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진

안개는 바다를 떠돌다 외딴 항구로 몰려든다. 하얀 배의 연돌에서 피어오른 검은 연기가 안개와 뒤섞인다. 뱃고동이 안개의 미세한 입자 속으로 파고들며 공명을 일으킨다. 어느 순간 알로나가 탄 배를 안개가 삼켜버린다. 미쳐 버릴 것 같은 공허함이 왈칵 밀려든다. 나는 알로나를 떠올려보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모습이 또렷해지지 않는다. 알로나는 떠나면서 내 머릿속에 든 기억까지도 거둬간 것 같다. 다시 눈을 뜨니 항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안개가 걷혀 있다. 하지만 알로나가 탄 배는 항구의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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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살이 되기 전부터 외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엄마는 유복자인 나를 외할머니에게 맡겨두고 집을 나간 뒤 소식이 없었다. 내 기억에 따른다면 핏줄이라곤 외할머니가 전부였다. 외할머니는 병원에서 간병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나는 그런 외할머니에게 착한 손자는 아니었다. 머리가 커갈수록 나는 외할머니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안달을 했다. 외할머니를 대할 때마다 이유 없이 화가 났고 내 출생에 대한 회의가 밀려들었다. 군 입대는 내게 그런 기회를 주었고, 제대했을 때 외할머니는 백골이 되어 영원히 내 곁을 떠나갔다. 외할머니가 살던 집 전세보증금을 챙겨 한동안 빈둥거렸지만 얼마못가 곧 바닥이 났다. 할 수 없이 나는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스펙도 없는 내게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었다. 건설현장의 일용직이나 편의점 알바 같은 일자리밖에 없었다. 취업을 알선해 준다는 노동부 산하의 기관 여러 곳을 찾아 다녀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오래 일할 수 있는 안정적인 일자리가 필요했다. 그때 내 눈에 띈 것이 선원 모집 광고였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딱 내가 원하던 일자리였다. 임금도 다른 곳보다 훨씬 높았다. 
나는 곧바로 수산회사에 이력서를 넣었다. 회사 지정 병원의 신체검사와 간단한 면접을 거친 뒤 고깃배의 말단 선원이 되었다. 배를 탄 경험이 없는 나는 숱한 장애물에 부딪쳤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견디기 힘든 게 뱃멀미였다. 게다가 안개까지 나를 괴롭혔다. 안개가 낀 날은 뱃멀미가 더 심해졌다. 뱃멀미만으로도 힘든데 어로작업까지 해야 했으니, 내게는 어선을 타는 일 그 자체가 고통이었다.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배에서 빠르게 풀어내는 그물에 걸려 바다에 빠질 뻔하기도 했고, 명태로 가득 찬 그물을 끌어올릴 때는 도르래에 손이 딸려 들어갈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선장이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해댔다. 저런 병신새끼, 누굴 잡으려고! 
그렇다보니 나는 다른 선원들에게 귀찮기만 한 존재였다. 승선한 지 한 달이 되기도 전에 기관실로 쫓겨났다. 기관장도 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갑판원들을 통해 내 얘기를 전해들은 것 같았다. 기관장이 내게 시키는 일도 만만찮았다. 군대서 차량 정비반에 있으면서 차를 분해했다가 조립한 적은 있었지만 배는 차와는 전혀 달랐다. 배의 엔진은 덩치가 너무 커서 고장 난 곳을 찾아내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승선 경력 18년의 기관장도 쩔쩔 맬 때가 많았다. 고장 난 부위를 간신히 찾아내면 분해하는 건 더 어려웠다. 엔진을 분해하고 나면 어디서 흘러나온 건지 알 수 없는 기름이 바닥에 흥건했다. 공구며 작업복에 묻은 기름이 어느 순간 몸 전체에 번져 끈적거렸다. 고장 난 곳을 수리하고 난 뒤에도 엔진에서 스크루로 동력이 전달되는 동안 어디에서 샌지 모르는 기름이 바닥에 흘러 있었다. 낡은 엔진은 고치고 돌아서기 바쁘게 베어링이나 패킹 또는 개스킷으로부터 번갈아 기름이 새 나와서 기관실 바닥이 미끈거렸다. 기관장은 바닥에 기름이 흘러있기만 하면 내 뒤통수를 때렸다.
나는 손에 걸레를 쥐고서 수시로 엔진을 살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엔진을 들여다보다가 보이지 않는 곳은 손으로 더듬기도 했다. 기관실에서 나는 냄새는 바다와 전혀 달랐다. 흔들리는 기관실에 갇혀 있으니 숨이 막혔고 기름 냄새 때문에 멀미가 더 심했다. 종일토록 시커먼 엔진만 들여다보는 나의 앞날조차 캄캄했다. 나는 가끔씩 머리를 갑판으로 내밀어 바람을 쐬곤 했다. 어쩌다가 보이는 사할린 섬은 늘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지나치는 몇 척의 배에 걸린 일장기가 보일 때도 있었다.
