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주 희  침례신학대 교수

우리 문학에서는 한 때 아버지(뿐 아니라 오빠를 포함한 건장한 남자)는 대체로 부재하는 존재였다. 전시에는 전쟁 때문에, 난세에는 비분강개하느라, 가난한 때는 또 그래서, 돈푼이나 있으면 주색 잡느라, 이념에라도 휩쓸리지 않을 때는 사는 게 허무해서.

이러저러하여 아버지는 늘 자식들 곁에 없었고 상징으로나 존재하는 가장을 대신해 어머니(뿐 아니라 누나)가 일상을 책임져야 하는 이야기들이 그득했다. 아비없는 집 자식들 곤고한 삶이야 새삼 일러 무삼할 일이고 보면, 소설이나 시 작품 속에서 어머니와 누이는 아버지나 오라비의 빈자리를 채우며 집 안을 건사하고 어린 동생들을 길러낸 눈물 덤벙 뿌리게 하는 아릿한 대상으로 그려지기 일쑤였을 것이나, 실은 아버지의 삶도 다른 방식으로 고단했으리라는 짠한 유추 또한 가능하다. 하여 온갖 좋은 수사들 안듣고 평범하게 살게 되기를 원했을 여성들, 어머니와 누나, 언니들에게 일상의 온갖 무게들이 던져져 왔으니, 시대 흐름에서 그래야 하는 것으로 알고 살았던 그런 시기 남자들의 보편적 안타까운 풍경이었다고 아버지들을 안쓰러워 할 만치 지금 아버지들이 저녁 밥상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인지 어쩐지.

그런 의미에서 권희돈 권소정의 수필집 구더기 점프하다는 각별하게 와 닿는다. 아버지와 딸이 함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서 책으로 묶었다. 하필 구더기일까 물을 때 질구질하고 러운 세상살이 속 가 막힌 시선들이 보는 세상이야기라던가 어떻다던가. 아버지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정년을 맞았고, 딸은 그림으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함께 뜻을 모았다. 이 책의 아버지는 자식 곁에 있다. 무엇보다 딸과 한 자리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각자 할 수 있다는 기획 자체가 아버지의 귀환이 아닌가. 거대하고 무섭고 위대한 조국의 아버지가 아니라 자식에게는 각자 자신의 아버지가 필요한 법. 함께 밥 먹고, 과제를 도와주며, 친구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아버지, 부모에게는 자식이 여럿 일 수 있지만 자식에게는 부모가 세상에서 유일하기 때문이다. 부모와 함께 하는 일상이야말로 자식에게는 가장 우선 확보되어야 하는 조건이 되기도 할 것이다. 책은 아버지와 딸의 글이 번갈아 구성되어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온 아버지와 딸이 추억을 공유하면서 기억과 눈길이 가 닿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글로 적었다. 아버지는 한 사람의 가족원으로 귀환한 것이고, 딸은 따뜻한 그림들로 아버지와 자신의 삶을 환대하고 있다.

아버지는 시인다운 찬찬한 관심과 따뜻한 온기로 단지 따뜻하거나 단지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람살이의 고단함을 안쓰러워한다. 그가 전에 쓴 시에서 독자에게 오래 회자되었던 살아만 있으면 된다는 구절처럼 유능해질 수만도, 멋있을 수만도, 기쁨에 가득차서만 살 수 없는 어려운 사람살이들에 대한 안쓰러움을 배경으로 삼고 응시한다. 하여 그 한시대의 남자라면 관심을 두지 않았을 설거지해 놓은 그릇들도 보이고, 동생이 쓴 편지를 떠올리며, 아들을 장가보낼 때의 설레임도 고백한다. ‘설거지라는 글에서 큰 그릇이 작은 그릇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모습이 간고등어처럼 다정해 보인다. 나도 저와 같이 안이 되거나 바깥이 되거나 하였으면 좋겠다. 비어 있기에 저렇게 평화롭게 안기도 안을 수도 있는 거로구나.”라는 것처럼 무연히 사물을 보다가도 그 안에서 평화를 찾아낸다. 그건 어쩌면 아버지가 한창 젊었을 때는 보이지 않았거나 보고 싶지 않은 일 일지도 모른다.

딸은 청춘의 한 시기를 막 통과해내는 중이지만 사는 일을 현명하고 지혜롭게 넘어가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아버지처럼 따뜻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일상 귀환에 대해 딸이 보내는 가장 큰 헌사는 아마도 웅숭깊게 자라있는 한 단계를 보여주는 그 일일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드러내는 글과 부쩍 성장한 재주를 드러내는 그림으로 아버지의 삶과 같은 글을 더 아름답게 위무하는 공동 작업으로 확인시켜주는 그런.

사는 일이 힘들고 외로울 때 마음과 재주를 합해가는 무엇, 어떤 계기, 누구인가 있다면 쓸쓸한 고비들을 슬쩍 건너갈 위로를 우리도 삼을 수 있으리. 진흙놀이라도 함께 할 마음들이 남아있는 한. 무엇이라도 함께 해낼 시간을 살아내는 중인 우리는. 때로 책은 내용만이 아니라 그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만으로도 관계를 소환해낼 수 있기도 하다.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어지게 하는 그런. 하기야 요즈음은 퇴직한 남자들이 나갈 곳이 없어 괴로워한다는 이야기들이 또 흉흉해지는 추세이기는 하지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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