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설핏하면 아낙들이 샘가에 모여 앉아 보리쌀을 씻고, 초가집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던 아늑한 곳, 밤이면 개가 짖고, 집집마다 아기들 웃음과 울음소리 정겹던 곳, 동이 트면 장닭이 홰를 쳐 사람들을 깨워 주던 곳.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곳을 우리는 고향이라 한다. (‘어머니, 그 고향의 실루엣’ 중에서)’

아스라이 멀어져간 지난 세기의 흔적, 그 아릿하지만 그립고 정겨운 추억들이 책으로 담겼다.

김운기(78·사진) 사진작가가 최근 사진집 ‘어머니, 그 고향의 실루엣’을 발간했다. 십대 후반 사진관에 드나들며 어깨 너머로 사진을 익히기 시작해 60여년 간 사진작가를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온 그의 작품 중 정수를 만날 수 있다.

저자는 36년 간 사진기자로 활동하며, 뉴스 현장을 좇는 한편, 틈만 나면 자전거를 타고 교외로 나가 농촌 공동체와 마을의 풍경을 흑백 사진으로 기록해왔다. 농촌과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앵글은 토속적이며 한국적 조형미를 구현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김 작가는 “뒤돌아보면 불과 반세기 전, 아름답던 금수강산 우리의 터전이던 농공사회가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많은 것이 달라지고 많은 것을 잃기도 했다”며 “나는 그 시대를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체험하고 눈여겨보면서 아주 작은 기록이나마 사진으로 담아 왔다”고 밝혔다.

책은 그리운 어머니의 모습을 앵글에 담은 ‘어머니, 영원한 본향’, 우직하게 땅과 벗하며 고향을 지키던 농부들의 모습을 담은 ‘정답던 농촌’, 천진난만한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소재로 한 ‘어린 시절’ 등 3부로 나뉜다.

고향은 그에게 곧 어머니다. 책에서는 서른 살에 남편을 잃고 3남매를 대학까지 보낸 방물장수 할머니, 산골로 시집 와 30년 간 화전을 가꿔 온 화전민의 아내, 30kg짜리 숯 한 포를 머리에 이고 20리 길을 걸어가 숯을 팔던 아주머니 등 지금은 보기 힘든 옛 시절 어머니의 모습들을 만날 수 있다.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 속에 늘 가난에 허덕이던 시절이었지만 어머니의 모습은 구김 없이 밝고 맑다. 남루한 삶을 강인하게 이겨낸 어머니들의 순박한 미소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저릿하게 한다. 작품마다 제목, 촬영 장소, 촬영 연도와 함께 사진과 얽힌 사연, 저자의 생각이 담겨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김 작가는 “그동안 촬영해 온 사진을 모아 책으로 재구성, 지난 세월을 살아온 어머니들의 모습, 땅을 가꿔 온 농부들, 티 없이 밝게 자라며 뛰어놀던 아이들의 모습을 담았다”고 밝혔다.

문상욱 사진가(전 충북예총 회장)는 “이 작품집을 통해 오늘날 냉혹하고 차가운 현실 속에서 따스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선생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며 “선생의 사진은 박물관에 박제돼 생명력을 잃은 전시물이 아니라 감상자에게 언제나 끊임없이 감동을 주는 활기찬 사진”이라고 평했다.

김 작가는 1937년 강원 김화 출생으로 한국사협 충북지회장·청주지부장 한국사진기자회 지방협의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대청댐, 그때 그 사람들’, ‘소백산’ 등이 있으며, 현재 충북대 평생교육원 사진강사로 김운기사진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눈빛출판사. 212쪽. 3만5000원.

<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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