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 삶의 종국… 그 비극의 하바로프스크로 향하다

▲ 하바로프스크 거리. 아무르강을 끼고 있는 도심은 깨끗하고 비교적 한적한 편이다.

(동양일보 김명기 기자) 잠결에 호텔 룸 전화기가 아득히 울려왔다. 꿈결인 듯싶었는데 두 번째 신호음이 들렸다.

화들짝 깨어났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조철호 단장이었다.

“김 부장, 일정이 바뀌었는데… 김 교수가 비행기 티켓을 다시 확인해 보니 하바로프스크행 출발 시간이 오전 8시로 돼있어요. 티켓 확인 안 했으면 큰일 날뻔 했어. 지금이 새벽 1시 30분 쯤 됐으니까, 3시간 쯤 자 두고 새벽 4시 30분엔 기상해야 될 게야. 차분히 짐 챙기고 5시에 호텔 로비에서 보자고.”

“다른 단원들에겐 제가 전화 드릴까요?”

“아냐, 내가 다 해놨어요. 시간 일정 그렇게 하자고.”

등골에 서늘한 땀이 흘렀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조금은 미심쩍은 마음에 김 교수에게 비행기 티켓을 확인하라고 몇 번을 당부했는데, 우려가 현실이 됐다. 호텔 밖으로 나왔다. 지금 잠을 자면 제 시간에 깰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하늘에선 이따금씩 빗방울이 흩뿌려지고 있다.

 

▲ 답사단이 묵고 있는 하바로프크스 아리랑호텔로 ‘깜짝방문’을 한 조 블라디미르(왼쪽서 네번째)씨에게 김태수(맨 오른쪽) 진천군청 문화체육과장이 포석 조명희 기념관 건립 진척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9월 5일 답사 4일차, 새벽 5시.

호텔 로비로 답사단원들이 하나 둘 모였다. 다들 피곤이 채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사흘간 강행군의 일정을 답사단원 모두 묵묵히 수행해 온 때문이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따금 흩뿌렸던 빗방울이 이젠 장대비로 변해 있었다.

호텔 체크 아웃을 하고 5시 20분께 도착한 승합차에 짐을 실었다. ‘스마트한’ 젊은 운전기사 대신 늙수구레한 기사로 대체돼 있었다. 일정이 급작스럽게 변경된 탓에 ‘대타’로 나온 기사였다. 따지고보면, 일정이 급작스럽게 변경된 것이 아니라 변경된 일정을 급작스럽게 알게된 것이 옳은 말이었다.

승합차는 곧바로 블라디보스토크공항으로 향했다.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심통이라도 부리듯 더욱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이제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하바로프스크로 향한다. 떠나기 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해 본다.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는 블라지보스또크, 울라지보스또크, 해삼위, 해삼시로도 불린다.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로 행정구역은 연해주이며 1860년 설립됐다.

2013년 현재 인구 62만5868명, 광역인구 92만8878명, 면적은 331.16km²에 이른다.

러시아 극동의 군사기지이며 연해지방의 행정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토크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시발점이며,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의 문호이기도 하다. 한국 총영사관이 주재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태평양 함대의 모항이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해군함들이 친선 사절로 온다. 주된 산업은 조선업과 포경·게 등 어업, 어류·해산물 가공업, 군항 관련 산업이다. 선박수리, 목재가공, 식료품 공업도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라는 도시 이름은 ‘동방을 정복하라’라는 뜻.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주요 민족이다.

1958년에서 1991년까지는 소련 국적을 가진 사람들만이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고 방문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폐쇄된 도시가 되기 이전 이 도시에는 고려인과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 자행된 강제이주 정책의 희생양이 되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쫓겨났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역사는 1856년부터라 할 수 있다.

1856년 러시아인이 발견한 뒤 항구와 도시의 건설이 시작되었고, 1872년 군항도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1890년대부터는 무역항으로서 크게 발전했고 1903년 시베리아 철도가 완전히 개통됨으로써 모스크바와도 이어지게 되었다.

2012년 9월 8일부터 이틀간 24차 APEC 정상회의가 블라디보스토크의 루스키 섬에서 개최되었는데, 러시아 정부는 이 회의를 위해 길이 3.1km의 4차선 도로인 블라디보스토크 대교(大橋)를 건설했다. 시내와 루스키 섬을 잇는 세계 최장 사장교(斜張橋)이다.

