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속 포석의 이상은 강과 민요가 상징하는 원초적 공동체의 삶”

한국 근대 문학의 선구자, 포석 조명희(1894∼1938) 선생의 삶과 문학을 재조명하기 위한 3회 ‘포석 조명희 학술 심포지엄’이 지난 8일 오후 2시 진천종박물관 주철장전수교육관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동양일보 문화기획단이 주관한 이날 심포지엄은 학술대회 결과물을 한국 문학사의 기록문화 자산으로 남기고자 마련됐다. 동양일보는 지면을 통해 심포지엄의 내용을 싣는다.<편집자>

 

▲ 방민호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방민호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조명희 단편소설 ‘낙동강’과 최인훈 소설 ‘화두’

최인훈의 ‘화두’는 조명희의 ‘낙동강’을 원용

포석에 대한 ‘오마주’를 완성하고 있어

 

월남문학은 한국문학을 풍요롭게 하는 원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데서 탄력성 가져

 

‘화두’와 ‘낙동강’이 공유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꿈을 간직한 사람들의 모습

 

오늘 제가 준비해 온 주제는 어떻게 보면 다소 방법적이거나 재론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제 형편이 닿는 대로 좀 더 진전된 논의를 해보고자 했습니다.

최인훈 소설 ‘화두’는 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저는 그 작품을 포함해 ‘현실을 바라보는 세 개의 논리’라는 글을 발표해 1994년 창작과 비평에서 제정한 1회 신인평론상을 받고 평론가로 데뷔할 수 있었습니다. 제게는 깊은 인연이 있는 작품이죠.

그런데 오늘의 자리와 관련해서 아주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 앞 부분에 바로 조명희의 단편소설 ‘낙동강’에 관한 회상이 아주 밀도 높게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화두’의 첫 문장은 ‘낙동강 칠백 리, 길이 길이 흐르는 물은 이곳에 이르러 곁가지 강물을 한 몸에 뭉쳐서 바다로 향하여 나간다’라는 조명희의 소설 ‘낙동강’의 첫 문장으로 시작하며, 마지막 대단원 역시 이 문장을 인용함으로서 조명희에 대한 오마주를 완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화두’의 처음과 끝에 등장할 뿐 아니라 조명희의 최후, 소설 ‘낙동강’이 반복적으로 등장해 언젠가 한번은 꼭 다뤄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80년대 후반에 월북문학에 대한 연구가 많이 됐죠. 해금이 되면서 월북작가에 대한 연구가 비로소 가능해졌고, 월북작가는 아니지만 조명희 선생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도 그 당시에 길이 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월남문학은 체계적으로 연구 된 바가 없습니다. 당시 월북작가들이 얼마나 생산적인 문학 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언론 출판의 자유가 없어. 문학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체제에 영합하는 문학을 하거나, 아동문학을 하거나. 역사 소설을 쓰는 방법 밖에는 현실을 상대로 문학을 가치 있게 만드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월남문학은 어떠합니까. 월남문학은 바로 이 남한의 문학을 가장 풍요롭게 만든 원천입니다. 당시 남한의 문학은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같은 문학 정통파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 등 우익쪽의 문학인들이 주조를 이루고 거기 청록파 3인이 결합해 주류가 됐죠. 그런데 월남작가들은 이 체제에 기득권이 없고 안정권을 갖지 못해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데서 상당한 탄력성을 갖고 한국문학을 상대하게 됩니다. 장용학, 이호철, 최인호 등이 전부 월남작가입니다. 이들은 김동리 등의 고색창연한 토착적 동양주의를 파열시켜 이질적이면서도 다종다기한 문학이 번성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일궈 냈습니다. 그러므로 월남문학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범주를 잡고 해방 이후 형성 과정에서 어떤 역할들을 갖고 있었느냐를 연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월남문학이 결코 작은 개념이 아니라 중요한 문제인데 여기서 거두가 최인훈이라는 거죠. 최인훈은 1.4후퇴 때 원산에서 LST를 타고 부산으로 탈출한 월남작가입니다.