러시아로부터 따 낸 어획 쿼터로 쿠릴 열도 주위의 명태를 잡는 우리 회사는 나홋카에 기지를 두고 있었다. 기지에는 고장 난 배를 고치기 위한 육상 근무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기지에 상주하고 있는 근무자는 선장이나 기관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으면 고장 난 부품과 엔진을 수리할 기술자를 미리 구해서 배가 입항하기를 기다리는 게 임무였다. 내가 소속된 회사의 육상 근무자는 현지인이었다. 그는 내가 볼 때마다 술에 취해 있었다. 육상 근무자는 배가 입항한 것도 모르고 술을 마시고 있거나 술이 덜 깨서 곯아떨어져 있기도 했다. 배를 수리 할 사람을 구하는 데도 굼떴고 제대로 된 기술자를 찾아내는 능력도 부족했다. 그 때문에 고친 부분에서 다시 기름이 새거나 소리가 심하게 나기도 했다. 기관장은 육상 근무자와 맞닥뜨릴 때마다 언성을 높였다. 나는 성실하지 못한 육상 근무자 핑계를 대며 배가 나홋카 항구에 정박했을 때 선장에게 사정했다. 선장님, 기관실의 기름 냄새 때문에 속이 뒤틀려요. 육상 근무로 바꿔 주면 안 될까요? 선장의 눈빛은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가장 뛰어난 기술자들을 구해서 빠른 시간 내에, 완벽하게, 배를 고치고 말겠다고 큰소리쳤다. 선장은 마지못한 듯 내게 말했다. 딱, 일 년만 육상 근무를 하는 조건이야! 나 때문에 육상 근무자는 곧바로 해고되었다.
편할 줄 알았던 육상 근무에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었다. 시간적 여유는 많았지만 수당이 없었고, 연고도 없는 낯선 곳에서의 외로움은 견뎌내기가 더 힘들었다. 마치 외딴섬에 버려진 것 같았다. 습기를 머금은 찬바람이 가슴을 사정없이 할퀴었다. 선장은 임시방편으로 공구 창고로 쓰고 있는 컨테이너를 숙소로 정해 주었다. 컨테이너 안에서 잠을 자려고 누우면 배의 기관실보다 더한 기름 냄새가 코로 스며들었다. 바닥에 난 구멍으로는 고양이만한 쥐들이 제 집처럼 들락거렸다. 견디다 못한 나는 나홋카 시내를 며칠 동안이나 돌아다녔다. 하지만 내가 찾는 숙소는 구하지 못했다. 언어소통도 안 되는 데다 이곳 지리에도 어두운 탓이었다. 하는 수없이 선장에게 전화를 걸어 도와달라고 말했다. 선장은 나와 함께 밥을 먹은 적이 있는 한국 식당에 가서 사정을 얘기하면 쉬까라는 할머니를 소개해 줄 거라고 했다. 나는 곧바로 한국 식당을 찾아갔다. 식당 주인은 선장이 얘기한 쉬까가 곧 여기로 오기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식당 주인은 내가 동포라는 이유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쉬까 할머니 얘기를 꺼냈다. 여기에 오기로 한 쉬까는 위안부 출신인데, 나홋카에 정착한지가 꽤 오래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이곳 실정에 대해서 훤히 꿰뚫고 있어요. 어디에 가면 방을 싸게 구할 수 있는지도 잘 알뿐 아니라 세놓은 빈방에 대한 정보도 잘 알고 있어요. 게다가 쉬까가 청소를 맡은 건물에도 빈방이 있을지도 모르고. 동포만 보면 당신의 일 인 양 도와주려는 정 많은 분이죠. 식당 주인은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쉬까 할머니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식당 주인 여자의 말을 듣고 있을 때, 머리가 희끗하고 주름투성이인 할머니가 상반신을 구부린 채 식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할머니가 바로 선장이 얘기한 쉬까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식당 주인이 나를 쉬까 할머니에게 소개했다. 쉬까 할머니는 숱한 고난을 겪은 사람치고는 고와보였다. 나는 그런 쉬까 할머니의 모습이 왠지 정겨웠다, 마치 외할머니 같은. 쉬까 할머니를 보자마자 내 입에서는 한국에서 나홋카로 오게 된 까닭이며 월급이 얼마인지조차 술술 흘러나왔다. 쉬까 할머니는 말없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쉬까 할머니가 나를 데려간 곳은 나홋카 시내에서 버스로 십 분 거리에 있는 마을이었다. 항구를 끼고 있는 외딴 마을에는 포트홀이 군데군데 패인 아스팔트길을 따라 냉동 창고와 수산회사들이 줄지어 있었다.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평지에는 펜스를 둘러쳐서 철제나 나무상자들을 쌓아 두었다. 쉬까 할머니는 나를 도로변에 있는 낡은 오층 건물로 이끌었다. 나는 쉬까 할머니를 따라 건물의 어두컴컴한 계단 끝까지 올라갔다. 건물의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여니 경량 칸막이로 만든 옥탑방 한 채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옥탑방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나는 옥탑방의 구조를 확인하기 위해 반투명 유리를 끼운 창문을 밀쳐보았다. 문틈으로는 액자 속의 젊은 여자 사진이 보였다. 지금은 내 손녀가 살고 있네. 자네가 이 방이 마음에 든다면 곧바로 비워줄 수 있어. 옥탑방은 내가 임시로 지내던 컨테이너에 비한다면 호텔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월세가 싸다는 게 무엇보다 끌렸고 옥상에서 바라보이는 전망도 좋았다. 사방이 툭 트인 것이 멀리 바다까지 한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가방에 든 접이식 망원경을 꺼내 항구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항구에 이어진 펜스의 곳곳에는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검문소에는 제복을 입고 총을 어깨에 걸친 남자가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항구의 반대편 도로변에는 오래된 호텔 몇 채와 주유소가 들어서 있었다. 주유소는 경사가 가파른 산을 깎아 지은 듯했다. 오층 건물은 낡은 호텔과 주유소 사이에 끼어있었다. 오층 건물 뒤편으로는 급경사의 언덕을 개간해 만든 밭이 보였고 그 옆에는 가축용 축사 몇 채와 짐승을 키웠음직한 농장이 잡초가 무성한 채 버려져 있었다. 나는 망원경을 접어 가방에 넣으며 쉬까 할머니에게 당장 이사 오겠다고 말했다.  
