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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문학의 선구자/포석 조명희를 찾아서<1>
한국 근현대문학의 선구자/포석 조명희를 찾아서<1>
  • 김명기 기자
  • 승인 2014.10.12 1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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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압제에 저항하여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

한국 최초 창작시집 발간, 한국 최초 희곡 창작·공연 등

한국 근현대 문학의 선구자로 새 지평 열며 큰 족적 남겨

소련 망명 ‘고난의 길’… 민족사랑은 비극적 총살형으로

 

▲ 블라디보스토크 옛 극동대 안에 건립된 조명희 문학비. 극동대가 다른 곳으로 이전한 뒤 관리 소홀로 조명희 문학비의 동판 2개가 뜯겨져 나갔다. 문학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답사단. 왼쪽부터 김 안드레이 전 타쉬켄트대 교수, 김태수 진천군청 문화체육과장,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 나순옥 포석기념사업회장, 김흥남·김왕규씨 부부, 곽동환 진천군청 담당직원, 김명기 동양일보 편집부장.

프롤로그

동양일보 ‘조명희 답사단’은 지난 9월 2일∼11일까지 9박 10일 동안 ‘포석 조명희의 삶을 찾아서’를 주제로 충북 진천출신의 포석 조명희(1984∼1938년) 선생이 소련으로 망명한 이후의 행적을 좇아 선생의 치열했던 삶과 문학을 되짚어보고 재규명하는 귀중한 시간을 가졌다.

한국 근현대문학의 선구자이자 태두(泰斗)로 다양하고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포석은 한국 최초의 창작 희곡 ‘김영일의 사’를 썼고, 그 희곡으로 한국 최초의 순회공연을 벌였으며, 한국 최초의 창작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발간했다. 선생은 시인, 소설가, 희곡인, 아동문학가, 평론가, 교육자, 언론인, 번역가 등 다양한 부문에서 한국 근현대문학사와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일제의 민족압살 통치에 문학이라는 무기를 통해 문인으로서 가장 당당하게 맞섰던 선생은 더 이상 조선에서 삶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1928년 8월 21일 소련으로 망명해 새로운 문학과 삶을 개척해 나아간다. 특히 소련으로 망명했던 기간 동안 선생은 고려인(카레스키야)의 구심점이 됐다. 선생은 언론인과 교육자로서 민족 계몽과 항일 투쟁의 선봉에 서기도 했으나, 1938년 당시 스탈린 정권의 음모에 의해 일제 스파이로 누명을 쓴채 총살형을 당하는 비극을 겪게 됐다. 이러한 업적과 활동상으로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스리스크, 하바로프스크 등 연해주 지역의 고려인들로부터 항일투쟁 영웅 59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동양일보는 조명희 선생의 삶과 문학을 반추하여 선생이 한국 근현대문학사에서 점하고 있는 독보적 위치를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싣는다. 이번 연재물을 통해 동양일보는 한국 근현대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연 선생의 다양한 작품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일제 강점기의 한국 문학에 풍요로움을 더하고자 한다.

이번 시리즈는 1부 ‘한국 근현대문학의 선구자,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를 주제로 답사기를, 2부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 포석 조명희의 삶과 문학’을 주제로 연대기적 평전을 싣는다.

답사단은 조철호 단장(동양일보 회장·조명희 선생 종손)과, 김왕규·김흥남씨 부부(조명희 선생 외손자 내외), 김태수 진천군청 문화체육과장, 곽동환 진천군청 담당직원, 조성화 열린기획 대표(조명희문학관 기획업체), 나순옥 진천포석기념사업회장, 김명기 동양일보 편집부장 등 8명으로 구성됐다. 전 타쉬켄트대 교수 김 안드레이(조명희 선생 외손자·조선아씨 아들)씨는 현지 안내와 통역을 맡았다.

