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천호 목사의 십자가를 진 신석구

신석구 목사는 친구인 오화영 목사로부터 220일경에 3.1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면 받았지만 즉시 답을 하지 못한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 생각에 두 가지 어려운 것은 첫째로 교역자로서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가, 둘째는 천도교는 교리상으로 보아 서로 용납하기 어려운데 그들과 합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가 하여 즉시 대답지 않고 좀 생각해 보겠다.”고 하였다.

민족의 독립을 위한 일에 종교적인 신념으로 대답을 미룬 것이 소극적이고 비겁해 보인다고 할 수도 있지만, 목사로서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과 기독교와 신념이 다른 천도교와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중대한 일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가 기독교를 선택한 것도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신앙이 중요한 만큼 민족도 중요하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민족과 신앙, 이 두 가지는 다 버릴 수 없는 절대 가치였다. 그래서 그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늘의 뜻을 따르기로 하였다.

새벽마다 하나님께 그 일을 위하여 기도하였는데 227‘4000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 힘쓰지 않으면 더욱 큰 죄가 아니냐?’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마음에 남아 있던 의심과 주저하는 마음을 버리고 그날 아침 즉시로 오화영 목사에게 참여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오후 1시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의 집에서 모임 기독교 대표자 회합부터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신석구 목사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중에 맨 마지막으로 참여한 인사가 되었다. 그의 말대로 맨 나중에 참여하여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나독립운동에 참여 의지와 열심만큼은 누구보다 강열했다.

민족 대표들은 본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하였지만, 청년과 학생들의 폭력시위가 일어날 것을 우려해 하루 전인 228일 민족 대표자 회합에서 선언식 장소를 명월관(태화관)으로 바꾸기로 하였다.

손병희의 단골 요릿집이었던 태화관 후원 깊숙이 위치한 태화정에서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태화관은 탑골공원과 가까웠고 실제 소유주인 친일 매국노 이완용의 집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복수이기도 하였다. 난처해진 이완용은 이 집을 팔려고 내놓았고 그것을 남감리교회 여선교부에서 사들여 현재 이름인 태화 기독교사회복지관을 설립하여 소외계층을 위한 사회복지와 복음 전도를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신석구 목사는 31일 태화관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에 예정대로 참여하였다.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 중에 중국으로 떠난 김병조 목사와 지방에서 올라오지 못한 길선주, 유대영, 정춘수를 제외한 29명이 참석하였고, 오후 2시 한용운이 일어나 모임의 취지를 설명하고 만세 삼창을 하려는 순간 일제 경찰이 들이닥쳐 참석자 전원이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었다.

신석구 목사는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 하나가 되려는 각오로 3.1 운동에 참여하였다. 다시 말하면 죽을 각오로 참여한 것이다. 그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여 죽거나 사형을 당하면 그의 희생으로 수천 수백의 사람들에게 독립 정신이 씨앗으로 심어질 것이요. 그것도 안 되면 자신의 자녀 삼 남매에라도 심겨질 것이라고 바라보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하였다. 그런 결단을 했기에 31일 오후 2시 선언식과 그 이후 재판과정에서도 떳떳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독립의지를 밝히면서 타협하지 않고 올곧은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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