나는 쉬까 할머니를 따라 버스를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 쉬까 할머니는 나를 버스정류소에서 멀지 않은 슈퍼마켓으로 데려갔다. 슈퍼마켓에는 쇼핑을 하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쉬까 할머니는 나를 쇼핑객들이 카트를 앞세운 채 줄 지어 선 곳으로 데려간 뒤 입구 쪽 계산대를 손으로 가리켰다. 계산대에는 금발의 머리를 뒤로 묶은 채 바쁘게 움직이는 여자가 보였다. 쉬까 할머니와 내가 계산대 가까이 다가갔지만 여자는 그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여자의 희고 가는 목에는 상아 펜던트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쉬까 할머니가 여자를 향해 알로나! 하고 말했다. 여자가 힐끗 뒤를 돌아본 뒤 ‘쉬까!’ 라며 반가운 목소리로 불렀다. 쉬까는 알로나가 어릴 때부터 할머니를 부를 때 썼던 말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곧이어 알로나는 나를 쳐다보고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쁘리비옛, 하고 말했다. 
알로나는 옥탑방 창문 틈으로 봤던 액자 속 얼굴과 똑같았다. 나는 알로나가 쉬까의 손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알로나와 쉬까는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러시아 말을 주고받으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한참 동안 알로나와 실랑이를 하던 쉬까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 곧바로 짐을 옮기도록 해. 나는 쉬까의 말을 들은 뒤 괜스레 마음이 설ㅤㄹㅔㅆ다. 싼 값으로 지낼 방을 구한 데다 이런 미인을 가까이서 늘 볼 수 있다니. 나는 육상 근무를 하게 된 게 다행스러웠고, 쉬까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쉬까는 알로나가 내 민 열쇠를 나에게 건넸다.
나는 숙소가 해결되자 곧바로 쉬까와 함께 가재도구를 장만하기 위해 더 큰 슈퍼마켓에 갔다.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씩 쇼핑 카트에 담았다. 조립식옷장, 쓰레기통, 수저, 밥공기 등. 내가 카트를 앞세우고 진열대의 모서리를 돌고 있을 때였다. 뒤따라오던 쉬까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나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쉬까는 현기증이 나는 듯 무릎을 짚고 오른손은 이마에 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카트를 세워두고 쉬까가 쓰러지지 않게 부축했다. 쉬까의 이마에는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병원에 가봐야 되지 않느냐고 하자 쉬까는 가끔 이런다며 별일 아니라고 손을 저었다. 쇼핑객들은 메가폰을 들고 소리를 질러대는 남자를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카트를 끌고 쉬까와 함께 인파 속을 헤쳐 나왔다.
나는 알로나가 쓰던 가구를 일층의 쉬까 방으로 옮겼다. 냉장고와 식탁, 침대는  내가 쓰기로 했으니 옮겨야 할 가구라고 해야 천으로 만든 옷장과 칠이 벗겨진 서랍장이 전부였다. 가구를 들어낸 자리는 먼지가 더께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빗자루와 걸레로 방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남자 양말이며 면도기, 콘돔, 하얀 알약 등이 옥탑방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깨끗해진 방에 슈퍼마켓에서 사 온 가재도구를 들여놓았다.
쉬까가 오층 건물 청소를 맡은 지는 꽤 된 것 같았다. 건물 주인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살고 있다고 했다. 쉬까에게 건물 관리까지 맡기는 바람에 나홋카 시내에서 살다가 여기로 이사를 했다고 했다. 알로나는 시내에 혼자 살겠다고 버텼다네. 할 수없이 옥탑방을 따로 얻어 주는 조건으로 이곳에 데려왔지. 그런데 알로나는 수시로 남자를 옥탑방으로 끌어들였지 뭐야. 그걸 보다 못해 방을 내 놓기로 한 거야. 쉬까가 살고 있는 단칸방은 오층 건물의 일층 한 귀퉁이에 있었다. 창고를 단칸방으로 개조해서 사용하고 있는 탓에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싱크대가 막히거나 문고리가 고장이 나서 수시로 손을 봐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컨테이너에서 전문가용 공구를 가져와서 고쳐주었다. 그런 나를 쉬까는 마치 친손자를 대하듯 했다. 배가 항구에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고 나갔다 돌아오면 된장찌개를 끓여 놓기도 했고 잘 삭힌 김치를 곁들인 밥을 지어놓기도 했다.