월남문학은 고향 상실의 문학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향을 상실했을 때 사람들이 반응하는 양식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 유형은 장소성을 회복하려는 경향을 띠는 월남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월남은 고향으로의 회귀 욕구를 최대한 억제하고 고향을 떠난 현실 상태 그 자체에 적응하고자 시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유형은 생래적으로 부여된 고향과는 다른 차원의 고향을 향한 지향을 수반하는 월남입니다. 월남을 일종의 엑소더스 또는 디아스포라 상태로 규정할 수 있다면 이것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대신 더 이상적인 고향, 상실된 과거로서의 고향보다 더 나은, 미래의 고향, 미지의 고향을 지향합니다.

최인훈은 세 번째에 해당합니다. ‘화두’에 나타난 주인공의 행로를 봤을 때 이 월남은 정말 특이합니다. 회귀가 아닌 진정한 고향으로의 나아감입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고향일지라도 내가 추구하고 돌아가야 할 고향이라는 것이죠. 저는 이것이 조명희의 ‘낙동강’이 굉장히 밀접히 연관돼 있는 고향상실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낙동강’의 로사가 조명희와 마찬가지 존재고, ‘낙동강’에서 꿈꾸었던 로사의 길 떠남을 조명희 스스로 연해주로 떠남으로서 실행해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1930년대 초반에 나온 이효석의 ‘노령근해’라는 단편소설집이 있습니다. 소설 주인공이 밀항을 해서 노령에 갑니다. 소설 속에 나오는 노령은 계급적인 독재 국가로서의 노령의 이미지 보다는 조선의 피해 억압 상태와 다른 유토피아적인 공간의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낙동강’에 나타난 로사의 길 떠남이라는 문제가 사실은 진실한 고향. 진정한 가치가 있는 고향을 찾는 문제와 연결돼 있고 따라서 ‘화두’에서 조명희의 ‘낙동강’을 계속 문제 삼지 않았겠는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결국 최인훈이기도 한 화자가 러시아에 가서 자신의 제자에게 하바로브스크 KGB 본부에 가서 조명희에 관련된 자료를 찾아달라고 해서 실제 찾아왔다는 겁니다. 화두의 자서전적 성격이 매우 강한 것에 비춰봤을 때 이 자료가 실제가 아니라고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읽어보니 이것은 조명희 등 조선인들이 쓸 수 있는 글이 아니에요. 신경제정책의 전후 문제를 다룬 이 팸플릿은 제가 추측하기로는 레닌의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이는 레닌 문서들과의 비교를 통해 추후 확증되어야 할 사안입니다.

신경제주의를 취해야 한다고 제시한 이 문서가 왜 죄인 조명희에 대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었을까요? 최인훈은 바로 조명희에 관련된 문서철이라는 이유로 (제가 볼 때는 레닌의 연설문일텐데) 사고의 신축성. 사고의 탄력성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조명희가 공명했던 사회주의나 유토피아로 가는 길에 있어서의 주체적이면서 창조적인 태도로 수용합니다. 소비에트는 붕괴됐지만 우리 마음속의 유토피아. 이상사회로의 꿈은 단순히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이죠.

‘낙동강’은 그동안 카프 문학 이론에 의해서 이미지가 너무 덧씌워져 있었습니다. ‘낙동강’은 굉장히 아름다운 작품이거든요. 그런데 당시 김기진이나 작가들, 비평가들이 ‘낙동강’을 카프의 방향 전환론에 관련된 작품, 카프 2기 작품이라고 하며, 목적의식적 작품으로 문예 활동을 변모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낙동강’을 내세웠던 것이죠. 이 작품의 특징으로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이 낙동강 민요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자연적 존재인 인간들의 가장 원초적인 소망과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의 슬픔이 민요에 적극적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카프 2기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카프의 젊은 후배 비평가들이 필요에 따라 붙여 놓은 것이지 조명희가 그런 의지를 가지고 쓴 것일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2기 카프적인 목적의식론의 맥락에서 조명희를 해석하는 것은 조명희를 굉장히 불충분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로사의 떠남과 마찬가지로 조명희가 떠났을 때 소비에트에 가서 사회주의 투사가 되겠다고 목적의식적으로 떠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명희의 ‘낙동강’의 성격을 좀 더 깊이 음미해야 합니다. 최인훈의 ‘화두’와 조명희의 ‘낙동강’이 공유하는 것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꿈을 간직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세계가 우리의 이상이 실현되거나 우리의 본질이 충만히 실현된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딘가로 가야하는, 고향을 찾아가는 존재들인 거죠. 그런 맥락에서 조명희나 최인훈의 작품을 새롭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 이미순 충북대 국어교육학과 교수