 

 

 (동양일보 김명기 기자) 9월 2일, 이제 ‘그’를 만나러 간다. 그의 삶과 문학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이번 여정은 답사단에게, 한편으론 기대감으로 설레게 했고 한편으론 막막함에 초조함을 더해주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러시아로 출국하면서 느끼게 된 답사단의 마음은 대개 그러했다. 그만큼 ‘그’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면서, 동시에 딱히 확신할 수 있는 팩트가 그리 많지 않은 신기루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그것이 이데올로기라는 장벽 때문이었든 선생에 대한 정확한 조명을 머뭇거리고 하지 못한 후학들의 탓이었든.

9시 50분 보딩, 10시 10분 인천국제공항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출발. 12시 30분 도착예정이다. 한국과의 시차는 2시간. 서해 공해상으로 나가 중국 단둥과 푸순, 창춘을 지나 러시아 영내로 들어섰다. 깔끔한 블라디보스토크공항은 그리 붐비지는 않았다.

김 안드레이 교수가 일행을 맞이했다. 살이 많이 쪘다. 20여년 전 김 교수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었는데, 이국땅에서 20여년 만에 보는 그는 더욱 반가웠다. 공항서 답사단이 묵을 슬라반스카야 호텔까지는 30분 소요된다고 한다.

공항에서 빠져나오는 길 오른편에 규모가 제법 큰 현대자동차 부품공장이 보인다. 한국 자동차가 여기까지 그 ‘위세’를 뻗치고 있다. 이 곳엔 한국 업체가 많이 진출해 있다고 한다.

답사단이 탄 차량은 명색은 벤츠인데, 외관이나 내부가 매우 낡았다. 일행이 묵을 슬라반스카야 호텔도 모텔 정도 수준, 혹은 깨끗한 여관 정도. 6층 건물에 객실은 50여개. 답사단은 여장을 풀고 답사에 앞서 숨을 골랐다.

 오후 5시 40분, 조명희 문학비가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극동대로 출발했다.

조명희 문학비는 극동대 미술과 조각교수가 만들었다. 그는 조명희의 사상과 문학에 매료돼 선생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한 교수였다. 조명희 선생의 뼈 토막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문학비. 뼈 토막은 이국땅 하바로프스크에서 억울하게 처형된 선생의 비극적 삶을 조형화한 것이다. 그런데 그 문학비 동판이 뜯겨진 채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었다.

문학비를 처음 세울 때 2개의 동판을 만들어 붙였었는데, 두 개 모두 뜯겨져 나갔다. 한 개는 분실되고 한 개는 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문학비로 향하는 초입에 있는 박물관으로 들어가 보관돼 있는 동판을 확인하려 했으나 그 곳 관리인은 대학 총장에게 물어봐야 정확히 어디에 동판이 보관돼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관리 소홀도 모자라 참 무책임한 사람들이다. 마음이 쓰리다.

두 개의 동판에는 각각 조명희 선생의 약력과 세운 날짜, 그리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가 새겨져 있었다.

 저녁 7시 아꼴리사 식당을 찾았다. 슬라브식 음식을 하는 전통 식당이다.

현지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 단원도 있었지만, 대체로 잘 먹는 편이었다. 1인당 1000루블, 한화로 3만원의 식사. 나온 음식 내용치고는 꽤 비싼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하면서 담소 주제가 자연스레 ‘한국’, ‘조국’으로 잡혔다.

김 안드레이 교수가 열변을 토한다.

“나는 국수주의자입니다. 한국인은 한국 혈통을 지켜야 하고, 한국 문화를 지켜야 하고, 그 한국 문화를 발전시켜 글로벌화 해야 합니다.

터키식 음식 케밥(kebap)을 예로 들어 볼까요? 되네르 케밥(doener kebap)은 양고기와 닭고기, 소고기를 불에 회전구이로 하여 가늘게 썬 것을 야채와 함께 터키빵에 넣어 먹는 것인데요, 처음에 터키가 이 음식을 유럽에 내놓았을 땐 주민들 반응이 시큰둥한 것이었죠. 자기네 입맛에 안 맞는다는 거예요. 하루 이틀, 한달 두달, 일년 이년이 지나면서 이 음식은 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회전구이 고기가 됐어요.