알로나와 쉬까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파파라고 불렀다. 러시아에서는 집안의 가장을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쉬까가 나를 파파라 부를 때는 짙은 안개 속에 갇힌 사람의 애절한 목소리 같았다. 파파라는 말은 쉬까의 입에 오랫동안 길들여진 듯했다. 나는 쉬까의 스스럼없는 입모양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숱한 파파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바다에 낀 안개에 가려져 실체를 알 수 없는 파파들이 오층 건물의 스산한 음영 속에 숨었다가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화장품을 사서 단칸방의 화장대 위에 올려다 놓고 온 날이었다. 청소를 끝내고 올라온 쉬까가 옥탑방 문을 빠끔히 열며 말했다. 파파가 내 화장품을 사다 놓은 거야? 고맙긴 하지만 쪼글쪼글한 얼굴에 발라 봐야 헛일 인 걸. 쉬까는 생각지도 않았던 나의 선물에 감동한 듯 들떠 있었다. 쉬까는 몸을 돌려 옥상 난간 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냉장고에서 주스 캔 두 개를 꺼내들었다. 쉬까는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 눈빛이 깊어져 있었다. 나는 의자를 쉬까 옆에 끌어다 놓으며 캔을 따서 건넸다. 쉬까는 캔을 받아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바다만 건너면 고국 땅이 보일 테지? 쉬까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쉬까에게 묻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조심스러웠다. 괜히 아문 상처를 들쑤시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쉬까는 바다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나는 사할린에 징용으로 끌려온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지.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일본 순사들이 갑자기 우리 집에 들이 닥쳤어. 군수물자를 만드는 공장에 일손이 부족하니 나를 데려가야겠다고 말야. 일본인들의 거짓말에 숱하게 속아왔던 엄마는 절대로 못 데려간다고 내 앞을 막아섰지. 엄마가 일본순사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려도 보았지만 칼을 빼들고 위협하는 그들에게 맞설 수는 없었어. 쉬까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것조차 힘겨운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잠시 후 쉬까는 그만 내려가서 쉬어야겠다며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쉬까가 내려가고 나서도 한동안 옥상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쉬까의 지난한 삶을 다 알 수 없었지만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었다. 그 생각 끝에 사진으로만 봤던 엄마 생각이 났다. 저 바다만 건너면 고국이었다. 그렇지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내가 텔레비전의 저녁 뉴스를 보고 있을 때였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하이힐이 내는 소리는 톤이 높으면서도 여렸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방문을 열었다. 알로나가 계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알로나는 시선을 항구 쪽으로 향한 채 난간에 다가섰다. 알로나의 손에는 보드카가 들려 있었다. 알로나는 안개로 뒤덮인 항구를 내려다보며 병째 들고 마셨다. 곧이어 흐느끼듯 노래를 불렀다. 알로나에게 필시 무슨 말 못할 곡절이 있는 것 같았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지만 무슨 말인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귀는 온통 알로나에게 쏠려 있었다. 뉴스가 끝날 즈음이었다. 알로나가 보드카 병을 좌우로 일렁이며 옥탑방 문을 열었다. 나는 얼른 일어나 떨어질 듯 쥐어진 보드카 병을 받아 들었다. 술병은 절반이 넘게 비어 있었다. 알로나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평소보다 더 애틋한 목소리로 파파라고 불렀다. 나는 휘청거리는 알로나를 두 손으로 부축했다. 알로나의 맨살에서 안개가 훑고 간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알로나에게 파파라 불린다는 것부터가 싫었다. 내게 강제로 입을 맞댈 때의 보드카 냄새는 역겨웠다. 나는 알로나에게 취하지 않았을 때, 라고 말했지만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몸을 더듬는 움직임이 더 집요했다.
내가 눈을 뜨니 방안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내 팔에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금발의 알로나가 알몸인 채 곯아 떨어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일어나 동쪽으로 난 창문을 연 뒤 항구를 내려다보았다. 항구에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붉거나 검은 칠을 한 배에서 고기 상자나 철제를 크레인으로 내리거나 싣고 있었다. 배에서 내려진 물건들은 보세구역에서 며칠을 보낸 뒤 화물차의 적재함에 실려 어딘가로 옮겨질 참이었다. 외딴 항구를 끼고 있는 도로에는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생필품이 들었을 비닐봉지를 들고 가는 남자들이 보였다.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배의 마스트마다 제각각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나는 항구로부터 재빨리 눈길을 거둬들인 뒤 알로나를 흔들어 깨웠다. 잠결에도 알로나는 파파라고 흥얼거리며 나에게 매달렸다. 눈을 뜨지도 않은 채 머리를 내 가슴에 묻고 클레멘타인을 허밍으로 불렀다. 알로나에게서는 아직도 술 냄새가 풍겼다. 내 안에서는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질투심이 용암처럼 들끓었다.