● 이미순 충북대 국어교육과 교수

 

조명희의 희곡 ‘김영일의 사’의

독백에 대한 고찰

한국 최초의 창작 희곡 조명희의 ‘김영일의 사’는

최초 순회공연까지 하는 희곡사적 의미 지녀

 

‘나’라는 문제에 깊이 천착한 작품

희곡의 2/3 할애… 관객과의 소통에 큰 힘으로

 

근대적 개인의 자각을 작품의 주제로 삼아

많은 독백은 관객과 정서적인 감흥 고려한 것

 

제가 학교에서 희곡 강의를 하고 있다 보니 희곡사 속에서 조명희 선생을 다시 보게 됐어요. 개인적으로 ‘김영일의 사’를 읽은 것은 대학원 때입니다. 당시 조명희에 대한 연구는 학계에서 많이 되지 않았던 상황이고, 그나마 주로 ‘낙동강’을 위주로 이루어졌어요. 카프 목적 의식이 있는 작품의 전 단계에 있는 소박한 형태의 작품이 ‘김영일의 사’가 아니겠느냐는 시각이었어요. 당시 제가 제본돼 있는 작품을 봤을 때는 작품의 수준을 낮게 봤어요. 그리고 학교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희곡 작품을 강의하면서 자연스럽게 조명희를 뺐죠. 그런데 이번에 다시 조명희의 희곡을 제대로 보겠다고 생각하고, 이 작품을 굉장히 꼼꼼히 읽어봤는데 제 고정관념이 많이 깨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에 대한 종래의 평가는 다소 인색한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조명희의 작품 활동기 중에서 초기에 창작되어 극적 특성을 갖추지 못한 미숙함을 보였다거나 여러 가지 사상이 작품에 섞여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연구에서는 기독교 사회주의, 러셀의 사상 등 다양한 사상이 혼합돼 뚜렷한 주제의식을 드러내지 못하고 근대 정신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한 가운데 근대정신의 표현이 매우 모호하고 공허하게 나타나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한국 희곡사를 보면 과거에는 탈춤. 인형극 등 전통극을 주로 하다 오늘날의 서구적인 연극의 형태를 처음으로 도입한 것이 극예술협회입니다. 그런데 조명희가 여기서 활동을 한 것입니다. 희곡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것이죠. ‘김영일의 사’는 그 극예술협회에서 처음 공연한 작품으로 의미가 있는 작품이에요. 당시 극예술협회에서는 세 편의 희곡 작품을 공연했는데 ‘김영일의 사’는 그 중 가장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조명희는 직접 배역을 맡아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김영일의 사’는 창작 희곡으로서 처음 무대 위에 올려진 점 외에도 출판 면에서 다른 근대 희곡에 앞서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굉장히 ‘나’라는 문제에 많이 집착하고 있어요. 학생극이니 그 시대의 문제를 카프처럼 해결하고 조선 민중의 의식을 깨우치려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마음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하는 내용이 거의 작품의 2/3를 할애하고 있고 마지막에 새 나라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당시 ‘나’의 문제를 그렇게 많이 이야기한 작품이 있었을까요. 당시 이광수 등 다른 작가들에서는 그런 점이 두드러지지 않는데, 유독 조명희의 경우에만 많았어요. ‘나’라는 문제가 많이 드러나고 있는데, 작품 형식으로는 독백으로 나타나요. 조명희가 서양의 극예술을 배워 처음으로 작품을 쓰는 단계니까 기술이나 역량이 미숙해 인물간의 갈등을 표출시키는 방법을 몰라서 독백을 한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저로서는 ‘나’에 대한 천착이 굉장히 깊어지는 문제와 독백이 상호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이 필요에 의해 쓰였기 때문에 관객들과의 소통도 잘 됐고요. 사상적으로 방황할 때. 젊은 나이에 자신이 바라는 이상에 대해 탐색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근대 희곡의 두 축이 자아의 발견과 리얼리티의 확보라고 본다면, 이 희곡에서 자아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작품은 겉으로 볼 때 김영일과 전석원의 대립 구도로 보여요.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갈등은 주인공 자신의 내적 갈등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난과 질병에도 불구하고 운명에 맞서 싸우는 김영일과 사상 운동할 때의 정열을 상실한 채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전석원의 모습을 자신 속에서 보고 극복하려는 내적 갈등이죠. 이 과정에서 니체의 초인사상이나 기독교적 사회주의, 인도주의 등 다양한 사상적 갈등이 나타납니다. 사상적 갈등 역시 극중 행동이나 사건을 통해 드러나지 않고 내면화되고 있는데 이 또한 주로 김영일의 독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김영일의 서사적 독백은 극의 모든 주요한 사건들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죠. 김영일과 전석원의 사상이나 내부적인 세계, 혹은 김영일의 가족사와 관련된 서술체들은 상당 부분 독백을 통해 서술되고 있습니다. 김영일의 독백은 모든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의 서술체를 전달하는 기능을 하고 있었습니다.

