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뉴스
UPDATED. 2018-09-21 12:23 (금)
충주 예성동호회 발족과 고구려비
충주 예성동호회 발족과 고구려비
  • 동양일보
  • 승인 2012.08.05 17: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주 고구려비’에 관한 일반적인 보고서 ②

1979년 발족된 충주의 문화재 애호단체인 ‘예성(蘂城)동호회’는 당시 충주검찰지청 검사였던 유창종(67·현 변호사)회장이 창립의 산파역 이었다. 충주지역에 살면서 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있던 아마추어 문화재 애호가 모임인 이 동호회는 어느 모로 보아도 세간의 눈길을 끌만한 동아리였다. 이 동호회의 멤버는 당시 충주예총지부장을 맡고있던 김풍식(김풍식신경외과원장·별세)·최영익(충주여상고 교장)·김예식 (중원군청공보실장·별세)·장기덕(미덕중 교장·별세)과 필자 등이 창립 발기인이었다. 유 회장이 3월 2일자로 의정부 검찰지청으로 전보발령을 받게 되자 회원들은 2월 24일 토요일 유 회장의 송별답사 및 기념촬영을 하기위해 충주 인근의 중앙탑(국보 6호) 일대로 답사를 갔다. 중앙탑 부근에서 기와 편들을 수습한 후 인근 용전리의 입석마을 어귀에 있던 비석을 조사하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이 비석의 존재는 그 이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회원 중의 한분이 이 비석은 조선 숙종 때 가금면에 거주하는 이동호 선생의 선조에게 하사된 사패지지비 라며 토지경계비라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패지지비 이던 경계비 이던 간에 조사를 해보자하여 입석마을에 도착했다. 비석의 전면으로 이끼와 청태 등이 두텁게 덮혀 있었다. 그러나 부분 부분에서 글자가 확인되었는데 전면의 하단부에서 ‘國土’. ‘土內’. 측면상단에서 ‘安城’이라는 글자가 확인됐다. 특히 ‘안성’으로 읽어진 글자를 보고 필자는 “경기도 안성이 왜 여기에 있지? 안성까지가 이동호선생네 땅이였나” 라며 중얼거린 기억이 있다. ‘안성’으로 읽었던 것은 훗날 고모루성으로 밝혀졌지만…(고모루성은 광개토태왕비문에 보이는 고모루성과 동일한 지명이다) 이 비석을 조사하면서 손가락으로 문자를 확인하는 과정이 촬영된 회원 사진은 그해 발간된 예성문화 창간호에 게재됐다. 이로서 이 비석이 종래에 알려진 백비 또는 입석이 아니고 석비였음이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 1979년 2월 24일 오후 2시께였다. 이때까지도 이 비석의 내용은 물론, 이 비가 훗날 대한민국의 국보 205호가 되는 ‘충주고구려비’가 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 하지 못했다.

예성동호회에서는 충주의 역사·지리적인 환경 때문에 신라 진흥왕의 비가 충주인근의 어딘가에는 있을 것 이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 지금의 충주박물관이 위치한 논바닥에 옛 비석이 매몰되어 있다는 동네 어른들의 말을 듣고 수 없이 파보기도 하였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그 당시에는 문화재보호법 등은 알지도 못한 용맹(?)함 때문 이련가… 또 어느 분이 금가면의 산속에 태대각명의 고비(古碑)가 있다하여 금가면의 하담리 일대의 산속을 수 없이 헤집고 다닌 기억도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 후 이 비석에 대한 회원들의 궁금증은 급기야 당시 청주대학교박물관장인 김영진 교수에게 자문 받기로 하여 연락을 취하였다. 3월 초순경 충주에 온 김 교수와 만나서 입석마을로 가는 도중에 회원인 김예식씨가 비석의 조사에 앞서 충주시 신니면에 소재한 견학리 면서 반월형석도와 석검. 석부 등을 수습하여 한껏 들뜬 마음으로 내려오는 길에 마을에서 잔치가 있었는데 주민들은 초면인 우리의 손을 반갑게 끌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일행도 후덕한 시골마을의 인심에 녹아들어 탁주 한 사발을 마시는 동안 날이 어두어 졌고 우리들이 타고온 차량 제공자인 허인욱씨가 급한 볼일 있어 시내에 간다고 하여 이 비석의 조사는 다음기회로 미뤄졌는데 그 ‘다음의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았다.

1979년 4월 8일 고구려비를 새마을창고로 옮긴후 예성동호회 회원들의 기념사진. 서있는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풍식·유창종·최영익·김예식. 앉아있는 왼쪽이 필자이며 사진은 장기덕 회원이 찍었다.당초 계획대로였다면 고구려비의 학술조사는 청주대학교박물관의 몫이 되었을 것 이었다. 이 일 이후에 필자는 유물에 대한 선입감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고, ‘다음에 보자’는 게으름이 어떠한 방향으로 역사가 전환되는지 깊은 깨달음으로 남았다.(이 비석에 대한 선입견이 충주고구려비를 고구려의 작품으로 판단하는데 어떠한 어려움으로 작용했는가는 이 글의 후반부에 밝히고자 한다.)<매주 월요일자 연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충청대로 103 (율량동)
  • 대표전화 : 043)218-7117
  • 팩스 : 043)218-7447,7557
  • 창간 : 1991-12-29
  • 제보전화 : 043)218-722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원중
  • 명칭 : 동양일보
  • 제호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 등록번호 : 충북 가 00003
  • 등록일 : 1991-12-27
  • 발행일 : 1991-12-27
  • 회장 : 조철호
  • 발행/인쇄인 : 유영선
  • 편집인 겸 편집국장 : 김영이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18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ynews@dy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