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만나는 세종대왕 힐링로드 100리길 <2>



걸음마다 숨어있는 낭만·역사 가득휴양 여행이 요즘 ‘대세’라지만, 단순하게 ‘치유(힐링)’, ‘명승지’만 찾고 있다면 이미 ‘구식’ 여행을 할 뿐. 여행에 나름의 의미를 주고 싶다면 여행지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는 “여행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생각의 성(城)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길 위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는 여행. 삶을 관찰하고, 인생의 지향점을 다시 설정해보는 여행을 꿈꿔본다.
청주와 청원, 증평의 여행지를 한 데 묶은 ‘세종대왕 힐링로드 100리길’은 문화와 여행, 생태환경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길로 만들어진다. 힐링로드 100리길 곳곳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본다면 더욱 설레는 여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미리 만나는 세종대왕 힐링로드 100리길’로 초정약수와 청주중앙공원, 국립청주박물관 등 길 안팎에 숨겨진 이야기를 소개해본다. <편집자>

●세종대왕과 초정약수
청원(淸原). 언뜻 고속도로 한쪽을 지나가다 보이는 인터체인지(IC) 이름쯤으로 연상되지만, ‘맑음의 근원’이라는 아름다운 뜻을 가지고 있다. ‘청원’의 맑음을 미리 알고 이곳을 치유의 장소로 택한 인물이 있으니 성왕이라 불리는 ‘세종대왕’이다.

●‘맑음의 근원’ 먼저 알아본 세종대왕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세종대왕이고 한국인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일은 한글창제라고 한다. 이토록 존경하는 세종대왕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저 세종이 태평성대를 이룬 성군이었다는 정도로 기억하고 있진 않을까.
좀 더 알고 있다면 집현전을 설치해서 학문에 힘썼고 해시계와 물시계 등을 발명토록 해서 과학 기술 발전에도 앞장섰던 것을 그의 주요 업적으로 손꼽을 것이다.
한국인이 존경하는 세종대왕이 ‘시각장애인’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세종대왕은 재위기간 31년 중 8년 동안은 거의 앞을 보지 못했다.
세종실록에 보면 세종 23년 ‘임금은 눈이 보이지 않아서 정사를 볼 수 없기에 세자에게 전위하겠다는 뜻을 밝혔는데 신료들이 울며 만류했다’고 적혀있다. 세종대왕은 그 후에도 서너 차례 보위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는데 그 이유가 시각장애였다.
세종은 젊은 시절 육류 없이는 식사를 못 할 정도로 육식을 즐겼으며 사냥 등 운동도 싫어했다고 한다. 비만이 있었고, 35세 이후에는 당뇨병으로 추정되는 병과 눈병을 앓았다.
결국 세종대왕은 중도에 실명한 것인데, 원인은 ‘안질’이었다.
세종이 눈병(피부병과 당뇨 등도 앓았다)을 고치기 위해 물 좋은 곳을 찾아 휴양을 했다는 기록도 사서에 많이 남아있다.

●초수리 약수로 눈병을 고치다
광천수로 유명한 청원군 초정리는 조선시대 초수리라 불렀다. 이곳은 세종대왕이 눈병을 고치기 위해 117일이나 머무른 적이 있다. 청원의 ‘맑음’을 세종대왕이 먼저 알아본 것이다.
관련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 ‘초수리’로 검색하면 세종 재위 때 15건의 사료를 찾을 수 있다. 세종이 눈병을 치료하기 위해 초수리로 행차한 전후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사료들이다.
눈병에 걸린 세종이 초수리로 행차하기 직전 최만리를 비롯한 조정의 중신들은 중화를 앞세우며 언문 제작의 부당성을 내세우며 세종과 갈등을 빚는다. 이에 굴하지 않고 세종은 언문이 어리석은 백성을 교화시키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며 최만리 등을 의금부로 넘긴다.
세종의 행차가 이루어지기 전에 초수리 근처에 사는 백성 중에서 병 기운이 있는 사람들은 초수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초막을 짓고 옮겨가도록 했다. 눈병 걸린 관리들을 미리 보내 초수리 광천수가 안질 치료에 효험이 있었는지 확인도 했다.
세종 26년(1444년) 2월 28일 세종은 왕비, 세자와 더불어 초수리로 출발해서 3월 2일 도착했다. 세종은 5월까지 두 달 정도 초수리에 머물면서 눈병을 치료했다. 왕의 행차를 위한 길을 뚫고 행궁을 짓기 위해 논밭을 징발당한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술과 음식을 내리고 농사를 짓지 못하는 대신 쌀과 콩을 내리기도 했다.
같은 해 7월 15일~9월 14일에는 초정약수 인근에 행궁을 짓고 머물며 눈병을 치료했다고 기록돼 있다.
세종이 이곳에서 요양하면서 정사는 물론 훈민정음 창제 프로젝트까지 수행해 초수(지금의 초정리)행궁은 임시수도 역할을 했다.
초정약수는 병을 낫게 하는 ‘약수’로 미국 샤스터 광천수, 영국 나포리나스 광천수와 함께 세계 3대 광천수로 꼽힌다. 지하 100m에서 솟하나는 무균탄산수는 노쇠한 세포를 자극하고, 인체 기능을 활성화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청주의 숨은 이야기 속으로
직지의 고장으로 잘 알려진 청주는 충북의 중심지. 아름답고 서정적인 도시풍경과 더불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화재들이 산재한 곳이다. 가을을 맞아 도시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이야기 속으로 풍덩 빠져보자.

