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 ‘왕의 남자’·‘라디오 스타’ 등 다작

 

평양성 실패 후 돌연 ‘상업영화’ 은퇴 선언

새 영화 ‘소원’ 2년간 침묵깨고 충무로 복귀

“훌륭한 시나리오를 만나게 돼서 아무런 기획이나 준비 없이 흐르는대로 몸을 맡겼습니다. 맑은 마음으로 복귀하게 된 거예요.”

한국에서 감독의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영화 ‘왕의 남자’(2005)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한국영화에 큰 족적을 남긴 이준익(54) 감독이 2011년 초 돌연 상업영화 은퇴를 선언했을 때 그 파장은 꽤 컸다. ‘평양성’의 흥행 실패 때문이었지만, ‘왕의 남자’나 ‘라디오 스타’ 같은 그의 명작들을 사랑하는 많은 팬들이 안타까워했다.

이후 2년간 침묵을 지키던 그가 올해 초 새 영화 ‘소원’의 연출을 맡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년이면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길지 않은 공백이지만, 영화계와 팬들이 느끼는 반가움은 컸다.

“‘복귀’치곤 짧잖아요. 뭐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냥 다시 하고 싶어졌어요. 하던 짓이 도둑질이라고(웃음).”

오는 10월 2일 영화 개봉을 앞두고 24일 삼청동에서 만난 이준익 감독은 겸연쩍게 웃으며 이렇게 운을 뗐다.

무엇보다 ‘소원’의 시나리오가 그를 현장으로 이끌었다고 했다. ‘소원’은 동네 아저씨로부터 끔찍한 성폭행을 당한 아이 소원이와 그 가족이 서로 보듬으며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민감하고 다루기 어려운 이야기다.

“‘평양성’ 이후 나는 ‘놈팡이’가 되겠다고 선언했죠. ‘평양성’까지 일을 너무 많이 했으니까 최대한 일을 안 하려고 노력했고 어영부영 시간을 많이 보냈는데, 이 시나리오 제안을 받았죠. 한 번에 절대 못 읽는 시나리오였어요. 소원이가 그런 일을 당하는 장면이나 병원 장면은 (마음이) 아파서 절대 볼 수가 없었어요. 쉬었다가 다시 보고 하기를 반복했죠. 그런 거부감이 있는 소재잖아요. 다 읽고 나서는 흥행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고 내용의 가치로 판단하자고 생각해봤어요. 그렇다면 이런 영화는 꼭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절대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고 그는 얘기했다.

“그런 소재로 영화를 찍으면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거 아니냐는 댓글도 많이 봤는데, 가리고 피하는 건 그동안 계속 해왔잖아요. 그런데 그래서 나아졌느냐는 거죠. 영화를 찍던 중에 페이스북에서 누군가 탈무드 구절을 올린 걸 봤는데, ‘잘 살아라, 그것이 최고의 복수다’는 말이었어요. 완전히 와 닿더군요. 가슴 아픈 상처의 피해자가 그 상처를 이겨낼 것인가, 상처에 무릎 꿇을 것인가. 잘 사는 것보다 더 큰 복수가 어딨겠어요. 이 영화는 어떻게 하면 이길까를 고민하는 영화입니다. 그동안 나온 성폭행 소재 영화들이 가해자에 대한 응징의 강도를 주장했다면, 나는 다른 걸 얘기한 거예요. 다른 문을 열자는 거예요. 소원이가 이기길 바란 거죠.”

그는 현실에 존재하는 피해자들을 생각하며 한 장면 한 장면을 신중하게 찍었다며 영화에 관한 기사를 쓸 때에도 조심해서 써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조금이라도 불손한 태도가 스며들지 않게 하려고 다짐했고 공손하고 정중하게 찍으려고 매 순간 노력했습니다. 이런 소재를 팔아먹는다는 얘길 들을까봐 현실과 관련한 이야기는 영화 밖에서 절대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어요. 영화에서 아동성폭행이란 말도 최대한 빼려고 했고요. 사실 영화 찍느라 조사를 많이 했는데, 그런 내용을 절대 입 밖에 낼 순 없습니다.”

영화를 찍는 내내 그 역시 많이 울었다고 했다.

“찍으면서 울다 울다 정말 그렇게 많이 운 적이 없어요. 올해 1월1일부터 9~10개월 동안을 이 감정을 물고 있는 거예요. 인터뷰하다가도 막 감정이 올라와요. 엄지원(소원이 엄마 역)도 울고 설경구(소원이 아빠 역)도 울고 다 그랬어요.”

하지만, 그는 영화 안에는 최대한 감정의 자극을 빼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상업영화의 무기는 자극이잖아요. 시각적 자극을 주려고 블록버스터를 만들고 돈의 한계로 그렇게 못 하면 내용의 자극, 관계의 자극을 만들죠. 특히 이런 범죄와 관련한 자극적인 포인트란 것은 처절한 응징인데, 아무리 처절하게 해도 정당화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상업영화에서 그렇게 해온 거죠. 그런데, 나는 자극이 과연 처방인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자극을 비켜서는 길을 한 번 가보면 거기에 새로운 가치관이 보이지 않을까? 한 번도 안 가봤으니 확신은 없지만, 한 번 가보자 했죠. 안 가본 길을 갈 때는 과도한 설계가 방해가 돼요. 그래서 무리한 설계 없이 느껴지는 대로 가게 됐어요. 마음 가는 대로.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 계산한 것이 없어요. 소원이(이레 분) 여덟살 짜리가 무슨 계산을 하겠어요?”

대신 연출에서 공들인 부분은 소원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코코몽’을 등장시켜 아빠와 딸 사이의 불편함을 해소시켜주는 부분이다.

“논리적, 이성적으로 보면 이 영화가 판타지적인 내러티브를 갖고 있거든요. 결정적인 건 코코몽 등장 신이예요. 그전까지 굉장히 힘들고 피하고 싶은데, 코코몽이 등장하면서부터 뭔가 달라지죠. 판타지의 시작이에요. 코코몽이 어색하거나 공감을 못 얻으면 뒤는 무너지는 거예요. 설경구가 코코몽 탈을 뒤집어쓰고 소원이와 칠판으로 대화하는 장면은 굉장히 정성스럽게 찍은 거예요. 이 ‘매직 아워’(마법의 시간)에 관객들이 들어오지 못하면 그 뒤는 가짜가 되는 거니까요. 아빠 눈도 못 마주치던 애가 코코몽 탈과 포옹할 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중간에 빼먹은 게 뭔가. 찍으면서 그런 것들이 채워지는 느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영화의 매직인 것 같아요.”

그는 특히 아역 배우인 이레(7)양의 연기를 극찬했다.

“연기학원 다니려고 접수한 애를 데려다가 시킨 건데, 이 아이를 보면서 많은 걸 느꼈습니다. 인간의 교육이란 것이 본래의 잠재력을 억제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것이죠. 아이에게 연기 지도를 안 했어요. 성폭행 장면은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거든요. 있는 대사에 상황만 주고 애가 하는 대로 봤는데, 그렇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크게 계산하지 않고 반응하면 그것이 진실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이레는 아역배우 상이 아니라 여우주연상 후보로 올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엄밀히 얘기하면 이 영화는 소원이의 이야기거든요.”

【연합뉴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