나는 냉장고의 찬물을 컵에 따라 알로나에게 쥐어주었다. 찬물을 단숨에 마신 알로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동쪽으로 난 창문을 열고 먼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알로나는 창틀에 상체를 걸치고 엉덩이를 뒤로 뺀 자세였다. 나는 알로나의 뒷모습을 본 순간 알 수 없는 욕정이 솟구쳤다. 눈에서 열기가 치솟으며 시야가 흐려졌다. 나는 알로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두 손을 알로나에게 뻗은 뒤 겨드랑이를 지나쳐 봉긋한 가슴으로 옮겨갔다. 가슴을 만지던 손은 서서히 아래로 향했지만 알로나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몸은 쉽게 열렸지만 마음은 어느 먼 곳을 떠도는 것만 같았다. 그 때문에 나는 알로나를 더 거칠게 끌어안았다. 그런 행위가 끝나고 나자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 같은 것이 밀려들었다.
나는 어선이 쿠릴 열도를 돌아 항구로 돌아온다는 연락이 오면 바빠졌다. 배들은 언제나 밀물처럼 한꺼번에 몰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나는 어선이 항구에 정박하기 바쁘게 러시아 기술자들과 배를 고쳤다. 숨을 돌리는 사이에는 브리지로 올라가서 망원경으로 옥탑방을 살폈다. 브리지에서 바라보는 오층 건물은 알로나의 정착하지 못하는 마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온갖 험한 일을 다 겪어온 쉬까도 알로나만은 어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망원경을 오층 건물의 흔들림에 맞추려고 몸을 이리저리 기울여 보았다. 그럴 때마다 언뜻 스쳐가는 금발의 머리는 내 몸과 엇박자로 흔들렸다.
나는 낡은 배를 고친다고 러시아 기술자들과 밤을 꼬박 샜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새벽에 본 일층의 단칸방은 불이 꺼진 채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언제부턴가 나의 하루는 알로나가 흥얼거리는 노래를 듣는 걸로 시작했다. 알로나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자 건물 전체가 텅 빈 것 같았다. 몸은 피곤했지만 알지 못할 적막감 때문에 잠이 쉬 올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동쪽 창문을 열고 항구를 바라보았다. 짙은 안개 때문에 처음 배를 탔을 때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동쪽 창문을 닫고 산으로 난 서쪽 창문을 열었다. 경사가 심한 밭에서는 머리에 수건을 말아 쓴 여자가 호미질을 하고 있었다. 여자가 호미로 땅을 한 번 내리찍었다가 끌어 올릴 때마다 감자 줄기가 따라 나왔다. 줄기 끝에는 새끼 감자가 달려 있었다. 여자는 손으로 감자 줄기에서 새끼 감자를 훑어냈다. 어디선가 클레멘타인 노래가 들려왔다. 노래가 들린 곳은 텅 빈 목장 쪽이었다. 
나는 자려던 생각을 접고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노랫소리는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았다. 나는 가게에서 몇 가지 반찬과 음료수를 사 오다가 쉬까를 만났다. 쉬까는 오층 건물 계단의 유리를 닦는 중이었다. 나는 쉬까에게 잠깐 쉬었다 하라며 손을 잡아끌었다. 낡은 의자를 끌고 와서 쉬까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나는 의자에 앉은 쉬까의 목과 어깨, 팔꿈치까지 주물렀다. 쉬까는 싫지 않은 듯 눈을 곱게 홀기며 말했다. 파파가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이러는 거지?
내 일생에서는 그나마 이 곳 농장에서 일할 때가 가장 행복했어. 선주였던 그 남자가 돈을 많이 벌어서 일군 농장이었지. 농장의 사슴이 이백 마리로 불어났어. 그 무렵 어디선가 아내라는 여자가 나타나서 남자의 멱살을 잡고 데려가 버렸어. 그때 나는 만삭의 몸이었다네. 간신히 몸을 움직여야 했던 내가 사슴을 돌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 결국 키우던 사슴들은 울타리를 뛰어 넘어 달아나거나 남은 놈들은 모두 죽어 버렸지 뭐야. 그 때 뱃속에 있던 아기가 바로 알로나의 애비야. 홀몸으로 낳아 기른 아들은 장성한 뒤 러시아 여자와 결혼을 했지. 무용수였던 여자는 알로나를 낳고는 집을 나가 버렸어. 아들도 제 마누라 찾겠다고 어디론가 떠나버렸어, 알로나를 내게 맡겨놓고 말야. 알로나가 세 살 때였으니까 소식이 끊긴 지 20년이 넘었다네. 나는 알로나의 애비가 언제 돌아올지 몰라 이곳을 떠나지도 못해. 그런데 알로나 마저 놈들에게 몹쓸 짓을 당하고 저 꼴이 되었으니, 내가 살아있어도 산목숨이 아니야. 쉬까의 손때가 묻은 목장의 철제 펜스는 녹이 슬어 쓰러질 것 같았다. 목초들은 웃자라 누렇게 변해 있었다. 그 남자, 참 자상했었지. 만신창이가 되어 안개 속으로 숨어든 나를 따뜻하게 보듬어 준 사람은 그 남자뿐이었어. 결국 다들 내 곁을 떠났지만 말야, 남자도 아들도 며느리도. 쉬까는 씁쓸한 표정으로 잡초가 우거진 농장을 바라보았다.
