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규 (충북교육과학연구원 원장)

  ‘한 명의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매달려야한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그만큼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아이를 직접 기르는 부모들의 정성만으로는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시킬 수 없는 것이며 교육자가 필요하고 또, 모든 사회가 정성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교육이란 자라나는 학생들이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꿈을 그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이기에 어느 누구도 학생들의 꿈을 담보해서는 안 되며 개인과 집단의 이해나 이념이 전제되어서도 안 된다. 일 년 농사를 짓는 농부가 농사를 망쳤다면 다음 해에 자신의 손해 본 부분을 복구할 수 있지만 망쳐진 그 농작물은 영원히 제 구실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교육의 질은 일관성을 유지하며 항상 발전을 전제해야 하고 교육환경 역시 최상을 목표로 지속적으로 개선해야 하는 것이다. 왜 교육을 백년지대계라고 하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보통교육의 수장(首長)인 교육감은 정당인이 아니다. 따라서 교육감을 지원하고 대변해주는 어떠한 장치도 없다. 때로는 질책하고 때로는 동조하는 집단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의해서 움직일 뿐이다. 교육의원이 있기는 하지만 일몰제에 의해 폐지될 것이고 그들만으로 교육계를 대변하기는 역부족이다. 그렇지만 의회는 정당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때로는 의원 개인의 의사에 따라 움직이지만 당(黨)의 방침이 개입한다면 또는 같은 당 의원의 입김이 작용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속한 당론을 따라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약 의회에서 교육계를 교육 그 자체로 보아주지 않는다면 교육계는 설 자리가 없다. 항변할 어떠한 도구도 없는 것이다. 전에 도의원을 지냈던 지인의 말이 생각난다. ‘가장 만만한 곳이 교육청이다’라는 말이..... 교육계의 현안들을 당원이나 특정 집단의 입장이 아닌 교육 그 자체에서 바라보는 풍토가 자리 잡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가정에서 가장 큰 농사는 자식농사라고 했다. 그 자식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부모들은 자식들을 학교에 보낸다. 학교에서 자신의 자식들을 잘 키워주기를 바라며 최소한 사회에 나가서는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원한다. 또한 아이들은 자신만의 도화지에 자신의 인생을 그려나간다. 그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자신이 만족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위의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그림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이것이 교육이 순수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나무를 그릴까 아니면 호수를 그릴까 하는 아이에게 집을 그리라고 강요해서도 안 되고, 노란색을 칠할까 아니면 파란색을 칠할까 하는 아이에게 특정한 색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단지 그들만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길러주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자신들의 이념을 주입시키기 위해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꼬드기고 있다. 마치 천상의 마법이라도 되는 양 허울 좋은 단어들을 나열하고 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현실적 어려움을 틈타 자신들의 이념을 주입하겠다는 속셈이 있을 뿐이고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겠다는 욕심이 있을 뿐이다. 교육은 당장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수없이 다가올 어려움을 극복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어야 한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