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천호 목사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십자가를 진 신석구’

1910년 10월, 전도사 면접에서 떨어진 한 달 후 권사로서 임지가 바뀌었다. 춘천지방 감리사로 홍천읍교회를 맡고 있던 히치 선교사가 그를 부른 것이다. 비록 부채 문제로 전도사가 되지 못하였지만 그의 신앙과 생활자세가 올바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개성을 떠나 홍천으로 가는 길에 서울에 들렀는데 서울지방 감리사인 선교사가 서울에서 열린 ‘백만명구령운동’의 일환으로 한 달 동안 대대적으로 펼치고 있던 전도대회와 초교파 적으로 열고 있던 준비기도회에 참석하고 가라고 그를 붙들었다. 그런데 신석구의 마음이 기쁘지 않았다. 전도인이 전도하라는 말을 들으면 기뻐해야 하는데 그는 기쁘지 아니한 것은 마음에 병이 든 것이라는 생각에 근원을 알기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4일째 되는 날 ‘나는 지금까지 헛 전도를 하였다. 그것은 예수의 부활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지금까지 설교한 내용을 뒤돌아보니 십자가의 죽음은 강조하였는데 부활을 설교한 적은 없었다. 죽음은 누구나 당하는 것이니 설명하기가 쉬웠지만 부활을 말하면 허황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할까봐 의도적으로 피해왔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부활을 빼놓고 설교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된 것이고, 전도자가 아직도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었다.

기도회에 참석한지 5일 째 되는 날 선교사 한사람이 그의 앞을 지나갔는데 순간 마음속에서 ‘네가 저 사람을 미워한 것이 죄다’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영국국적의 선교사는 한 달 전 개성의 공개 석상에서 “조선의 정치는 부패하고 관리들은 탐욕이 많고 포학하여 백성들이 곤란하였는데, 이제 합방이 되었으니 일본이 정치를 잘하여 백성이 평안하게 되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함으로 한국인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만든 인물이었다. 신석구 역시 “합방은 잘된 것이다”는 요지의 발언을 듣고 분노하였으며, 그를 극도로 미워하고 있었다. 일제는 교회 안에 있는 민족주의자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선교사들을 이용하고 있었다. 국권회복이 개종의 동기였던 신석구가 분노하고 미워한 것은 당연하였지만, 이제는 신앙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형제를 미워하였으니 어찌 죄가 아닌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는 성경말씀이 자꾸만 떠올라 사람을 미워함이 신앙적인 아픔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성경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었지만 선교사를 미워한 것을 자복하기 위하여 그의 집을 찾아 갔다. 마침 선교사는 출타하여 속으로 ‘잘 되었다. 나는 할 만큼 했다. 이제 그와 관계를 맺지 않으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 ‘네가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그의 집에 다녀 온 것은 진정으로 잘못을 자복하려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위선의 죄를 지은 것’이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마음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속일 수는 없는 일이어서 다시 선교사의 집으로 향하였다. 진정한 마음으로 선교사를 미워한 마음을 자복하고 서로 기도하고 돌아와서야 그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한일합방으로 우울한 분위기에서 열렸던 매년회에서 전도사 시험에도 떨어져 좌절과 분노하였던 1910년 9월이었으나 신석구는 지속적인 기도로 겸손의 은혜를 얻게 되었고,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참석했던 10월의 서울 전도대회에서 부활의 메시지를 회복하였다. 일제에게 이용당하여 친일발언을 하여 미워했던 선교사와 화해함으로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신앙의 훈련을 받은 신석구는 강원도 홍천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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