●충신을 알아본 1000년 은행나무
‘중앙’공원이라는 이름답게 청주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공원에는 1000년 가까이 한자리를 지켜온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있다. 나른한 오후 할아버지 무릎을 베고 누운 손주가 낮잠을 자고 있을 것 같은 편안하고 수려한 나무.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이 은행나무에도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고려 말 은행나무 옆에는 청주옥이라는 감옥이 있었는데, 고려 공양왕 시절 청주옥에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양촌 권근, 인재 이종학 등의 충신이 감금됐다. 이중 이색은 학문과 인품이 뛰어나 훗날 조선 성리학의 뿌리가 된 인물.
이들은 이성계와 공양왕을 모함했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고문이 있던 날 밤 갑자기 천둥번개를 동반한 큰 비가 내렸고, 감옥에 갇혀있던 죄수들과 관리, 백성들이 물에 휩쓸려 내려갔다. 이색도 물에 떠내려갔는데 은행나무 가지가 저절로 내려와 이색을 붙잡았다. 이색이 가지를 붙잡자 가지가 다시 올라가 이색과 충신들을 은행나무 위에 앉게 했고, 고문한 관리들은 물살에 떠내려갔다는 전설이다. 이를 본 청주 사람들은 ‘하늘이 무고한 죄수를 살렸음을 칭송했고, 공양왕도 하늘이 살린 자라며 그들을 풀어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앙공원은 현재 노년의 쓸쓸함을 달래는 노인들의 휴식처지만, 공원 곳곳에는 은행나무(압각수)와 같이 과거 청주읍성 관아터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여러 증거가 남아 있다

●상당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의 토성?
청주시민들이 즐겨 찾는 등산로인 상당산성은 원래 삼국시대 백제의 토성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 이들이 별로 없다.
지리적인 중요성 때문에 백제는 이곳에 토성을 쌓았고, 이후에도 조금씩 손을 보며 방어시설로 사용됐다. 임진왜란 중이던 선조 29년(1596년)에 수축됐으며, 본격적으로 현재와 같은 성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숙종 때로, 실록에는 숙종 42년(1716년)부터 3년간 개축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후기 이곳이 중요해진 이유는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충남의 해미읍성에서 이곳 청주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상당산성에는 동문, 서문, 남문 등 3개 문과 동암문, 남암문 등 2개 암문, 치성 3개소, 수구 3개소가 남아있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정비공사로 동문루와 남문루, 동문이 재건됐고 1992년 조망이 가장 뛰어난 동장대도 재건됐다.
상당산성의 규모는 큰 편이 아니라 2시간 정도면 넉넉히 돌아볼 수 있다. 치성, 암문, 장대, 포루와 같은 방어시설들을 살펴 볼 수 있어 우리나라 과거 성곽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다.
산성을 돌아 남문 앞에는 아름다운 잔디밭이 펼쳐져 있어 작은 돗자리와 간식을 준비해서 한나절 푹 쉬며 아이들과 행복한 피크닉을 즐기는 것도 좋다.
조선 초기 문인이자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상당산성의 아름다움을 일찍이 알아봤다. 단종이 폐위되고 산천을 떠돌던 그는 상당산성에 들어 그 풍경에 감탄하며 “아득히 펼쳐진 산하 의기도 드높구나. 산정마루 높이 오르니 날이 저문들 대수이랴”라는 시를 읊었다.

●화려한 청주의 역사가 녹아있는 곳
청주는 화려한 철기문화를 꽃피운 곳이며, 삼국문화의 집결지다.
고려시대 불교문화의 중심지였으며, 학문과 충절의 고향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매우 중요한 지역 중 한 곳이 바로 청주다.
이 같은 청주의 역사가 그대로 녹아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국립청주박물관’이다.
국립청주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은 국보 106호인 ‘계유명전씨아미타불석상’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불상의 모습들이 생동감 있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있어 눈길을 끈다.
청주박물관은 어린이박물관도 잘 만들어져 있어 시민들은 물론,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각종 체험 프로그램도 즐길 수 있다.
철기문화를 꽃피운 청주는 사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이 발견된 직지의 고장으로 더욱 유명하다.
직지가 발견된 흥덕사지 터에 세워진 ‘청주고인쇄박물관’은 청주의 숨어있는 명소. 세계 어느 나라보다 발달된 금속활자와 인쇄술의 역사가 이곳에 모여 있다.
‘직지’는 서양의 구텐베르크의 ‘42행성서’보다 78년이나 앞선 현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2001년 유네스코에 의하여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흥덕사에서 정교한 금속활자를 만들기 위해 땀 흘리는 장인들의 금속활자 제작과정을 실감나게 관람할 수 있으며 금속활자본을 실제로 인쇄해볼 수 있는 체험코너도 이용해 볼 수 있다. 전통문화가 낯선 아이들과 함께, 과거로 떠나는 역사여행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절터는 사라졌지만 ‘철당간’은 우뚝
성안길은 청주읍성의 성벽이 남아있는 곳. 이곳을 걷다보면 절터는 사라지고, ‘당간’ 하나가 우뚝 솟아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원래 ‘당간’이란 사찰 앞에 세워두고 깃발을 달아 사찰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행사 등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던 것이다. 당간지주는 대부분 돌로 만들어지지만, 철로 만든 ‘당간’이 남아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은 ‘당간’에 아름다운 글귀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도심 한 가운데 우뚝 솟은 ‘철당간’ 주변은 시민들의 각종 모임, 행사 장소로도 많이 이용된다. 희귀한 ‘철당간’이기에 국보 41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이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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