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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6>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6>
  • 김명기 기자
  • 승인 2014.11.16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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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에게 ‘등탑봉’은 사랑과 사색의 공간이었다
▲ 폐허가 된 륙성농민청년학교. 1929년 륙성촌으로 온 포석은 이 학교에서 1931년 우스리스크로 이사오기 전까지 조선어 교사 생활을 했다. 한때 20여명의 교사와 500여명의 학생이 다닐 정도로 번성했으나 소련의 강제이주 정책 이후 군 주둔지가 됐었고, 이후 방치돼 폐허로 변해버렸다.

(동양일보 김명기 기자) 황량한 벌판에 외롭게 나 있는 길. 인가도 없고 오가는 차량조차 없는, 끝없이 넓은 허허벌판에 놓여 있기 때문에 더욱 외로워 보이는 길. 륙성촌으로 향하는 길에서 우린 고독을 느꼈다.
길이라는 게 그렇다. 안주의 공간, 정착의 공간, 귀의(歸依)의 공간인 ‘집’에 대별되는 길은, 떠남의 공간이요, 방랑의 공간이요, 도전의 노정(路程)이다. 그래서 우린 길 떠나는 것에 대해 두려움과 설렘을 같은 무게로 느낀다.
그 길 위에 우리는 서 있다.
하여, 조명희를 찾아가는 이번 노정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륙성촌은 우리에게 길 떠나는 설렘과 두려움을 같은 무게로 느끼게 하고 있다.
85년 전인 1929년 블라디보스토크라는 도회지에서 고려인들의 땀과 눈물로 일군 륙성촌이라는 아주 작은 마을로 향하면서 포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조국의 품을 떠나 소련으로 망명한 뒤, 블라디보스토크 도회생활을 접고 고려인들이 살고 있는 륙성촌을 향하던 85년 전의 길은 포석에게 어떤 것이었을까. 일제에 저항하여 망명길에 오르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고려인들의 삶을 이끌었고, 종국엔 비극적 삶의 마감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늘 ‘거리’에 노정돼 있었다. 그리고, 지금 또 우리는 85년 전 포석이 찾았던 륙성촌에서 그의 흔적을 되짚으며 새로운 의미를 찾고자 하고 있다.
젊은 운전기사 친구는 헛똑똑이는 아니었다. 그가 헤맨 까닭은 처음 길을 물어보았던 현지인으로부터 전혀 엉뚱한 곳을 륙성촌으로 잘못 전해들었기 때문이었다. 외따로 있는 작은 마을에서 음료수를 사면서 그는 제대로 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고, 륙성촌을 향한 정확한 방향을 잡아나갔다.
작은 구릉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륙성촌에 도착했을 땐 오후 5시 30분을 넘겨 버렸다. 다행스런 것은 그나마 해가 남아있어 사진을 찍고 동영상 촬영을 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 1930년대 륙성청년농민학교 전경.

마을 초입에 륙성농민청년학교가 있었다.
포석이 조선어 교사로 고려인들을 가르쳤던 그 학교는 완전히 폐허로 남아 있었다. 폐허로 변한 그 학교에서 우리는 세월의 무상함보다 역사의 냉혹함을 느껴야 했다. 독일인이 건축을 맡았었다는 륙성농민청년학교는 매우 튼튼하고 견고하게 지어졌다. 우스리스크로부터 벽돌을 마차에 실어 날랐고, 교실 하나하나에 정성을 기울여 비용이 꽤 많이 투입됐었다고 한다.
그 튼튼한 골조가 제 구실을 해 아직까지 건물 외관은 그런대로 봐줄만 했다. 하지만 교실 안으로 들어가자 마치 흉가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창문은 부서지고 벽은 허물어지고, 문은 뜯겨나갔다. 바닥은 온통 건축 폐자재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사단은 폐허가 된 교실에서 ‘아름다운 꿈’들을 보았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소련의 강제 이주정책과 학교 폐쇄 방침을 감안하면 1937년 정도로 추정되지만, 그 오랜 시간을 버텨낸 그때 아이들의 그림들이었다. 교실 벽에는 토끼 그림도 있고, 거북 그림도 있고, 꽃 그림도 있었다. 마치 선사시대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보는 양,아이들이 그렸을 그 그림은 아직도 선명한 제 색깔을 간직한 채 답사단에게 묘한 감흥을 안겨 주었다.

▲ 교실에 그려진 그림들. 1937년 강제 이주가 시작됐으니, 어림잡아도 80년 전에 그려진 그림일 것이다.

학교 뒷편으로 자그마한 산이 자리잡고 있었다. 교사(校舍) 주변에 아무렇게나 자란 큰 나무들로 인해 그 산을 주목하지 못했었는데, 학교 마당에서 뒤편을 바라보니 선명하게 와 닿았다.
‘등탑봉’이었다. 등탑봉은 조명희 선생이 직접 이름 지은 산이다. 등탑봉은 포석에게 있어 매우 의미있는 공간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포석은 으레 등탑봉 산책로를 따라 오르며 많은 상념의 시간을 가졌고, 후일 아내로 맞이하게 되는 황 마리아의 남동생 황동민 교수를 그 산책로에서 만나게 됐다.
등탑봉과 포석의 연(緣)을 포석의 제자 최 예까떼리나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조명희의 아들 조 미하일이 하바롭쓰끄 국가안전위원회(KGB)에서 총살당하기 직전에 찍은 아버지의 사진을 얻어냈다.
얼마 전에 조명희선생의 손자 김 안드레이는 할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북도에서 흙을 가져왔다. 그 흙은 조명희의 딸 조 발렌티나와 둘째 아들 블라지미르에 의해 하바롭스크시에 있는 스탈린 시대에 총살당한 사람들의 무덤 위에 뿌려졌다. 그들은 무덤 기념비 앞에서 찍은 사진을 타슈켄트 조명희 박물관에 걸어놓았다. 우리 제자들은 감옥에서 찍은 조명희선생의 사진을 보고 이렇게 회상하였다.
봄이 되면 ‘등탑봉’에는 살구꽃이 활짝 피어 분홍빛을 옷을 입고 산꼭대기에는 그 지방 사람들이 천지꽃이라고 부르는 진달래꽃이 붉은 빛을 내여 피어나는데 산은 마치 새아씨가 결혼식 날에 분홍색 옷을 입은 것같이 아름다웠다.
산과 학교마당은 삐오녜르(소년단원, 여기서는 학생)로 가득 찼다. 그곳에서는 최 아가피야가 하나, 둘 하나, 둘 하며 삐오네르들을 체조시키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은 체조를 하다가 쟁쟁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 중에서 조명희와 김호준이 쓴 동화극 「봄나라」를 부르기 좋아하였다.

▲ 학교 건물 뒤 오른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것이 등탑봉이다. 포석은 자신이 이름 지은 등탑봉에 오르기를 즐겨했다. 등탑봉은 그에게 사랑과 열정과 사색의 공간이었다.

봄이 왔다 왔다 봄이 왔다.
남쪽나라 봄님이 봄님이
옛동산이 그리워서 그리워서
빨리빨리 달아온다 달아온다.

봄이 왔다 왔다 봄이 왔다.
높고 낮은 산 넓은 뜰에도
아지랑이 금실타고 금실타고
늠실늠실 날아온다 날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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