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주 희 침례신학대 교수

날이 서늘해지기 시작혀면 사는 일이 곤고하다는 생각을 습관처럼 해왔던 것 같다.

추위에 얼며 잠들던 고대적 고단함이 기억의 유전자 속으로 전해지기라도 한 것일지. 추위와 어두움에 유독 약해서 굳이 문학평론가 노드롭 프라이가 한 말이 아니더라도 허기 두려움까지 유사한 감정의 범주에 두고 피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제는 나이드는 일도 하나 더 추가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저 애는 일년의 절반을 내복과 함께 보내, 어린 시절 추위를 끔찍하게 타던 나를 언니가 놀리던 말이다. 슬픔 같기도, 허기 같기도, 두려움 같기도 한 명료하게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은 더위가 가고 날이 서늘해지기 시작하면 징후처럼 서서히 나타나 불안했다. 동굴에 무사히 돌아와 목숨의 고단함을 쉬는 그 원시적의 한 날처럼 겨울잠을 꿈꾸기도 하면서 추위를 미리 걱정하는 것이다.

지금 학교는 중간고사 기간이어서 긴장으로 충천해 있다. 모자를 쓰고 강의실에 들어서는 학생들이 많아졌고, 화장기 없이 푸석한 얼굴들도 늘었다.

머리 감을 시간도 아껴가며 공부를 해야 했으리라고 시험기간의 고단함을 이해하다보면,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젊음들은 아름답고도 안쓰럽다. 숨소리까지 들릴 듯한 적요와 답안을 쓰다 팔이 아픈지 오른 손을 흔드는 모습까지 이 아름다운 집중의 순간들이라니. 모두는 각자 집 안의 기둥이며, 미래이며, 소망인 미래들일지니, 이렇게 힘들게 익혔으니 보람있는 일에 자기 삶의 한 시기들을 던져 넣을 수 있는 기회가 이 젊음들 앞에 펼쳐지기를 절로 선생답게 바라게 되기도 한다.

장난기 동한 남학생들이 생일 맞은 친구들을 가끔 던져 넣는 날이면 왁자해지던 강의실에서 보이는 연못에는 물이 빠져 있다. 젊은 날 그 연못을 강의실에서 내려다보면서도 시간이 얼른 지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젊기 때문에 해야 하는 선택들과 내 결정으로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긴장이 힘겨웠을 그 한 때. 나이를 먹고 늙으면 좋겠다고 이런 저런 선택들에서 평화로워지고 싶다고 생각한 그 때, 나는 어떤 인간이 되고 싶었던 것인지. 결정해야 할 것들 다 정리 되어 안팎이 평화로울 것이라고, 머리가 온통 하얗게 세고, 얼굴에 기분 좋은 주름이 접히는 때면 저절로 착하게 웃는 어른이 되리라고 기대했을지.

그 때 어른들은 얼마나 지혜롭고, 안정되어 보였던가. 사람에 휘둘리지 않고, 쉬이 감정에 쏠리지 않는, 자기 생에 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노인은 곧 현자였고, 아픈 배를 쓸어 주는 손처럼 혜안이 잔뜩 담긴 한마디 잠언이 문제의 타래들을 풀어줄 것도 같았다. 나이가 저절로 지혜롭게 하지 않을 수도 있고, 늘어나는 허연 머리 카락이 성품을 착해지게 하는 것도 아니라는 아주 단순하고도 소박한 사실. 나이드는 일의 의미를 찾는 일, 착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아야 젊은 날 꿈꾸던 사람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나이 들어가면서 얼마나 깨달아 가는 중인지.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면 본격적인 가을이 시작될 것이다. 날은 점점 겨울을 향해 치닫고, 일찍 귀가해야 하는 이른 저녁들이 시작되고, 거리에는 일찍 불이 켜지며, 무슨 구원이기라도 하듯 첫눈을 기다리는 일들을 또 하면서 추운 겨울을 미리 익히게 될 것이다.

햇살을 받고 있는 나무들은 형광의 빛을 띠며 나뭇잎을 더 곱게 물들이는 중이다. 빛 아래서 나뭇잎들은 황홀하게 변모 중이다. 겨울을 나기 위해 이 잎들을 홀연히 떨구고, 의연해 져야 한다고 해도 내년을 기약할 희망이 있다는 건 다행한 일이리니. 세상 모든 일들은 닥치기 전이 더 두렵기도 하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감정의 습관으로 더 과장되기 일쑤이고 보면. 닥치기 전에 미리 염려하는 습관, 이제 이 나이쯤 살았으면 다른 방법으로 대응할 때도 된 것 아닌가 다짐을 두어본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 다가오지 않은 추위를 공포가 아니라 새로운 모험으로 바뀌기도 하는 건 해마다 보낸 겨울이 입증해주지 않던가. 중간고사가 끝나기 전에는 아직 본격적 가을이 아니라고 해두고, 서서히 추위에 적응해 들어가면서, 겨울을 날 준비를 해보면서, 뭐 용감한 모험이라도 떠나듯 의연해 지기로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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