쉬쉬 케밥(shish kebap), 키레미트 케밥(kiremit kebap) 등도 덩달아 인기를 끌게 됐고요. 터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 음식을 서유럽에서 러시아 극동까지 전파시켰어요. 지금은 세계적인 음식이 됐죠. 한인 강제이주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까레이스키’인 우리는 그런 것이 정말 부러웠어요.

우리 한국도 이제 그런 다양한 문화를 세계화 해야 ‘세계 문화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겁니다.”

아마도 외조부 조명희 선생으로부터 이어졌던 잔혹하고 비극적인 가족사가, 그리고 조국과 멀리 떨어져 ‘독립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에게는 ‘민족애’가 가슴 밑에서부터 사무치게 끓어 올랐던 듯싶었다.

 

▲ 블라디보스토크항의 아름다운 풍경. 세계적인 미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식사를 마치고 저녁 8시 45분 해변을 찾았다. 러시아 극동의 최대 항구답게 퍽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졌다.

블라디보스토크가 세계적으로 이름있는 미항 가운데 하나라는데, 그 명성에 손색이 없는 풍경이었다.

러시아 꼬치구이에 터키식 케밥을 시켜 먹었다. 김 교수의 말을 들어서인지 그 맛이 남다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법, 애주가가 몇 있으니 ‘러시아 법’에 따라 보드카를 2병 사서 먹었다. 독하지만 깔끔한 맛으로 뒤끝이 좋은 술이었다.

첫날 일정은 그렇게 여유롭게 진행됐다.

내일부터는 강행군이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조명희 선생 삶의 궤적을 되짚어 가는 이번 답사일정을 나름대로 촘촘히 짜기는 했지만, 그것이 정확히 일치하는 지는 이곳이 초행길인 일행들로서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여 조명희 선생 관련 유적지를 찾지 못하지는 않을까 그것이 두려웠다.

 

▲ 신한촌 건립비. 이 기념탑은 1999년 8월 15일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가 건립했다. 한글과 러시아어로 신한촌의 역사적 위상과 의미를 기록한 연해주신한촌기념탑문과 기념탑 건립의 경위를 기록한 건립기에 기념탑 건립에 중심적 역할을 한 해외한민족연구소 관계자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9월 3일 오전 8시 30분 신한촌으로 향했다.

신한촌은 블라디보스토크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뒤 재개발로 인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 신한촌 거리 2A 구역에 있는 건물 한 채 만이 그 당시의 건물이라고 한다.

신한촌 거리 2A 구역에 있는 건물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현지인조차 주소만 달랑들고 찾아가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신한촌의 옛 흔적을 찾으려 이미니어스 아르시니어프 박물관에 들렀다.

3층으로 된 이 박물관엔 박제된 동물과 유물, 그림, 사진 등이 전시돼 있었다. 이곳에서 신한촌과 관련돼, 더 나아가 조명희 선생과 관련된 단초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였다. 그런데 직원은 까레이스키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맥이 빠진다. 장벽이 눈 앞에 턱하니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다.

답사단은 사진이 전시돼 있는 3층 전시실을 주목했다. 중국인촌과 일본인촌은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신한촌의 옛 모습은 없다. 휴가중이라는 박물관 관련 전문학자와 전화 연결을 하여 신한촌 관련 자료를 찾으려 했지만 별무소득.

 

▲ 답사단이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 직원들과 오찬을 함께하며 조명희 선생과 관련된 정보를 주고받았다. 오른쪽 두번째가 이양구 총영사, 세번째가 김일환 영사.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점심 때 답사단은 총영사관 직원들과 한식당 해금강에서 오찬을 함께 했다.

이양구 총영사와 김일환 영사에게는 출국 전부터 조명희 선생 관련 인물을 찾아달라고 부탁한 터였다.

이 총영사는 러시아에서 ‘조명희 학술대회’를 열면 어떨까 제안했다. 그러면 조명희 선생 관련 인물들이 자연스레 모이게 되고, 선생에 대한 러시아 극동지역의 한인들 의식이 진일보할 것이라는 취지였다.

이 총영사는 그러면서 조명희 선생의 ‘브랜드화’를 말했다.

