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혜 SK하이닉스 C-PKT팀


내게는 보통 6개월 간격으로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다. 마치 자신이 공정하다는 듯 누구에게나 불쑥 찾아오고, 무기력하게 만들다가 홀연히 사라진다. 불청객 같은 ‘매너리즘’ 이 그러하다.
작년 겨울의 끝자락, 그 불청객은 어쩐 일인지 몇 날 며칠이 지나도 나갈 생각을 안 했다.  한파를 피해 내게 들러붙을 작정인지, 아니면 오히려 비탄에 빠져 냉담해진 내 마음 한복판에서 썰매라도 타고 싶은 건지, 그러다 문득 일상의 반복적인 패턴 속에서 번민한 생각들에 휩쓸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의 두 갈래 길 중에서, 두렵지만 설레게 하는 생경한 곳에 당장이라도 찾아가 산적한 생각더미들을 쓸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검색 도중에 두 눈 가득 호기심을 채우게 만드는 문구를 발견했다. 그것은 군산의 ‘가창오리군무’ 탐조투어였다. 회사 휴무와 날짜가 겹치는데다가 신청 기한이 불과 몇 시간 밖에 남지 않아 더 고민할 필요 없이 단번에 탐조투어신청을 해버렸다. 이렇게 갑자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도시를 나 홀로 가보기는 난생처음이었다. 마음에서 아낙네들의 힘찬 방망이질이 느껴졌다. 아프기는커녕 비타민 드링크가 흡수되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당일, 철새들을 촬영할 핸디캠, 방한용품 몇 개를 집어 들고 군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수천 마리의 철새들이 떼를 지어 내 머리위로 지나갈 것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진정이 되지 않았다.
버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낯선 풍경들과 사람들, 3시간 거리 차, 나 홀로 떠나는 여행에서 느끼는 자유로움과 고독의 양면성에 이어져 고즈넉한 해 질 녘의 냉기가 군산의 당도를 실감케 했다. 집결지인 철새조망대는 생각 외로 많은 인파로 활기를 띄고 있었다. 이름표를 건네 받고 한 쪽 부스에 들어가 방금 구워낸 따끈한 고구마와 보리차로 몸을 녹인 뒤, 금강 하구둑 ‘나포 십자들’로 이동했다. 두 뺨을 꼬집는 금강의 얼어붙은 기류도 가창오리의 화려한 군무를 보겠다는 의지만큼은 막지 못했다. 한 자리에 서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창오리의 비상을 절실히 기다렸다. 수 십 여 분이 흐르고, 한 사람이 다급하듯 지루한 정적을 깨뜨리며 말했다. “시작했다!!” 순식간에 모두가 금강의 반대편에 일제히 시선을 고정시켰다. 서서히 가창오리 한 두 무리가 비상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각자의 날갯짓이 모여 물안개 피어오르듯 날아올라 바다고래가 되어 더 넓은 하늘을 덮기도 하고, 가느다란 물미역이 되어 춤을 추더니 어느새 뭉게구름이 되어 하늘을 감싸는 장엄한 자태를 연출했다. 숨 쉴 틈 없는 셔터소리와 더불어 두터운 장갑마저도 싸늘하게 만드는 맹추위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욱더 캠코더를 움켜쥐면서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가창오리 떼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니, 불현듯 여기 온 목적이 촬영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찰나처럼 스쳤다. 그제서야 잠시 촬영을 멈추고 상기된 마음을 가라앉혔다.
다시금 두 눈으로 가창오리의 장엄함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화려한 자태 너머 그들의 생존어린 비상을 짐짓 느낄 수 있었다. 광활한 러시아의 시베리아를 거쳐 한 마음 한 뜻으로 장시간 비행했을 작지만 강인한 생존력에서 절로 숙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질서정연한 조직체로 서로에 대한 신뢰와 희생, 헌신이 기반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번성과 생명력은 존속의 구심점으로 그들의 생존을 더욱 두텁게 만들었다.
철새들의 장기 비행이 가능한 이유는 그 중심의 리더가 되는 철새가 온 힘을 다한 날갯짓의 파동으로 최대 90%까지 주변부 철새들이 힘을 들이지 않고 비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리더를 맡은 철새의 힘이 바닥날 때 즈음, 그 옆에 다른 철새가 교대로 리더의 역할을 이어받아 힘찬 날갯짓을 하면서 그렇게 서로를 위하며 힘을 주고받았기에 장기간의 힘든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능적으로 자신을 초월해 상대를 위한 힘찬 날갯짓을 하는 철새처럼 집단, 공동체, 나아가 사회와 국가에 얽혀있는 우리도 서로가 다른 이를 위하는 날갯짓과 같은 배려를 실천해야 한다. 이기심과 위선, 교만과 실리를 중히 여길수록 결국 위기와 침몰, 극한 비탄을 초래할 뿐이다.
일상의 매너리즘을 탈피하고자 선택한 돌발여행은 커다란 귀감과 감동으로 평생을 간직 할 보물이 되었다. 가끔 철없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철새들의 날갯짓을 떠올렸다. 아직 부족한 것도 많고 배워야 할 것도 산적해있지만 무리를 이끄는 철새의 리더처럼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계속 길러가면서 언젠가 사력을 다하는 철새처럼 다른 사람들의 힘을 나눠주는 존재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비로소 그 순간 매너리즘이 홀연히 사라졌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