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천호 목사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십자가를 진 신석구’

신석구는 ‘외래 종교’ 기독교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유교의 가르침에 강한 자부심을 품고 있었을 뿐 아니라 거기에 개인과 민족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런 그에게 기독교는 도전이었고 장애물이었다.
신석구가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고향 친구인 김진우의 끈질긴 설득도 있었지만, 새사람이 되어서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빼앗아 갔고, 한국의 내정을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1907년은 일본이 한국 지배를 사실상 마무리한 해로 기록된다. 고종은 외교권 회복을 위하여 헤이그 만국평화회담에 밀사를 파견하였으나 오히려 퇴위압력을 받고 왕위를 순종에게 물려주어야 했다. 일본은 정미 조약을 체결하고 군대를 해산함으로 국가의 주권과 행정을 찬탈하고 말았다. 이 같은 일제의 침략과 지배 과정에서 민족저항운동이 일어날 것은 당연하다. 국권 회복운동, 민중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 의병항쟁 등 다양한 형태의 민족운동이 이 기간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의 참여가 이루어졌다. 국권 회복을 비는 구국기도회를 비롯하여 국채보상운동, 납세거부운동, 민중계몽운동에 기독교인들의 참여가 두드러졌으며, 1907년에는 전국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나 회개와 중생, 성결을 통하여 한국인들은 비로소 기독교의 본질적인 신앙을 체험하게 되었고 도박과 사기, 간음과 강간, 횡령과 절도 같은 죄를 회개함으로 윤리적 갱신을 실천하였다. 또한, 백성들이 그동안 죄로 인식하지 않았던 술과 담배, 축첩이 죄로 인식되면서 새로운 윤리가 형성되어 기독교는 사회개혁의 원리로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종교의 근본이 ‘사람 되게 하는 것’이라면 유교의 가르침도 결국 사람 되는 것에 목적이 있는 만큼, 공자의 유교도 사람 만드는 데 효과가 큰 종교이므로 기독교에 들어가는 것을 양해할 것이 분명하리라 생각하여 유교와 공자에 대한 부담감을 벗을 수 있었다. 신석구는 개인 구원이 사회구원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사람 되기는 한 개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향력은 사회와 국가로 확산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의 자서전에서 “참으로 나라를 구원하려면 예수를 믿어야겠다. 나라를 구원하려면 잃어버린 국민을 찾아야겠다. 나 하나 회개하면 잃어버린 국민 하나를 찾는 것이다. 내가 믿고 전도하여 한 사람이 회개하면 또 하나를 찾는 것이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국민을 다 찾으면 나라는 자연스럽게 구원받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죄악이 가득하다. 주색잡기에 침범치 않은 자가 몇 사람이나 되나. 내가 예수교 진리는 모르나 우리가 다 예수를 믿어서 주색잡기만 하지 않는다 하여도 잃어버린 국민을 찾는 것이 되겠다.”고 기록하고 있다.

1907년 7월 14일 “잃어버린 국민을 되찾기 위해” 개종을 결심하고 고량포교회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렸고, 그곳에서 정춘수를 만나게 되었다. 정춘수는 신석구가 살던 ‘갯골’에서 30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청주군 회인면 두산리(현 청원군 가덕면 계산리) 동래 정씨 집안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청주 고을에서 알아주는 한학자였다. 정춘수도 나이 열한 살 때 부모가 모두 별세하였는데 ‘3년 거상’ 동안 한 번도 상복을 벗지 않음으로 인근에서 ‘효자’ 소리를 들었으며 신석구도 어려서 그 소문을 듣고 한번 만나보고 싶어 하였던 인물이었다. 정춘수는 1903년 여름, 원산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하디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개종한 후 1904년 2월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9월부터 남감리회 전도사 직첩을 받고 개성 남부교회를 담임하며 경기도 일대에서 전도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1907년 여름 그가 고랑포교회에 설교하러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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