“조명희 선생은 충북 진천군의 브랜드가 될 것입니다. 이국 땅에 나와 생활하다 보니 ‘관(觀)’의 문제를 늘 생각하게 됩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병존하는 곳이 블라디보스토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곳에서 조명희 선생이 벌였던 다양한 활동들로 인한 한민족의 문화관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교육자로서 그 분의 교육관, 선봉 등에서 일하면서 견지한 언론인으로서의 언론관, 일제에 저항한 문학가로서의 역사관 등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명희 선생의 이름을 되새기는 계기가 될 뿐만아니라, 선생의 고향 진천에서도 선생의 명성이 브랜드화 되어 고장의 명예를 드높이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귀담아 들을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이 곳도 별무소득.

하기사 이 총영사와 김 영사에게 방문면담 주선을 부탁한 인물들, 이를테면 조명희 선생 제자가 지금 생존해 있다면 90세 전후일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분들을 찾아 생생한 육성을 듣는다는 것이 녹록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그 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자꾸만 불안한 마음이 든다. 이러다가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귀국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싶은 마음에 초조해진다.

김 영사가 대신 정보 두어개를 준다. 우스리스크 답사 때 ‘고려인 연합회’와 김 발레리아 고려일보 편집국장을 찾아갈 것과 남모 교수를 섭외해 보라는 것이었다. 김 영사가 건네 준 정보를 메모하고 오찬을 끝냈다.

 조명희 선생이 몸담았던 ‘선봉’을 찾아가는 길. 선봉은 블라디보스토크 전동맹공산당 볼세비키에서 발행한 신문이다.

애초에 입수했던 선봉의 주소는 블라디보스토크 레닌스카야 43번지였는데, 확인 결과 현재 스베틀란스카야 43번지로 주소가 바뀐 것으로 확인됐다.

근대식 3층 건물인데, 선봉이 발행되던 곳은 2층이었다. 다른 이가 이 건물을 인수해 은행으로 쓰였던 2층과 1층 서점까지 올해 나가게 된다고 한다. 어떤 이가 어떤 용도를 사용할 지 모르지만, 조명희 선생의 언론인으로서의 숨결이 배어있던 이 곳이 제대로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다시 신한촌으로 향했다.

신한촌 기념탑은 쉽게 찾았다. 비교적 옛 신한촌으로 가는 초입 큰 도로 옆에 있어 눈에 띄었다.

그러나 당시 건물로 단 한 채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주택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30년 전에 재개발된 터라 도무지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서울서 김서방 찾기다.

신한촌 기념탑은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카야 26A에 있다. 러시아 연해주 신한촌을 기념하기 위해 연혁과 역사적 의의를 석탑조형물로 새긴 탑이다.

이 기념탑은 1999년 8월 15일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가 건립했다. 한글과 러시아어로 신한촌의 역사적 위상과 의미를 기록한 연해주신한촌기념탑문과 기념탑 건립의 경위를 기록한 건립기에 기념탑 건립에 중심적 역할을 한 해외한민족연구소 관계자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탑의 뒷면 오른쪽 일부는 약간 파손돼 있다.

조선의 정치 불안과 빈곤으로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가 시작되었던 1863년 하산지역 남쪽을 중심으로 최초의 한인촌이 생겨났다. 1870년대 8400명으로 집계된 연해주 한인 이주민의 수가 1923년에는 1만2000명까지 이르게 되었다. 1929년 하산지역 북부 포세에트 항구 한인마을은 한인극장과 문화회관은 물론, 한인자치기관을 두고 있었으며, 행정기관에서는 한글을 사용하는 등, 한인 정착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듯했다고 한다. 그러나 1937년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강제이주 명령에 의해 두 차례에 걸친 연해주 한인 강제이주가 집행되면서 현재 러시아, CIS 국가에 산재해 있던 고려인 동포들의 한과 설움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간 한인촌은 일제침략 때 항일운동에 크게 기여한 지역으로 많은 독립지사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999년 8월 한민족연구소가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기리고, 러시아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신한촌에 기념비를 설립하였다. 또 ‘2002 한-러 친선특급 시베리아철도 대장정’도 항일 독립운동사에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신한촌 항일운동 기념비 앞에서 그 첫발을 시작했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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