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옥
운호고 교사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가보다.
때로는 잠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픈 기억이 있고, 문득 스치는 향기에도 함박웃음 머금게 하는 추억도 있다.
도시에 위치한 H학교에 부임했을 때, 나는 30대 중반이었고, 2학년 담임을 배정받았다.
언제나 학기 초 학생들과의 만남은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이 있다. 3월 2일, 첫 아침 조회를 하러 교실에 들어가 보니, 볼이 발그레한 상냥한 얼굴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잔잔하고 싱그러워 보이는 여고생들의 모습에 내 마음도 한껏 여고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일종의 폭풍전야였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나중에 동료 교사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우리 반이 일종의 문제 반이었다고 한다.(어떤 커다란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반에 비해 비교적 말썽꾸러기들이 좀 많이 배정된 반) 그 말을 반증이라도 하듯, 지각을 밥 먹 듯 하는 학생, 머리에 노란 물감을 뿌려놓은 학생, 틈만 나면 조퇴할 궁리는 하는 학생, 무단으로 결석 하는 학생, 무슨 말을 하든 반항적으로 달려드는 학생.
한 학생을 지도하면, 다른 학생이 문제를 일으키고, 여기서 일이 터지면, 저기서 또 일이 터지고, 좌충우돌 그렇게 3개월이 지나니,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서 이젠 서로의 눈빛만 봐도 무엇을 말하려는지, 어떤 마음인지를 알게 되었을 무렵, 나는 출산을 위해 휴가원을 내게 되었다.
휴가를 앞두고, 임시 담임선생님께 우리 반 학생들의 일반 자료와 갖가지 상담 기록을 전해드리고, 학생들에게는 다음 주부터 출산 휴가를 가게 되었다고 말하며, 임시 담임선생님을 소개해드렸다.
잠시 동안의 이별이었지만, 학급 학생들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마지막 날 종례를 하려는데, 반장이 앞으로 나와서 앙증맞은 케이크에 촛불 한 개를 켜놓고 아기의 탄생을 미리 축하한다며, 학급 학생들과 함께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나는 그 순간 너무도 행복했고, 가슴이 뭉클했다. 이런 마음은 선생이 아니고서는 느껴볼 수 없는 보람이었다. 순산을 기원한다는 박수소리를 뒤로하고 교실을 나와 교무실에 들어왔을 때, 나는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책상위에 두 팔을 펼쳐도 닿지 않을 만큼 기다란 대장각 미역과 한 아름으로도 부족한 커다란 늙은 호박이 떡하니 올려져있는 게 아닌가? 나는 놀랍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여 (그때만 해도 내가 젊었으니까 내 주위에는 나보다 선배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고, 늘 조심스럽게 생활하고 있을 때였다.) 얼른 미역과 늙은 호박을 들어 아래도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 고마움의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던 나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 교무실에 계셨던 선생님들이 일제히 박수를 쳐주셨고, 2학년 3반 만세를 외쳐주셨다.
3개월 동안의 고군분투(?)가 눈 녹듯이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그 후 나는 건강하게 막내를 출산했고 3개월 후 가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우리 반 학생들과 다시 만났다. 3학년으로 진급하기 전까지 ‘사랑과 전쟁’을 거듭하며, 그러나 알콩달콩 소소한 행복을 가꾸며 우리는 찬란한 삶의 한 순간을 신뢰로 엮어갔다. 그때 2학년 3반 누나들의 축복 속에 태어난 아이가 지금 고 1이 되었으니, 세월은 참으로 빠르기만 하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덥다. 맛깔스런 반찬거리가 없을까 생각하며 며칠 전 재래시장을 갔었다.
여기 저기 좌판에는 손수 농사를 지어 따오신 애호박이며, 오이, 풋고추, 호박잎, 깻잎 등이 싱그럽게 놓여 있었다. 그때, 나는 문득 늙은 호박을 생각했고, 한 할머니께 요즘도 늙은 호박이 나오냐고, 살 수 있냐고 여쭤보았다. 할머니는 웃으시며, ‘아니 이 한 여름에 무슨 늙은 호박이냐’며, 손사래를 치셨다. 아! 그랬었구나! 도대체 그 때 우리 반 학생들은 어디를 얼만큼 헤메다가 그 귀한 ‘한 여름의 늙은 호박’을 구해왔을까? 육거리 시장일까? 북부시장일까? 아니면 어느 집에서 출산을 앞 둔, 딸, 며느리를 위해 정성껏 보관해오던 것을 가져온 것은 아닐까? 한 여름 햇살이 기울어가는 서쪽하늘을 바라보며, 노을보다 더 붉고, 동그랬던 그 여름의 늙은 호박이 떠올랐다.
다시금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 동네에 같이 살았던 반장 명숙이, 노란 머리 순이, 반항적이었던 눈빛을 햇살 가득한 미소로 바꿔 준 경식이, 졸업 후, 예쁜 숙녀가 되어 찾아왔던 남례. 나와 맺어진 이 소중한 인연이 있었기에 나의 지난 시절 추억이 이토록 아름다운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