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륜 연대학(나이테 이용 연대측정법) 국내 최고 권위자 고 박원규 교수를 추모하며

이  융  조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

연륜연대학(나이테를 이용한 연대 측정법) 분야 국내 최고 권위자인 박원규 충북대 교수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새 50여일이 지났다.
그는 미국 애리조나대에서 연륜연대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90년대 초 충북대 임산공학과에 조교수로 초빙돼 오며 연륜연대학을 대한민국에 처음 도입한 인물.
오로지 나이테 연대 측정법 연구에 천착해 지난 20여년간 국내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쌓아온 그는 6년 전 국내 유일의 목재연륜소재은행을 설립하며 문화재학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최근까지 숭례문 복원공사에 쓰인 금강송의 진위 여부를 검증하는 작업에 매진하다 검증 결과가 막바지에이를 무렵 많은 의혹을 남긴 채 지난 1월 18일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지난 7일은 그가  불상을 조사했던 전북 완주 대원사(주지 석문스님)에서 49재가 있었던 날이다.
때를 같이해 충북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이융조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의 추모글을 싣는다.
박원규<편집자>


생전의 박원규 교수 교수와의 만남은 너무나 필연적이었던 것으로 지금도 생각된다. 충북대학교 임학과 교수로 오래동안 근무하여 온 민두식 교수께서 1988년 임산공학과라는 새로운 학과를 만들었다. 새 학과에 걸맞는 훌륭한 인재를 영입한다는 차원에서 1990년 8월, 미국에서 학위를 마친 박 교수를 초빙하게 되었으며, 학교에 부임한 박 교수를 직접 본인의 연구실로 안내하여 만난 것이 첫 대면이었다.
민교수와는 청원 두루봉 동굴(2굴)에서 출토된 20만년 전의 숯을 분석한 오리나무의 나이테를 분석하여 성장비교를 통한 연구결과를 함께 발표하여, 당시 우리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던 뒤였고, 그와 유사한 전공의 교수들과 공동연구를 한다는 것이 매우 바람직 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처음 만난 박 교수와는 학문과 연구방법에 대한 대화가 시공을 뛰어 넘으면서 진행되었다. 미국 유수의 주립대학인 애리조나 대학교(UA)에서 C.W. 퍼구슨 교수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특히 그 대학의 ‘나이테 연구소’에서 나무의 나이테를 통한 연구(연륜연대학)를 전공하였다는 점에서 무한한 신뢰를 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미 75년 처음으로 나무의 연대측정에 관한 논문을 우리나라 학계에 발표할 때, 퍼구슨 교수의 업적을 나름대로 크게 소개하였으며, 그의 연구소가 세계적인 위치에 있음을 길게 설명했던 바가 있다.
  이렇게 만난 박 교수에게 고양 일산 신도시 개발에 따른 학술조사에서 필자가 책임을 맡았던 제2지역(가와지유적)에 대하여 함께 조사하도록 권유하였고, 이 학술조사야 말로 박 교수가 한국에서 조사한 첫 번째 학술활동이었다.  당시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발굴단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어렵사리 찾은 토탄층에서 출토된 나무가 가래나무임을 그가 바로 식별, 판단하여 주었다. 이 나무의 연대는 정확히 미국의 유명한 베타 연구소에서 5020년 전인 것으로 밝혀냈으며, 그 후 출토목재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판명되었다. (현재 고양 가와지볍씨 박물관에 전시중)
여기에서 박 교수와 함께 발굴한 가와지볍씨는 나중에 우리나라의 선사시대의 농경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2지점에서 출토된 나무종류나, 그 다음에 계속하여 찾게 된 다른 2지점에서의 많은 나무에 대한 분석연구는 오로지 박 교수의 몫이었다.
박 교수는 본인이 지금까지 연구해 온 새로운 방법과 해석으로 발굴된 많은 나무시료들을 분석·보고하여 당시의 다른 지역의 발굴 팀들에게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훌륭한 업적을 보고하였으며, 이 보고서를 통하여 그의 학문적 위치를 고고학계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
이어서 전남 순천에 세워진 주암댐 조사로 찾게 된 1만5000년 전의 화순 대전 집터에서 출토된 숯의 분석도 박 교수의 연구실로 넘겨지게 되었으며, 그 뒤로 이어지는 서해안 고속도로의 화성 지난해 11월 19일 목재연륜소재은행 창립 5주년 행사장에서 박 원규교수(왼쪽)와 함께 한 이융조 교수(가운데). 안중지역의 7000년 전의 희곡리 유적에서 출토된 엄청난 양의 나무를 분석하여 유감없이 그의 학문적 연구능력과 성과를 우리 학계에 보여주었는 바, 필자는 지금도 그의 학문에 대한 성실성과 불타는 정열에 탄복하고 있다.
