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신 준 청양군 대치면 산업담당

오래 전 부터 좋아하는 드라마가 있다. ‘북쪽나라에서라는 일본 드라마다. 지난 81년부터 매주 금요일 방송된 드라마인데 처음에는 24회분의 주말드라마를 계획했다고 한다. 방송 종영 후에도 시청자들의 성원으로 87첫사랑, 95비밀, 98시대 등 2~3년마다 한편씩 후속작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시리즈 최종편 ‘2002유언40%대의 높은 시청율을 기록하고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한다.

주인공은 고로라는 중년 남자다. 그가 도쿄에서 아내와 헤어지고 고향 홋카이도로 아이들을 데리고 귀향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이들은 갑작스런 부모의 이혼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 설상가상으로 도시 아이들에게 견딜 수 없이 혹독한 홋카이도 겨울이 기다리고 있다. 드라마는 도시의 상처를 안고 고향에 돌아 온 고로 가족이 이웃과 더불어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 가족 이야기다. 서로 상처받고 치유하면서 가족과 고향이라는 공동체의 소중함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수려한 홋카이도 자연을 배경으로 그려냈다.

놀라운 것은 처음 배역을 바꾸지 않고 20년간이나 같은 연기자로 한 작품을 찍었다는 사실이다. 처음 방영 때 열한 살의 초등학교이었던 쥰(吉岡秀隆)2002년 종영 때 서른두살의 노총각이 됐다. 가게를 열면 몇 대씩 대물림하는 것이 예사인 사람들다운 장인정신의 산물이다.

시나리오 작가 구라모토 소오(倉本聰)는 이 드라마를 쓰기 위해 직접 홋카이도의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 곳에 살면서 광대한 대자연 속에서 실제 겪는 숱한 어려움들을 바탕으로 역경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고로일가를 실감나게 그려냈다. 결국 드라마는 폭발적인 국민적 호응 속에 국민드라마라는 호칭을 얻기에 이른다.

작가가 고로일가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북쪽나라에서는 단순한 가난한 날의 추억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물질적인 풍족함이 결코 인간의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문명비판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문명비판은 곧 인간성 회복으로 이어진다. 고로의 거친 삶을 따라 가노라면 월든의 소로우가 생각나고 조화로운 삶의 스콧 니어링이 겹쳐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시리즈 중 명작으로 꼽으라면 단연 ‘95비밀이다. 시리즈가 드라마다운 맛을 내기 시작하는 것이 아들 쥰과 딸 호타르가 성인이 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95비밀에서 드디어 격랑치는 인간사의 바다로 진입한다. 간호사가 된 호타르가 유부남 의사와 눈 맞아 야반도주하고, 도꾜에서 AV에 출연한 과거가 있는 쥰의 여자친구 슈가 등장하고일본의 치부가 남김없이 까발려 진다. 그러나 왠지 그 치부가 부끄러운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화장기 없는 그들의 적나라한 삶을 통해 인간의 맨 얼굴을 발견하고 사연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고로가 아들 쥰의 여자친구 를 만나면서 인간 고로의 진면목이 제대로 나타나는 것도 이 때부터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남에서부터 서로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갖고 있었으나 여러 가지 사연으로 쥰과 슈가 헤어지는 바람에 그들은 시아버지와 며느리-가족이 되지 못한다. 아들의 여자 친구가 불을 지펴 욕조의 목욕물을 데워주고 목욕탕 안과 밖에서 벽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애틋한 이야기들목욕탕 안에 있는 고로를 남겨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멀어져 가는 슈의 모습...그날 천지를 노랗고 붉게 물들인 단풍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볼 때마다 늘 콧등이 시큰해 지는 명장면이다.

드라마에 감동받아 시나리오를 번역하고 싶어졌다. 5년 전부터 새벽마다 블로그에 시나리오를 연재하고 있다. (http://blog.daum.net/lazybee) 워낙 방대한 양이라 몇 번 쉬기도 하면서 아슬아슬 끊일 듯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며칠 전 다섯 권을 끝내고 여섯 권 째를 연재중이다.

매일 새벽 사서 고생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고로일가의 이야기를 이 땅에 전해 주고 싶어서다. 아름다운 가족 이야기는 점점 약해져가고 있는 우리네 가족의 끈을 되짚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끝을 알 수 없는 종말을 향하여 치닫고 있는 괴물(이 시대의 물질문명)에 대한 차분한 성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인가 이 이야기는 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의 맨 얼굴을 살피는데 더 없이 유용한 시금석이다. 대통령의 독도 방문 후 연일 적대적 프레임에 갖힌 자극적인 제목들이 온통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그렇다고 세상이 전부 절망적인 건 아니다. 신은 한 쪽 문을 닫으면 반드시 다른 쪽 문을 열어 둔다고 하지 않던가. 포털 귀퉁이에 걸린 일본 현지반응 기사가 희망의 실마리다. “그렇다고 해서 맛있는 부침개와 막걸리를 먹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말없는 다수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리라. 깊은 강은 늘 조용히 흐른다. 그동안 수많은 곡절 속에 두 나라는 이웃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또 살아가게 될 것이다. 두 나라 미래는 마음의 문을 열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 몫이다. 언젠가 이 땅에서도 사람냄새 물씬나는 고로 이야기 북쪽나라에서를 다 함께 시청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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