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선 <충북환경운동연대대표>

편안하게 조성된 생태공원이자 깨끗한 수질을 자랑하는 호암지는 충주시민들이 운동이나 휴식을 위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의 역사를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호암지와 관련된 기록은 많다. 세종실록지리지 충주목조에 "대제(大堤)가 1이요, 소제(小堤)가 1이다. 길이 4백 80척인데, 66결(結)의 논에 물을 댄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여지도서와 충청도읍지, 호서읍지에 "소제(小堤)는 현의 남쪽 3리로 남변면에 있다. 둘레는 2068척이고 수심은 3척"이라고 말하고 있다. 1931년 오토거천(奧土居天) 등이 저술한 충주관찰지에 "지금의 호암제(虎岩堤)를 소제(小堤)라 불렀다....소제(小堤)는 예로부터 연지(蓮池)라 불렀는데"라고 언급되었다. 1933년 이영(李英)이 저술한 충주발전사에는 호암지 유래 및 축조과정, 현황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1958년 김상현( 金相顯)이 발행한 '예성춘추(蘂城春秋)'는 "종래에는 연지(蓮池)라 하고 지금은 호암지(虎岩池)라고 하는데 사직산 서편에 있는 충주수리조합저수지를 말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해마다 연화(蓮花)가 만발(滿開)하여 연못(蓮池)"으로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성여중 서편은 호암지의 상류에 해당한다. 부들과 버드나무군락지다. 습지가 잘 발달된 이곳부터 후렌드리호텔앞도로까지가 조선시대의 소제(小堤)에 해당한다. 현재 시민들이 즐기고 있는, 후렌드리호텔부터 제방까지의 큰 연못이 일제 때 확장된 지역이다. 일제는 조선을 자국의 식량공급지지로 삼기위해 산미증식(産米增殖)계획을 1920년부터 추진했다. 이를 위해 관개시설의 개선과 개간 등을 통해 농지를 확장하고 품종 개량과 퇴비생산을 통해 단위 면적당 수확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관개시설의 개선은 수리조합의 결성을 통한 저수지조성과 보(湺)건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충주에서는 1922년에 충주수리조합이, 1929년엔 대가미수리조합이 결성되었다. 호암지는 초대 충주수리조합장인 영목정일(鈴木政一)을 비롯한 충주거주 왜인(倭人)들과 일부 조선인지주들이 중심이 되어 1922년부터 1932년까지 11년 동안 만들어 졌다. 이 과정에서 충주민들은 혹독한 강제부역에 시달렸다. 범바우에서 내려온 물(충주천)을 사천개에 보를 설치하고 도수로(導水路)를 만들어 지금의 후렌드리호텔 앞으로 유입시켰다. 소재지명에 연유하여 '호암지'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예로부터 연꽃이 많아 연못(蓮池)으로 불리던 이름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삽과 괭이, 지게, 우마차 등으로 새벽부터 진행된 저수지 사업에 충주민들은 엄청난 강제노역에 시달리게 되었다. 사람이 개미떼처럼 모여 일했다고 하니 11간 공사에 동원된 충주민은 총 10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연히 적지 않은 부상자도 발생했을 것이고 더한 고통을 겪은 이들도 있겠으나 자세한 상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도심이 확장되면서 호암지는 운동과 휴식공간이 되었다. 농업기반공사는 작은 호암지를 메워 택지로 팔려고 했다. 환경단체가 나서서 이의 백지화를 요구하는 시민운동을 벌여서 막아냈다. 이 일이 끝나자마자 충주시는 호수주변을 위락단지로 만들려고 했다. 재차 당시 충주환경연합은 위락단지조성 철회와 생태공원 조성을 위한 시민여론을 불러일으켰다. 골프연습장도 이전하도록 했다. 도로확포장으로 호수 동쪽의 리아스식 호안은 직선화되었고 직강화 되어 안전에 위험을 주는 반친수적 지형으로 변형되었다. 남쪽은 다리를 없애고 성토하여 수안보로 가는 길을 넓히는 바람에 호수는 둘로 나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후 충주시는 환경부의 예산을 받아 생태공원조성에 들어갔다. 유감스럽게도 이 과정에서 습지를 조성한다며 국도3호선과 인접한 곳과 또 다른 곳에 조경석을 쌓아 호수 내에 다시 작은 연못을 만들고 수생식물을 심었다. 하지만 이곳은 오히려 수질이 악화되어 여름엔 악취가 배어나와 휴식하러 나온 시민들을 불쾌하게 만들고 있다. 산책로는 아스팔트로 포장하여 걷는데 불편을 주고 있다. 데크목으로 과다하게 울타리와 다리도 만들었다. '생태공원조성'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이런 낭비적이고 반환경적인 공사는 더 이상 반복되어선 안 된다. 문화방송 맞은 편 입구부터 제방에 이르는 호암지구간은 차량통행을 전면불허 해야 한다. 아스팔트도로는 적어도 절반이상 걷어내고 흙길로 만들어 걷기 편한 길로 되돌려야 한다. 경관을 저해하는 광고판이나 현수막은 색채와 디자인, 크기를 제한하여 부착되도록 해야 한다. '충주수리조합성공사업기념비'와 수리조합장 조명규와 최지환 공덕비 등 호수 역사와 관련된 건축물에 대한 안내판을 제작해야 한다. 당연히 그들의 일제시대 행적도 표기해야 한다. 역사를 제대로 전승하지 않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호암지 조성과정에 겪었을 조상들의 아픔을 시민들이 익힐 수 있도록 충주시와 농업기반공사는 적극 나서야 한다. 해방 된지 68년이 되는데 벌써 과거를 잊어서야 되겠는가? 호암택지개발 과정에서 호암지 상류의 습지가 매립되어선 안 된다. 충주시는 한국토지주택공사에 이런 의사를 밝혀야 한다. 늦게나마 환경단체의 의견을 수용해 생태공원이 되도록 한 이시종전 시장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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