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뉴스
UPDATED. 2018-11-12 22:36 (월)
3.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3.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 동양일보
  • 승인 2014.10.17 09: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은 그대 남은 날들의 첫날/부디 지난 날의 회한에 물들지 마오/추억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눈꽃/결코 잡히지 않는, 내일을 근심치 마오/희망은 숨어 있는 것 다가서면 멀어지는 신기루/추억은 깃털에 묻고 희망은 별빛에 묻고/밤 새워 한뎃잠을 자고 나온 아침 까치처럼/겁도 없이 인가에 내려앉는 저 황홀한 가벼움을/오늘도 반가로이 맞이하시라//오오, 오늘은 그대 남은 날들의 첫날 (권희돈 시 ‘첫날’)

사도 바울은 권력, 명예, 재산, 지위, 화려한 스펙과 같이 눈에 보이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희망이며 희망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시적 화자는 오늘을 영원히 사는 까치처럼 사는 것이 오늘을 잘 사는 것이라고 넌지시 일러 준다. 과거형이나 미래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사는 게 오늘을 올바로 사는 것이 되는 셈이다.희망이 잡히지 않는 것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미래와 같은 것이 희망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미래는 이미 가버린 추억처럼 잡히지 않는단다.

그러므로 이 시의 주제는 ‘현재형으로 살아라’이다. 그러나 이는 표층적 주제일 뿐이다. 심층적 주제는 표층적 주제 저 안에 숨어 있는 희망처럼 웅크리고 있다. 현재형으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는 것, 그것이 희망이다.

000평생교육원 문예창작과 봄 학기 첫 강의시간이었다. 출석을 부르는데 어떤 아줌마가 한참 후에 ‘제가 ○○○인데요’ 하면서 얼굴이 빨개진다. 늘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로만 불리다가 정작 자기의 이름이 불리니 자기의 이름이 남의 이름처럼 낯설었단다. 나는 그날 준비해왔던 강의 노트를 접고 ‘잃어버린 자기 이름 찾기’라는 주제로 첫 강의를 대신하였다. 그해 겨울, 눈이 하얗게 쌓이는 날이었다. 한통의 전화가 울렸다.

“교수님, 저 ○○○인데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원고료 받았어요. 교수님께 커피 한 잔 대접해드리고 싶어서요.”

약속장소는 그녀의 조그마한 사무실이었다. 그녀는 작은 절구통에 원두를 두어 숟갈 넣더니 앙증맞은 절구로 잘게 부순다. 분쇄된 커피조각들이 저마다 짙은 향으로 사무실을 가득 채운다. 그녀는 깔때기에 여과지를 넣고 커피 가루를 쏟는다. 뜨거운 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자 커피의 표면이 베이글 빵처럼 부풀어 오른다.

“어느 회사 홍보잡지에 수업 첫날 있었던 일을 글로 적어 보냈는데 당선이 됐지 뭐예요.”

잠시 후 여과지를 통과한 커피물이 서버에 한두 방울 떨어진다. 그녀는 뜨거운 물을 빙빙 돌리면서 붓는다. 커피가루와 물이 한 몸이 되는가 싶더니 연한 갈색의 커피물이 깔때기 밑으로 쪼르르 흘러내렸다. 그녀는 서버의 눈금을 확인한 후 깔때기에 남아 있는 커피찌꺼기를 얼른 다른 서버 위에 올려놓는다. 서버에 담긴 커피를 예쁜 잔에 따른다.

“드시지요.”

쓰지만 부드럽고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혀를 감싸고 돌았다. 맛도 맛이지만, 그녀가 커피를 분쇄하고 추출해서 내어놓는 과정은 다방커피만 마셔오던 나에게는 충격 그 이상이었다. 한 동작 한 동작 정성이 배어 있는 커피였기에 새롭게 느껴졌다. 갑자기 나의 품격이 높아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후로는 아주 띄엄띄엄 만났다. 20년이 지난 뒤 우연히 그녀의 사무실에 들를 기회가 있었다. 사무실의 집기들이 윤기가 흘렀으나 그녀의 얼굴은 수심이 가득하였다. 서로 근황을 물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어섰다. 막 문을 나오려 하는데 그녀가 어렵게 입을 뗀다. 금년에 방송대학 00000과에 입학했노라는 것이다. 나는 공부 좀 그만 하세요, 하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권희돈 ‘나의 커피바리스타 도전기’)

현실에서 억제된 내용은 무의식 속에 잠겨 무의식적 자아를 형성한다. 살아갈수록 무의식적 자아는 바닷물에 잠긴 빙산처럼 거대하게 쌓인다. 이야기의 주인공 역시 무의식 속에 저장된 억제된 내용이 어마어마하다. 그 양도 양이지만 그걸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무의식적 자아의 독이 무의식 밖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20년 전 수필을 배울 때의 현실적 자아는 매우 건전한 모습이었다. 현실에서 억제된 이상을 실현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잃어버린 이상적 자아를 찾는 듯 희망적이었다.

그런데 20년 후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차별받던 때의 참담한 모습을 재현하는 듯싶었다.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한 현실적 자아의 초라한 모습만 보였다. 그녀가 애면글면 공부에 매달리는 것은 집착이다. 또한 아직도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이다. 이런 태도는 복수심의 한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내 안에 내재한 희망을 깨닫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희망이라 착각하였다.

그녀에게 수필은 희망으로 가는 통로였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 통로도 보이지 않았고 그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내 안에 들어있는 눈덩이 같은 우상이 희망을 가리웠기 때문이다. 만약 20년 전 원고료를 받을 당시부터 글쓰기를 지속했더라면 그녀의 현실적 자아는 매우 우아했을 것이다. 그녀의 글은 커피 향처럼 독한 그리움으로 멀리멀리 퍼져나갔을 것이다. 그 때의 원고료는 액수는 적었으나 감동은 큰 것이었다. 그 사건 속에 그녀의 무의식적 자아를 풀어낼 열쇠가 숨어 있고, 새로운 이상적 자아를 키워갈 희망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청주대 명예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충청대로 103 (율량동)
  • 대표전화 : 043)218-7117
  • 팩스 : 043)218-7447,7557
  • 창간 : 1991-12-29
  • 제보전화 : 043)218-722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원중
  • 명칭 : 동양일보
  • 제호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 등록번호 : 충북 가 00003
  • 등록일 : 1991-12-27
  • 발행일 : 1991-12-27
  • 회장 : 조철호
  • 발행/인쇄인 : 유영선
  • 편집인 겸 편집국장 : 김영이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18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ynews@dy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