이튿날 저녁이었다. 아래층에서 알로나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나는 책을 펼쳐들고 있었지만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곧이어 계단을 통해 불규칙한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나는 책을 던지고 일어나 방문을 열어젖혔다. 금발을 좌우로 흔들며 계단에 모습을 드러낸 알로나는 눈부셨다. 무늬가 화려한 홈드레스의 비즈가 옥탑방 불빛에 반사되어 얼굴에 무늬를 만들었다. 손에는 금박을 입힌 보드카 병이 들려 있었다. 알로나는 고개를 왼쪽으로 약간 기울인 채 어깨를 으슥하며 웃었다. 나는 냉장고를 열고 소시지 두 개를 꺼내 가스레인지에 구웠다. 딱딱하던 소시지는 껍질이 팽팽해지며 속이 물러졌다. 내가 칼을 대는 순간 소시지는 쪼그라들었다. 소시지를 도마 위에 얹고 가능한 한 잘게 잘랐다. 나는 소시지를 접시에 담은 뒤 냉장고에서 꺼낸 케첩을 접시 가장자리에 짜 두었다.
알로나는 옥탑방의 창문을 연 뒤 한 동안 항구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힐끗 쳐다 본 알로나의 얼굴은 안개가 훑고 간 것처럼 젖어 있었다. 한참 만에 몸을 돌리는 알로나는 비틀거렸다. 나는 알로나의 팔을 끼고 식탁으로 이끌었다. 의자에 앉은 알로나의 눈썹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나는 서쪽 창문을 열어젖힌 뒤 동쪽 창문을 닫았다. 숲을 거쳐 온 바람이 옥탑방으로 밀려들었다. 알로나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나는 알로나를 의자 등받이에 기대게 한 채 싱크대 속의 크리스털 잔 두 개를 찾아와서 술을 따랐다. 알로나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홈드레스 주머니를 뒤져 사진을 꺼냈다. 알로나는 사진을 가슴에 얹고 두 손으로 포갰다. 알로나는 잔주름이 진 흑백 사진을 내 얼굴에 갖다 댔다. 사진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파파! 하고 불렀다. 사진 속의 남자는 나와 닮아보였다. 나는 남자와 닮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언짢았다. 나는 내 것이 아닌 술잔으로, 내 것이 될 수 없는 여자를 앞에 앉힌 채, 머잖아 밀려들 어떤 적막을 떠올리며 술을 마셨다. 알로나는 술을 마셔서 그런지 기분이 들떠 있었다. 취한 나를 의자에서 떠밀어 바닥에 눕혔다. 나는 거부할 수 없는 완력 때문에 방바닥에 쓰러졌다. 알로나는 내 옷을 완강한 힘으로 벗겼다. 우악스런 알로나의 손에 내 팬티마저 벗겨졌다.
동쪽 창에서 옥탑방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눈을 찡그리며 방을 둘러보았다. 전날의 기억하기 싫은 흔적들이 먼지와 함께 떠돌고 있었다. 알로나가 누웠던 자리에는 상아빛 펜던트가 떨어져 있었다. 펜던트는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을 받아 눈부셨다. 펜던트의 모양은 박물관에서 봤던 곡옥과 비슷했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어선이 오늘 입항한다는 전화를 받은 게 생각났다. 서둘러 옷을 입고 옥탑방을 나섰다. 계단 아래쪽에서는 쉬까가 올라오고 있었다. 쉬까는 지나가는 소리로 말했다. 걔에게 아무리 공을 들여 봐야 헛일일 거야. 애비 정에 굶주려서 그런 건지, 사내만 보면 쉽게 정을 주는 년이야. 지 애비가 떠나고 어린 것이 며칠 동안 밥조차 안 먹고 아빠를 찾으며 울어대더니. 세상의 사내가 다 지 애비로 보이는 건지 원. 그러니까 놈들이 쉽게 보고 돌아가면서 걔한테 몹쓸 짓을 한 거지. 제 욕구를 채우고 나면 씹던 껌처럼 버려지는 걸 왜 몰라. 나는 쉬까가 한 말을 곱씹으며 항구를 향해 걸어갔다. 정박한 배의 깃발이 펄럭이는 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
배를 고치느라 꼬박 이틀을 뜬 눈으로 밤을 샜다. 러시아 기술자들과 고장 난 엔진을 고치고 난 내 몸은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나는 온 몸에 기름이 묻은 채로 항구를 낀 도로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차들이 뜸한 도로는 어두워서 기름투성이인 몸을 가려 주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늑대 울음 같았다. 걸음을 재촉했는데도 집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땀으로 젖었다가 말랐던 옷이 다시 무거워졌다. 정박한 배들이 밝힌 불빛에 옥탑방이 저만치 눈에 들어왔다. 일층 단칸방의 창에 비친 불빛은 희미했다. 늘 닫혀있던 단칸방의 창문이 열려있었다. 나는 갑작스레 긴장감이 몰려들었다. 오층 건물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도로변의 주유소는 벌써 불이 꺼져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가게도 깜깜했다. 오층 건물 입구의 작은 백열등이 바람에 흔들리며 안개 낀 도로를 밝히고 있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어두컴컴한 오층 건물의 현관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바람에 쓸려온 쓰레기들이 현관 구석에 몰려 있었다. 쉬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오층 건물을 청소하곤 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종잡을 수 없는 일로 머리털이 곤두섰다. 
