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자 전 청주 교동초 교사

동양일보 이달 길 여행은 ‘솔향기 나는 서해의 절경 충남태안 솔향기 길로 떠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어디론가 떠나려 해도 무엇이 나의 발목을 잡고 있는지 선뜻 나서지 못했다. 이번엔 내 일상을 훌훌 털고 떠났다.

태안 앞바다는 2007년 기름유출 사건으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120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몰려와 기름띠를 닦아주는 아름다운 마음이 녹아있는 곳이다. 늘 마음으로 빚진 것 같았던 그 곳에 갈 기회가 생겼다.

며칠 전 도보여행가의 강의를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들었다. 그는 65세에 처음으로 도보 여행을 시작했다고 했다. ‘늦었다고 생각 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했던가.’ 부럽다는 생각을 하며 ‘나도 한번 시도 해 볼까’하는 막연한 꿈을 가져보았다.

요즈음 유행처럼 길 여행을 하는 사람이 많다. 인간은 태어나 처음으로 걸음마를 걸으면 축복처럼 기뻐하는 우리다. 발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걸어 다니며 의·식·주를 해결했던 원시시대서부터 교통이 발달한 오늘날 우리의 생활풍습도 많이 변했다.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하루가 다르게 변화의 물결이 빠름의 시대로 몰아간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 쉼 없이 변화되는 삼라만상이다. 시속 300km나 되는 고속전철 시대에 살면서 많은 것을 놓치며 살고 있다.

차에서 내려 농로를 따라 가다가 언덕에 오르니 보랏빛 수국이 탐스럽게 피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길옆에 붉게 익어가는 산딸기향이 입맛을 유혹하기도 했다.

알뜰하게 정비해 놓고 온 국민들에게 알리는 차윤천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바닷가에 닿았다. 그는 이 길에 애착을 갖고 자기 혼자의 힘과 정성으로 땀 흘리며 가꾸어 놓았다고 했다. 피나는 노력으로 어려운 일을 굳건하게 해 온 그에게 뜨거운 찬사를 보낸다.

숲 사이로 바닷바람이 비릿하게 불어 와 내 코끝을 자극했다. 시야는 안개로 덮여있어 바닷물 빛을 볼 수가 없이 뿌옇다. 아쉬운 마음으로 허옇게 뒤덮인 저 곳이 바다려니 하며 바위 위에 붙어 있는 조개껍질로 눈길을 돌렸다. 130여명의 우리 일행은 오솔길을 마치 병정들이 행군하는 것처럼 일렬로 줄을 서서 걸었다.

‘솔향기길’은 바람처럼, 향기처럼 일상을 털고 찾아왔으니 오늘 하루 즐기리라 마음먹었다. 오르막길로 숨 가쁘게 오르다보니 도깨비엉컹퀴가 곱게 피어나고 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꽃이라 자줏빛 얼굴에 손을 살짝 얹어 보았다. 수염 꽃잎이 바르르 떨었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저절로 피었다가 지는 꽃이다. 자기 나름대로 씨를 퍼트리며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생명체인 것을 어찌 우리 마음대로 하려는지 모르겠다. 내리막길에서 만나는 바람은 내 목덜미의 땀을 식혀주어 고마웠다. 산위에서 부는 바람 고마운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다. 바다를 바라보고 숨을 고르며 여유를 부려본다.

이 곳 솔잎의 향기만큼이나 상큼한 숲길에서 풀잎도 초록, 나무도 초록, 소나무 숲 사이로 비치는 햇살도 초록빛이다. 그 맑고 싱그러운 잎들의 예쁜 초록색 고운 빛이 찌든 마음과 생각까지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이름 모를 새소리와 바람소리 그리고 뱃고동 소리와 어울려 출렁이는 파도가 되었다. 이 싱그러운 자연의 맑은소리 가득한 솔향기길 정자에 올라서서 크게 심호흡을 해 본다.

한낮인데도 바다위에 깔린 덧옷은 아직 벗지 않았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썰물이 된 저 바다 빛을 볼 수 있을까. 산길을 내려와 해안가에 펼쳐진 자갈길을 걸었다. 따끈따끈한 햇볕이 돌을 달궈 발바닥을 데워주었다. 오기 전에는 해안도로 옆으로 난 펑퍼짐한 숲길을 쉽게 걸을 수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랐다. 산길을 오르고 내리막을 잇는 외길에 서서 모두들 기진맥진하며 숨을 골랐다. ‘자연은 말없는 선생님’이라는 말과 같이 많은 것을 터득했다.

두발로 떠나는 여행은 자연을 몸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시간이다. 어느 순간 지나온 길만큼 묻혀 온 것들이 무거워 지는 길.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느릿하게 길을 걷는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온 그 길이 즐겁고 행복하고 쓰리고 아픈 상처 때문에 가슴앓이로 웃음과 눈물로 범벅된 외로운 길. 이제 거침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흙냄새, 풀냄새, 꽃향기, 바람향기, 사람냄새, 거름냄새, 온갖 냄새 맡으며 거친 길을 다듬으며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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