나 꼼짝없이 엎드려 지내다가 2개월 만에 풀려났다.

신석구 목사가 천안경찰서에 구금되었을 때에 조선일보 천안지국장이었던 아들 태화도 천안 상공에서 일제 비행기 추락사건을 서울 본사에 알렸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다. 그 일로 조선일보 지국장에서 해임되었고, 입장면 양대리에 있던 광명학교 교장으로 부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광명학교는 미감리교회 여선교부에서 설립한 학교로 삼일운동 때 여학생들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결국, 그가 교장으로 취임한 지 2년이 못되어 당국의 폐지 명령을 받고 문을 닫고 말았다.

신석구 목사는 용강경찰서 유치장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는 불령선인이어서 늘 감시가 따랐고, 시국에 중대한 변화가 생길 때마다 예비검속이란 명목으로 경찰에 연행되어 장기간 유치장 생활을 하였다. 1941년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 공격 때에도 용강경찰서에 연행되어 1개월이 넘게 갇혀 있었다.

신석구 목사는 무기와 권력으로 다스리는 세상은 붕괴하고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는 일본 당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설교하였다. ‘대동아전쟁 승전기원 예배 및 일장기 게양지시를 거부했다는 죄목으로 19455월 설교하는 중에 연행되어 3개월간 일제에 의한 마지막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그를 체포하고 고문하고 감옥에 가두어 괴롭히는 일본인에 대한 미움이나 죽음의 공포는 없었다. 잔인한 폭력이나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마음에 평화를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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