 

▲ 하바로프스크 공항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답사단원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으로 가면서 답사단은 하바로프스크에서의 일정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9박10일간의 일정에서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륙성촌 포함), 하바로프스크는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포석이 소련으로 망명하여 활동했던 무대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곳 연해주 지역의 일정 또한 6박7일로 잡혀져 있었다.

▲ 알렉산드르 파제예프(1901∼1956년). 소련 작가회의 회장을 역임했고, 러시아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그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작가다. 조명희 선생이 하바로프스크 ‘작가의 집’에서 거주하고 있을 당시 옆집에 같이 살았다고 한다.

특히 하바로프스크는 포석이 스탈린 당국으로부터 일제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총살형을 당한 곳이었다. 뿐만아니라 포석의 삶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로 기록될 수 있는 곳이었기에 그 의미가 각별하다 할 수 있었다. ‘작가의 집’에 거주하던 포석은 황명희 사이에 막내 조 블라디미르를 그곳에서 낳았다.

작가의 집은 포석의 가족 뿐만 아니라 당시 소련에서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던 알렉산드르 파제예프(1901-1956)가 함께 살고 있었다. 파제예프는 소비에트 작가협회 회장을 역임한 인물로 러시아 교과서에 등장할 정도로 그 문학적 성과를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파제예프에 대한 이야기는 작가의 집 탐방 때 다루기로 한다.

 

빗길 운전이라 노면이 미끄러웠다. 새벽인 탓인지 8차선 도로에는 운행하는 차량들이 많지 않았다. 늙수구레한 운전기사는 시속 100㎞ 이상으로 달렸다.

답사단은 변경된 일정에 대해 이야기 했다. 재차 삼차 일정 확인을 다짐하지 않았다면, 김 교수가 그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면 큰일날뻔 했었다. 하바로프스크에서의 답사 일정에 대해서도 희망섞인 기대감을 가졌다. 그곳이야말로 포석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기에 일정에 대한 꼼꼼한 점검도 빼놓지 않았다.

호텔에서 공항까지 3분의2 정도 거리를 달렸을까, 그 대로에서 답사단은 큰 사고를 당할 뻔했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거센 빗줄기로 변해 있었고, 시야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운전기사는 뻥뚫린 도로를 과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일행의 시야에 앞서 달리던 차량이 크게 클로즈업되어 나타났다. 약간의 내리막길에서 급경사로 오르막이 시작되는 부분이 많은 비로 인해 도랑처럼 철철넘치고 있었다. 앞 차량이 갑자기 닥친 물길에 급서행을 하자 연쇄적으로 우리 차량도 급서행을 시도했다. 그러나 수막현상으로 제동은 되지 않고 차량이 그대로 쭉 미끄러져갔다. 핸들 조작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앞 차량을 피해 좌측으로 핸들을 꺾자 반대편 차선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방호벽이 나타났다. 운전기사는 다시 또 오른쪽으로 핸들을 급히 꺾었다. 방호벽을 들이박을 듯했던 차량은 다시 앞 차량의 뒷범퍼와 충돌할 듯하다 가까스로 멈춰섰다. 마치 순항하던 배가 이리저리 휩쓸리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진 것이었다.

답사단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운전기사는 더욱 놀란 표정이었다. 만약 사고가 났다면 일정에 차질을 빚을 것은 말할 나위없이, 인명피해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대형사고였을 것이었다.

“포석 선생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는가 봅니다.”

“세옹지마라고, 액땜한 셈 치면 앞으론 좋은 일만 있지 않겠어요?”

답사단은 서로를 그렇게 위로하며 위기를 모면한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하바로프스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일행이 묵을 숙소는 아리랑호텔이었다. 고려인이 운영하는 곳인데, 나쁘지 않은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관리는 영 엉망이었다. 누군가 “호텔 사장이라는 양반 한국 한 번 다녀와야겠구먼. 그러면 서비스가 뭔지, 손님을 어떻게 맞아야 하는지 앗 뜨거, 하면서 알게 될거야”라고 입바른 소리를 했다.

답사단은 여장을 풀고 호텔 로비에 모였다. 그곳에서 우리 일행은 너무도 반가운 분을 만나게 됐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손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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