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부 부국장

6월이면 우리는 여섯 번째 지방선거(지방의원은 일곱 번째)를 치른다.
지방자치가 부활된 지 어느새 20년이 훌쩍 넘어버렸음에도, 많은 주민은 지방자치가 낯설기만 하다.
단체장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지방의원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더더욱 많다.
지방자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막연한 원론 수준의 이해가 고작이다.
20년이 넘게 살아온 집 주소도 모르고, 집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 채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다. 20년째 함께 살아온 동거인이 누구인지도, 이름조차도 모르는 셈이다.
그래서 현재 우리의 지방자치는 ‘무명無名의 지방자치’다.
지방자치의 핵심을 꼽으라면 ‘상대적 자율성’과 ‘주민참여’로 귀결된다.
과연 우리의 지방자치가 그러한가. 단언컨대 그렇지 못하다.
일선 자치단체가 자율적 권한과 책임을 갖고 상대적 자율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주민의 참여와 관심을 통해 행정의 향배가 결정되고, 집행된다고도 할 수 없다.
중앙정부와 중앙정치의 ‘내정간섭’과 ‘묵시적 지배’에 의해 유지되는 상징적 존재일 뿐이다.
흔히들 지방자치를 ‘20% 자치’, ‘3할 자치’라고들 한다.
지방자치단체의 사무 결정 권한은 전체의 30%에 불과하다. 나머지 70%는 중앙정부가 갖고 있다. 재정 현황은 정부가 80%를 장악하는 반면 지방이 20%에 그치기 때문이다.
정부가 일선 자치단체와 아무런 사전협의도 없이 정책을 만들고 시행하면 그대로 따라야 한다. 재정 상태가 어떻든 시책 추진에 따른 일정 부담을 져야 한다. 사실상 강제적으로.
하지만, 지역 특성에 맞는 독립적?자율적 시책을 추진하기 위해 국비를 얻어쓰려면 관련 제도와 법률, 행정 여건 등 여러 이유 때문에 녹록지 않다.
자칫하면 선심성?전시성 시책이라며 중앙정부의 제재와 감사를 받기 일쑤다.
지방자치를 이끄는 단체장과 지방의원은 또 어떠한가.
정당공천제라는 ‘정치적 노예계약’에 의해 강요되고 조종되는 ‘정당 자치’로 변질돼 있다.
지역 이익을 추구하고, 지역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지역의 현안들을 해결하기 위해 현실적?선진적 정책을 개발해야 할 자치단체와 지방의회는 정치논리에 함몰돼 스스로 지방자치를 중앙정치권에 헌납하고 있다.
자신의 ‘생사면탈권’을 쥐고 있는 것은 지역주민(유권자)이 아니라, 소속 정당이라는 그릇된 인식과 판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주민참여 또한 선언적 의미에 불과하다.
1991년 지방의회 부활 당시 투표율은 60%에도 미치지 못했고, 1995년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 동시 선거 투표율도 마찬가지다.
1998년에는 52.6%로 떨어진 데 이어 2002년에는 48.9%로 유권자의 절반도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2006년 51.6%, 2010년 54.4%로 조금 높아졌지만, 여전히 절반 수준에 머물고 있다.
투표조차 이렇게 저조한 마당이니, 지방자치 과정에서 주민참여가 제대로 이뤄지지도, 참여하지도 않는다.
그저 목소리를 내는 건, 대표성도 객관성도 없는 몇몇 사회단체 관계자들이나 정치적 야심을 지닌 지역유지들, 무슨 위원장이니 하는 감투를 헌신과 봉사의 상징이 아닌 권위와 권력으로 착각하는 토착세력이 고작이다.
최근 서울시 성북구 주민 206명의 주민감사 청구에 따라, 성북구의회 의원들의 외유성 해외출장 경비 1400만원을 환수하라는 결정이 나왔다.
이것이 주민참여를 근간으로 하는 지방자치의 단면이다. 자치단체든 지방의회든 주민의 권한을 위임한 만큼 그들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주민이다.
언제까지 이름도 모르는 무명의 지방자치를 방관하고 묵인할 것인가.
성년이 되도록 이름도 없는 지방자치에 이름도 달아주고, 중앙정부와 정치권이란 ‘강제적 후견인’의 품을 벗어나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이제는 지역주민이 나서야 할 때다.
그럴 책임의식도, 참여의식도 없다면 지방자치 존립을 요구할 권리도 버려야 한다.
지방자치 무용론의 근본적 책임은 이름도 모르면서 그들을 단체장이나 지방의원으로 택한 수많은 유권자들에게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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