내가 단칸방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쉬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을 쓰는 소리와 통곡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왈칵 방문을 열었다. 쉬까가 알로나를 무릎에 엎은 채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알로나의 얼굴 근처에는 토사물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쉬까 옆에는 무청이 떠 있는 양은 대야의 뿌연 물이 보였다. 쉬까 얼굴의 깊게 팬 주름마다 물기가 흥건했다. 알로나가 약을 먹은 것 같았다. 병원에 데려 가죠! 놔 둬. 죽진 않을 테니까. 전에도 종종 이랬어. 저년 때문에 내가 맘대로 죽지도 못한다니까. 쉬까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쉬까는 바지 속에 든 윗옷을 들춘 뒤 담배를 꺼냈다. 쉬까의 허리가 훤히 드러났다. 배의 주름진 살갗에는 대각선의 깊게 팬 흉터가 보였다. 쉬까가 담배 한 개비를 빼서 인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뒤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인 쉬까는 한참 만에 한숨처럼 토해내길 되풀이했다. 쉬까는 양은 대야의 물에 담배꽁초를 던져 넣은 뒤 일어나 바지의 담뱃재를 털었다. 쉬까는 알로나의 약을 사러 가야겠다며 문을 열고 나섰다.
  자정 무렵 한국의 수산회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선장이 일방적으로 말했던 것과 달리 나의 고용 계약을 연장한다는 통보였다. 베링 해협의 어획 쿼터를 더 따냈으니 어선을 고치기 위해서는 지상 근무자가 꼭 있어야한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난 나는 기쁘기는커녕 허탈했다. 나는 계단을 거쳐 일층 단칸방으로 내려갔다. 알로나는 다행히 깊이 잠이 든 것 같았고 쉬까는 손녀를 지켜보며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옥탑방으로 올라온 나는 찬장에 얹혔던 보드카를 병째 마셨다. 나는 곧바로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비몽사몽간에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


나는 망원경으로 항구를 바라본다. 항구에 정박한 하얀 배 한 척이 눈에 들어온다. 빨간 여행 가방을 든 알로나가 배를 타기 위해 갱웨이를 오르고 있다. 알로나가 갑판에 오르자마자 배 위의 누군가가 갱웨이를 천천히 끌어올린다. 뱃고동이 길게 울린다. 그러는 사이 안개가 몰려온다. 순식간에 배는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나는 안개가 걷히기를 초조하게 기다린다. 안개가 서서히 걷혀가고. 그런데 배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미친 듯이 망원경을 들고 바다를 헤집는다. 항구에서 멀어진 안개가 먼 바다의 수평선을 지우고 있을 뿐, 배는 어디에도 없다. 나는 항구의 운항통제소에 전화를 걸어 하얀 배의 도착지가 어디인지 묻는다. 직원은 느리고 또박또박한 러시아 말로 하얀 배는 항구에 입항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 소설 당선소감 / 김득진

● 1958년 부산 출생
● 부산대 졸업
●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 회원  
● 시집 ‘커피를 훔친 시’


 안개 속 살았던 삶…글 쓰라는 운명같아

저는 오랜 시간 동안 안개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짙은 안개는 늘 제 앞길을 가로막았기에 빠른 길을 두고서도 먼 길을 돌아가야했습니다. 청주의 엘지화학에 근무할 무렵에도 저는 눈앞의 안개 때문에 멀리 내다보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막막함을 느꼈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 급급했던 탓이겠지요. 공단을 걸어서 퇴근하면서 빵 냄새와 가죽 가공하는 냄새를 맡았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안개 속에는 냄새가 풀풀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뭔가를 쥐어야겠다는 욕망이 허기처럼 밀려들었습니다. 코로 들이킨 감각이 손끝에 전해지는 시간은 길었나봅니다. 제 생각으로는 안개가 운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름길을 놔두고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도록 한 것은 많은 경험을 한 뒤에 글을 쓰라는 운명이었나 봅니다.