김영일이 대화의 상대자가 없이 무대에서 순수하게 혼자서 이어가는 긴 대사의 독백도 있지만 다른 인물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인물은 침묵 속에서 있다거나 겨우 몇 마디 던지는 가운데 독백을 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독백을 김영일은 극에서의 중요한 사건을 전달하는 전달자의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김영일의 사’에서 주인공 김영일은 운명과 싸우고 자기 신생을 개척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자기와 싸우는 과정에서 생을 마감하는 인물입니다. 물론 그의 죽음은 한 개인의 운명을 중심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새나라’에 대한 이상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독백은 이러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관객에게 영향을 주는 유효한 장치가 되고 있습니다. ‘김영일의 사’에서 독백이 지니는 의미는 크게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자아의 각성이라는 주제를 계몽하는 효과적인 장치가 됩니다. 예술을 통한 인격 개조 계몽을 통한 사회 개조는 1920년 조선 문단의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극예술 협회에서는 계몽의 의도를 가지고 희곡에 접근했는데 ‘김영일의 사’ 역시 이 과정에서 나온 작품입니다. ‘김영일의 사’는 직접 작가가 무대에 올라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는데 독백은 그 증 가장 효과적인 장치가 되었습니다.

둘째, 당대 연극적 환경을 고려한 데서 나온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희곡이라는 장르의 뿌리가 없던 근대극 전환기 배경과의 연관성입니다. 근대극 전환기 신극은 서구의 근대극을 모범으로 했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희곡의 대사나 지문을 통해 작품의 갈등을 온전히 전개시키기 극히 힘들 수밖에 없었고, 이 때 독백은 유효한 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 관객으로부터 정서적 감응을 자아내는 데도 유효했습니다. ‘김영일의 사’는 관객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얻었던 작품입니다. 여기에는 독백에는 감정을 고조시키는 서정적 독백이 상당한 작용을 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영일의 서정적 독백은 결국 연극의 관객을 고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영일의 사’를 본 관객들은 가난한 학생 김영일과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했을 뿐 아니라 그의 사상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김영일의 독백은 실제 관객에게 직접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희곡에서의 독백은 너라는 상대 대화자나 청자가 존재하지 않는 담화이지만 연극에서의 독백은 관객이라는 잠재적 대화 상대자와 청취자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김영일의 서정적 독백은 큰 작용을 했을 것입니다.

‘김영일의 사’는 근대적 개인의 자각을 작품의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아 각성의 문제를 드러내는 데 독백은 효과적이었습니다. 자아의 각성이라는 주제를 계몽하는 효과적인 장치가 되었고 관객으로부터 정서적 감응을 자아내는 데도 유효했습니다. 이 작품에서의 독백은 당시 연극적 상황과 관객을 고려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독백에 대한 논의는 보다 깊이 있는 차원에서 고구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다른 작품들과의 비교, 극예술협회의 이념과 관련된 문제, 표현주의 독백과의 영향 관계 등은 대표적인 예입니다. 앞으로 이에 대한 보다 진전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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