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형 일 극동대 교수오늘은 한글 반포 566돌을 기념하는 한글날이다. 아마도 세상의 수많은 글자 가운데 그것을 만든 이와 반포일은 물론 글자를 만든 원리까지도 알려져 있는 경우는 한글이 유일하지 않은가 싶다.

한글은 조선 4대 임금 세종대왕과 그를 도운 집현전 학자들이 창제하였다. 실록에 따르면 1443년(세종 25년) ‘이달에 임금이 몸소 언문 28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3년 뒤인 1446년(세종 28년) 9월에는 ‘이달에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是月訓民正音成)는 기록이 나온다. 한글날이 10월 9일로 정해진 것은 1940년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 ‘세종 28년 9월 상순’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느 민족과 나라든지 자신들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남긴 풍부한 기록유산들은 찬란했던 당시의 생활상을 지금까지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반면, 이들보다 훨씬 우수했음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인 기록수단을 갖지 못한 많은 고대의 문명들은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잃어버린 세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 민족은 중국에서 유래된 한자와 한문을 사용해왔지만 말과 글이 다르다보니 사용하기가 불편했고 일반 백성들은 제대로 배우기도 어려웠다. 세종의 한글 창제는 이러한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 고유의 글자로 자리 잡기까지 많은 곡절이 있었다. 한글 창제 당시부터 대제학인 최만리를 비롯한 많은 학자와 대신들의 반대가 있었고, 반포 이후에도 오랜 세월 한자와 한문생활에 젖어있던 사대부 계층에서는 한글 쓰기를 거부하였다. 한 때는 부녀자나 아이들이 사용하는 ‘언문’으로 폄하되기까지 했다. 한글이 공식적인 나라글로 인정된 것은 1894년 갑오경장 때였지만, 뒤이은 일제 강점기에는 집요한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끊임없는 탄압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민족주의 국어학자들이 한글날을 제정하고 기념식을 거행했다는 사실은 우리 고유의 말과 글을 사랑하는 것이 민족의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는 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글을 지키기 위한 선조들의 이러한 노력과 수고로 이제 우리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말과 글로써 마음껏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 무심코 사용하다보니 그 고마움을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지만 적어도 1년에 한 번 맞는 이날만큼은 한글의 중요성과 가치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얼마 전 KBS 2TV 드라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의 제목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란이 벌어진 바 있다. 이 드라마의 원래 제목에는 ‘차칸남자’란 표현이 사용되었다. 제작진은 이 표현이 “극 중 뇌손상을 입어 기억을 잃게 되는 주인공이 자신의 일기장에 잘못 쓴 것”에서 인용한 것으로 극의 전개에 꼭 필요한 표현이라고 해명했다. 결국 한글 관련 단체 및 기관의 강한 반발로 제목을 철자에 맞게 정정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를 두고 한글의 올바른 사용이 중요하다는 입장과 창작자의 표현자유 제약이라는 주장간의 논란은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다.

제작진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영화 ‘말아톤’이나 ‘구르믈 벗어난 달처럼’의 경우처럼 일부러 철자를 틀리게 함으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명확하게 표현하는 사례는 종종 있다. 다만 이번 경우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지상파방송에 편성된 드라마이고, 스쳐지나가는 대사나 자막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드라마의 공식적인 제목이라는 점에서 예민한 반응이 나온 것이다.

가뜩이나 한글의 사회적 위상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기왕이면 한글 파괴논란을 일으키지 않고도 창자자의 의도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이 선행됐으면 좋았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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