한때는 안개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한숨을 숱하게 쉬기도 했습니다만, 지나고 보니 겪어왔던 지난한 삶이 제겐 글의 탄탄한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글의 안온한 세계로 발을 들인 지금은 그토록 원망스러웠던 안개를 벗삼아 글을 씁니다. 이번에 동양일보에서 제게 선뜻 손을 내밀어주신 건 안개를 호령할 큰 힘을 불어 넣어 주신 거라 생각합니다. 안개의 장막을 헤치고 밝은 세상으로 나서는 발걸음이 날아갈 듯합니다. 부족하고 거친 글을 뽑아 제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의 모자람은 노력으로 메우겠습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제게 문학적 소양을 불어넣어주셨던 선생님들 모두가 훌륭하셨습니다. 귀한 가르침이 바탕이 되어 감격스런 상을 받게 된 게 모두 선생님들 덕분입니다. 그 중에서도 저의 정신적 지주이셨던 최해군 선생님께 특히 감사드립니다. 오랜 시간 저를 묵묵히 지켜보며 뒷바라지 해 준 가족 모두에게 사랑을 전합니다. 신공회원들, 이끌림과 축정 멤버들, 동문들이며 친구들, 뒤늦게 열정에 불을 붙여준 대적 멤버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홋카의 안개>가 태어날 수 있게 모티프를 안겨준 고마운 한 사람도 영원히 가슴에 품으려합니다.



소설 부문 심사평


당선작, 이국땅에 버려진 민족의 씨앗, 그 허기진 삶 

총 응모작이 35편. 대부분이 응집력 상실로 인한 인간관계의 단절과 소외, 방황 등을 주제로 택한 것들이었다. 이색소재를 다룬 몇 편을 제외 하면 매년 반복되는 경향이다. 몇 번을 거른 끝에 남은 작품이 5편. 문장이나 구성이 원만하고 소재의 소화나 주제접근 등 비교적 단편으로서의 골격을 갖춘 작품들이다. 
적자의 길(서울:신승민)은 농민봉기를 소재로 한 역사물이다. 당시의 사회모순에 대한 준엄한 고발장을 쓰듯, 거침없고 자신감 넘치는 문장은 전혀 신인답지 않은 원숙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사건 구성이나 인물의 성격이 상식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흠결이, 달변가로부터, 이미 들은 얘기를 다시 듣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터닝 포인트(고양시:김유현)는 심신의 정착지를 잃고 방황하던 이혼녀가 미국 이민을 앞두고 마음속의 갈등을 정리해 가는 과정을 차분하게 그려냈다. 삶의 전환점에 서게 된 상황을, 눈길에서의 방황과 과거를 대비시키며 재치 있게 풀어냈으나, 고단한 현실을 피해 의탁할 곳을 찾아간다는 평범한 사연 외에 독자에게 전해지는 감동요소가 없다. 
어떤 사람 A(서울:홍지혜)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자신을 과대포장하며 살아가는 한 연주가의 가식적인 삶에 대한 허상이 소재다. 인터넷의 익명성이나 가면성을 이용한 심리적 허영을 폭로한, 일종의 고발성(?)을 담고 있다. 음악에 대한 풍부한 상식이 작품에 윤기를 내는 역할을 하고 있으나, 주인공이 우상으로 여기던 ‘히로’의 연주를 들은 후 느낀 실망감처럼, 소설의 결말 처리도 그런 상식선을 넘지 못한 감이 있다. 복수로 응모한 다른 작품도 비슷한 수준을 유지, 작가로 성장할 가능성은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울:김영만)는 남녀 간 만남과 사랑이 옷깃에 스치는 바람같이 가벼운 젊은 세대의 방황을 그렸다. 빨간등대(오세요)와 하얀등대(가세요)는 포구를 드나드는 배처럼 안주하지 못하는 남녀 간의 사랑을 암시하는 듯한, 재치 있는 설정이다. 견고하지 못한 아픈 사랑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두 남녀의 공허감을 일관성 있는 분위기와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문장으로 차분히 녹여 내었다. 내려놓기 아쉬운 작품이었으나, 소재 자체가 너무 흔한 것이어서 신인으로서의 참신성이 다소 미흡하므로 훗날을 기대해 보기로 했다. 기대가 어긋나지 않을 만큼 좋은 작품을 쓰리라 믿어지는 솜씨다.    
나홋카의 안개(부산:김득진)는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먼 이국땅, 러시아에 버려진 한국인 후예의 안개 속처럼 어둡고 습기 찬 삶이 소재다. 작자는 샤샤의 고단한 삶과 혈육의 허기에 방황하는 알로나의 일탈된 행적을 통해, 버려진 땅에서 외롭게 싹을 틔운 우리의 핏줄이 겪는 고통과 함께, 아픈 역사의 후유증을 일깨워주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의도하는 바를 충분히 전달 할 만큼 침착한 서술은, 평면적인 구성의 단점을 보완하고 있으나 문장은 다소 건조한 느낌이다. 화자(話者)가 망원경을 통해 바라 본 환상의 배와 그 배에 오르는 알로나의 모습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알로나의 절실한 갈망이 화자에게까지 전이되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으로, 깊이 묻어 놓은 주제의 암시와 함께 여운을 남기는 결말이다. 건조한 문장임에도 어법에 어긋남이 없고, 소재를 탐색하고 소화하는 솜씨가 작가로서의 역량을 갖췄다고 믿어짐으로, 이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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