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인희 진천문인협회장
근대 문학의 선구자인 충북 진천이 낳은 조명희 선생을 기리는 ‘11회 연변 포석 문학제’를 다녀왔다. 단순히 문학예술을 거양(擧揚)하는 행사가 아니라고 여겨져서 마음은 참으로 숙연했다.
2002년부터 중국 정부는 고구려·발해의 영토였으며, 조선 말기부터 우리 민족이 개척하여 지금껏 우리 말과 글을 사용하고 있는 동북지역의 3성(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을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미명하(美名下)에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는 과정의 모습들을 면면히 보고 느낄 수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첫째 날, 인천국제 공항에서 1시간 남짓 날아 중국 심양에 도착했다. 이렇게 가깝게 이웃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과 심양에서 다시 통화까지 가는 길목에 끝없이 펼쳐지는 옥수수밭은 대륙의 땅임을 실감케 했고 문득문득 차창에 스쳐가는 회색(灰色)벽의 단아한 초가(草家)는 외롭게 우리 것을 지키고 서있는 올곧은 선비의 모습같아 동포에 대한 애잔함도 느낄 수 있었다.
둘째 날, 고구려 2차 도읍지였던 집안(集安)에서 환도산성(丸都山城)을 올랐을 때, 곳곳이 무너져 채마밭으로 널브러져있는 현실과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를 보호 하겠다고 조악(粗惡)하게 지붕을 해 얹고, 접근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모습과 도굴되어 황량하게 돌덩어리들만 나뒹구는 장수왕릉. 그리고 우리 민족의 기상을 웅변하는 고분의 벽화엔 물줄기 줄줄 흐르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가슴 아려옴을 느꼈다.
셋째 날, 압록강·두만강에 이르러 손만 뻗치면 닿을 것 같은 저 북녘 땅은 시골 사랑방에 걸려있는 흑백사진처럼 미동(微動)도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서있어 숨 막힐 것 같았다. 또 뱃사공의 말에 의하면 굶주림에 지쳐 무작정 국경을 넘는 대부분의 동포들이 중국인들에게 붙잡혀 노예같이 중국 전역으로 팔려 나간다고 했다. 힘없는 백성의 고단함과 처절함이 이 보다 더 하랴
넷째 날, 아침 일찍 서둘러 독립운동의 산실(産室)이며 표상(表象)인 비암산 엘 올랐다. 높이 솟구친 일송정(一松亭)에서 ‘언제나 변함없는 소나무·잣나무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더욱 푸르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라는 논어의 글귀가 새롭게 우리 일행을 일깨워 주는 듯했다. 그리고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생각하며 차분하게 마음을 다잡아 함께 ‘선구자’를 가슴 뭉클하게 불렀다.
그리고 우리들이 청소년기에 한 번쯤은 마음을 맑게 씻고 생각을 영글게 한,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노래한 ‘서시(序詩)’의 작가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방문했다. 한창 새롭게 단장을 하고 있었으나 마당 한 모퉁이 세워 놓은 시비(詩碑)에 ‘중국 민족시인 윤동주’라는 문구를 볼 때, 심장이 멎는 듯했다. 아주 철저하게 중국화 하는 동북공정의 단면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다섯째 날, 드디어 ‘11회 연변 포석 문학제’가 있는 날이다.
연변대 예술학원 음악홀에 충북 방문단과 동포 300여명이 홀을 가득 메웠다. 연변대 김성희 교수의 사회(司會)로 시작 되었는데, 연변 포석회 리임원 회장은 대회사에서 “조명희 선생의 작품은 이곳 동포들에게 의식을 일깨워주고 글을 쓰는 문인들에게는 자양분이 되었다”라고 하였으며, 조선족 아동문학가 한석윤님은 “조명희 선생은 한국에서보다 중국에서 더 많이 알려진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우리 민족의 보배”라고 하였다. 이에 진천 군민을 대표하여 참석한 김정선 부군수님은 “우리 동포사회에서 문학적으로 빛나는 업적을 남긴 조명희 선생이 우리 고장 출신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마음 깊이 고개가 숙여 진다”고 하였다. 또한 포석 문학제가 시작 될 때부터 10여년이 넘도록 뒤켠에서 묵묵히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장석연 목사님은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한 포석의 짧은 생의 삶이 오늘따라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고 하였다.
다음에는 ‘조명희 청소년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우리와는 다르게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고등학교와 대학을 한데 묶어서 시(詩)와 수필 부문으로 금·은·동상이 수여 되는데, 작품의 수준 문제로 금상 수상이 없는 부문도 있었다. 이렇듯 이곳에서는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일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입상한, 한 여중생이 소감을 발표하는데, ‘남한(南韓)으로 돈벌이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글로 표현하다 보니, 글 쓰는 재미와 무엇이든 골똘히 생각하는 습관도 생겼으며, 우울했던 마음도 밝아졌다’는 이야기에서 문학의 작은 불씨가 가정과 사회를 맑고 밝게 싹 뛰우고 이 ‘조명희 청소년문학상’이 동포들과 연결하는 징검다리로써 큰 역할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이어서 연변 라디오방송국 아나운서인 김계월씨와 한국의 시낭송가 장경미씨가 포석의 시를 낭송 하였고 연변의 오철룡씨의 퉁소 연주, 전예정씨의 민요 독창 등 다채롭고 격조로운 문화의 진수(眞髓)를 엿 볼 수 있었다.
또 포석의 종손인 조철호 시인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포석 문학제를 해마다 개최하는 연변 포석회 및 한국 방문단에게 감사의 인사 말씀과 포석의 문학정신이 우리 민족의 꺼지지 않는 햇불이 되어 국경을 뛰어넘는 동포애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목탁 같은 힘을 발휘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기 우리 민족이 척박하기만 하였던, 이 만주 땅에서 ‘연변 조선족자치주’를 발족하고 지금까지 60여년이 넘도록 조명희 선생의 작품들을 어린 학생들에게 읽히고 문학 혼을 불사르고 있는 모습과 양국을 오가며 포석의 문학세계를 세상에 드러내 꽃피우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동양일보 관계자분들이 마치 글로벌 국제화 시대에 제2의 또 다른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 같았다.
이번, ‘11회 연변 포석 문학제’를 마치고 돌아오는 발길에 육당 최남선 선생께서 우리 민족이 강대국의 틈새에서 살아남으려면, “가감(加減)의 손익에만 관심을 갖고 눈으로 그릴 수 없는 승제(乘除)의 세계를 모른다면 우리들은 언제나 늘 큰 어려움에 봉착 될 것” 이라고 염려 하셨던 말씀이 더욱 가슴 깊이 새롭게 파고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