이렇게 연구를 진행하면서 박 교수는 연구영역을 더 넓혀 국내 유명한 절에 안치된 나무 부처(목불)들에 대한 목재의 식별과 나이테연구를 실시하여 왔으며, 절 기둥과  민속 가구의 목재 분석 등도 같이 진행하여 옛 나무에 관한 방대한 자료들의 수집활동으로부터 아직 40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학문적 영역을 무한히 넓혀가고 있었다. 그러한  방대한 연구결과를 내면서, 국립민속관에 소장된 많은 민속가구의 목재분석으로 펴낸 저서 ‘목가구의 수종식별과 연류연대(2004)’ 는 지금까지도 이 방면의 좋은 지침서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박 교수는 국제회의에서 만난 러시아 과학원 회원인 바가노프 교수(후에 러시아 연합대학원 총장)를 한국과학재단의 후원으로 충북대학교로 초청하여 공동연구를 수행하면서 그의 학문영역을 러시아까지로 확대하였다. 이것도 모자라 그의 부인까지 초청하여 바카노프 교수와의 학문적 연구를 지속적으로 계속하여 한국과 러시아 나무와의 상호 비교 연구를 통하여 엄청난 연구결과를 세계학계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한편, 인도 및 태국 출신의 대학원생들을 받아 학문의 제자로 만들며 박 교수의 연구방법을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 여러나라에 까지 전수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북부지방의 러시아, 온대지방의 한국과 일본, 그리고 열대지방의 태국·인도를 연결하여 나무를 통한 먼 역사의 기후와 강우량의 변화를 비교하며 방사성 동위원소(C13, O2)의 연구까지도 진행하였다.
이렇게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박 교수는 필자가 연구책임을 맡고 있는 ‘중원지역의 구석기연구’ (한국학술진흥재단 예산지원)에 공동연구자로 3개년간 참여하면서, 자신의 제자들과  합류하여 연구, 교류를 넓혀갈 수 있었다. 이렇게 얻은 연구결과를 가지고 세계적인 구석기 연구기관인 불란서 국립고인류연구소(사진 1)와 벨지움 리에즈 대학교에서 유창한 영어로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하여 참석한 학자들로부터 대단한 평판을 얻어서 함께 참가한 우리들의 위상을 올려주는 데에 큰 몫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2003년 6월 미국 워싱턴 DC에서 있었던 제5회 세계고고학대회(WAC-5)의 135개 패널가운데 하나로 진행된 ‘수양개와 그 이웃들’ 분과회의에서도 박 교수는 자신이 갖고 있던 학문적인 큰 틀과 해석을 제시하여 참가하였던 여러나라 학자들에게 옛 나무를 통한 기후복원과 강우량 연구에 획기적인 업적을 제시하여 열렬한 박수를 받았었다
이렇게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여러 방법을 통하여 많은 유적에서 얻은 나무자료와 박 교수 스스로가 제자들과 함께 갤로퍼를 타고 다니면서 수집한 수많은 나무 시료의 보관, 과학적 처리와 분석연구의 필요에 2003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학회 활동 중이었던 박 교수. (앞줄 검은 정장차림) 따라 국내 유일의 목재소재은행을 설립한 것이 바로 6년 전의 일이었다. 학교 당국과 학과 교수들, 그리고 박 교수를 중심으로 설립한 문화재과학과 대학원생들을 중심으로 한 목재소재은행은 이제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우리나라 뿐 만 아니라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시설과 자료를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박교수는 자신있게 작년 11월에 목재소재은행 설립 5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개최, 당시 김승택 총장과 필자가 축사를 하게 되었으며, 또한 지금까지 교류를 맺은 여러 동료 전문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하고 박물관으로부터 받은 진열장에는 지금까지 수집한 훌륭한 자료들을 잘 전시하여, 자료실·연구실·진열실을 함께 갖춘 연구시스템을 참석한 국내외의 학자들에게 공개하여 참석자들로부터 큰 기대와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특히 이 자리에는 헝가리의 유명한 안드라스 교수로부터 그 먼 나라에서 갖고 온 큰 나무시료를 기증받기도 하는 엄청난 학문적 외교를 이루기도 하였다.
이것이 바로 작년 11월 19일이었다. 이제 박 교수는 그의 학문의 세계가 정말로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학자로써 자리매김하고 그의 연구결과는 같은 방면의 전 세계 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는 막중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하기에 국가로부터도 더욱 어렵고, 또한 그 만이 할 수 있는 숭례문복원에 사용된 목재감별을 맡게 된 것으로 짐작한다.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지금부터 그의 학문의 세계가 전 세계로 향하는 큰 바탕과 방향이 모두 준비되어 있던 참에 우리는 그를 가까이에서 볼 수 없는 정말 슬프고 불행한 위치에 있게 되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에도 박 교수와 함께 유럽으로, 미국으로 함께 다니며 우리 중원지역의 구석기를, 그리고 이들의 자료에 대한 연구결과를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하였던 그 많은 시간들이 떠올라 안타까움을 금할길 없으며, 다시 한번 생전의 그의 협조에 깊이 감사하고 그의 업적을 높이 칭송하고자 한다.
이제 그가 우리곁을 영원히 떠났다고 하더라도 많은 자료들을 통하여 그의 짧은 생애동안 그가 이루려고 했던 학문적 업적들이 더욱 승계·발전될 수 있도록 학과 교수들을 비롯하여 많은 후학들의 부단의 노력이 기대되고 있으며, 또 그렇게 진행된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도 올바른 방향을 찾아서 박 교수의 학문적 업적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역사 깊은 대학과 연구소에서 본 것처럼 박 교수의 연구실 앞에  그의 흉상과 연구실 이름이 전시되어서, 남아 있는 우리들이 세계적인 학자와 그의 업적을 기리는 학문적 예의를 표시하여 주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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