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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12>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12>
  • 김명기 기자
  • 승인 2014.12.28 19: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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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한 끼 먹자고 나선 길이 ‘고난의 행군’으로

(동양일보 김명기 기자) “구 소련시대에 우리는 한국에 대한 지식이 없었어요. 스탈린이 정책적으로 한국어를 못쓰게 했고, 교육 또한 받지 못했죠. 그러다보니 타향으로 가 사회생활을 했던 우리로서는 한국 문화와 전통 등에 대해 알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죠. 유감스럽게도 포석 후손들은 유럽적인 지역에 살기 때문에 그 환경에 동화돼 갔다고 할 수 있지요. 한국말을 잃고 한국의 전통을 잃고 한국의 뿌리를 잃어갔던 것이 한인 이주 역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한국과 활발한 교류가 이뤄지고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고 여러가지 정보를 얻게 되면서 고국의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열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내년 초순 포석의 고향 진천에 개관 예정인 ‘조명희 문학관’을 위해 20만 달러(한화 2억2000만원)를 선뜻 기부했다.

그게 무어 대단한 일이냐고 한사코 의미 부여를 마다하던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

“조명희 선생 후손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작은 도리를 했을 뿐입니다. 제가 기부한 돈이 포석 기념사업에 작은 기여라도 했으면 하는 바랍입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 자식으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한국에서 포석 조명희 선생에 대한 재조명이 일어나는 의미있는 종자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일 뿐입니다.”

- 동양일보 9월 14일 1면 ‘뉴스의 인물’

 

조 블라디미르는 포석 조명희 선생을 빼닮았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불행했던 것은 부친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라 말했다.

아버지 없이 살아 온 그 삶이 어찌 아니 힘들고 애닯지 아니 하겠다 하겠으련만, 그래도 포석의 후손으로 남으로부터 손가락질 받지 않고 러시아에서 크게 번성한 가문으로 사회적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보람과 긍지도 그는 갖고 있었다.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행복했던 삶이었습니다. 내년 5월에 기념관이 오픈한다는데, 그때 올 것입니다. 모든 후손들이 모일 것입니다. 손자, 손녀들까지 모두. 고맙습니다, 노력을 많이 해 주셔서.”

블라디미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김태수 진천군청 문화관광과장이 포석 조명희 기념관에 대해 간략한 브리핑을 했다.

“조명희 선생 생가터 뒷편 산에 건립하게 됩니다. 공사는 올해 마무리될 예정이고, 오픈은 내년 5월께로 계획돼 있습니다.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인데, 옥상까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계획입니다. 가령 소공연이나 시낭송회, 작은 음악회 등을 열 수 있는 공간이 충분히 됩니다. 블라디미르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20만달러는 진천군에서 잘 보관하고 있고, 향후 포석 기념관과 관련된 일에 유용하게 쓸 계획입니다.”

김 과장의 간략한 브리핑을 들은 블라디미르는 그 노고에 대해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사실 블라디미르는 러시아에서 건설설계 관련 전문가로 일했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공사 과정을 잘 알고 건설 과정에서 생기는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 하바로프스크 명예광장 뒤편에 위치한 러시아 정교회 사원인 트랜스피구레이션 성당(St. Transfiguration Cathedral). 중앙 거리에서 두 블록 정도 떨어져 있는 이 사원의 광장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다. 성당의 황금빛 돔은 아무르강의 어느 곳에서나 아름다운 그 자태를 볼 수 있다.

오랜만에 한식을 먹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대체로 현지식에 잘 적응하고 있는 답사단이었지만, 길 떠나면 몸 고생이고 집 떠나면 집밥 먹고 싶은 마음 간절한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

김 교수가 한식을 잘 하는 곳을 알고 있다고 해서 찾아 나섰다. 그런데 점심 한 번 먹으러 떠날 길이 또 다시 ‘고난의 행군’이 될 줄이야.

낮 12시에 아리랑 호텔을 나온 일행은 김 교수의 안내에 따라 왼쪽 편으로 난 언덕배기 길을 잡았다. 김 교수에 따르면 그 언덕배기 너머 10분쯤 거리에 아무르강이 있고, 그 강가에 있는 호텔 식당에서 여유롭고 우아하게 한식으로 된 점심식사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언덕배기를 넘어서자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을 나눈 길들이 쫙 펼쳐졌다. 확 트인 시야에 넓은 강이 보일 것이란 기대감이 있었지만, 강은 보이지 않았다.

걸어서 10분이면 된다던 곳이 30분을 걸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일행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점차 높아져 갔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겨? 오늘 안으로 먹기는 먹는 겨?”

륙성촌에서 겪었던 일이 생각났다. ‘이 길이 아닌게벼, 아까 길이 맞는게벼’ 타령을 또 다시 하게 됐다.

그러니까 김 교수가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놓았던 하바로프스크 지도는 실제 도시 지형과달랐던 것이었다.

 

걷고 또 걸었다. 무엇보다 연세드신 분들의 체력이 걱정됐다.

1시간 정도를 걸은 후에 전차가 다니는 길을 찾았다. 낡고 노후한 전차는 영화 ‘장군의 아들’ 촬영 세트장을 그대로 재연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하바로프스크역까지 온 뒤 일행은 전차에서 내려 다시 시내버스를 탔다. 차량 내부를 무심히 보던 일행은 익숙한 글씨를 찾게 됐다. ‘승객 여러분의 불편한 사항을 적어 달라’는 민원소리함이 설치돼 있었던 것이다. 수원시에서 만든 것이었고, 대우에서 제작한 차량이었다. 그걸 떼지도 않고 그대로 운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수원시가 객지 하바로프스크에서 큰 고생 하는구먼” 하고 말하자 미로찾기 먼길에 짜증났던 일행이 까르르 웃었다.

시내버스에서 내리자 아름다운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명예광장 뒷편에 위치한 러시아 정교회 사원인 트랜스피구레이션 성당(St. Transfiguration Cathedral), 그 우아한 자태가 답사단을 맞았다.

중앙 거리에서 두 블록 정도 떨어져 있는 이 사원의 광장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다. ‘영광의 광장’으로도 불린다. 성당의 황금빛 돔은 아무르강의 어느 곳에서나 보일 정도로 하바로프스크에서 제일 좋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아무르강을 왼편으로 끼고 또 걸었다. 20여분을 걸은 후에야 점심 한끼 먹고자 했던 호델이 나왔다. 한식으로 점심 먹자고 2시간 넘게 강행군을 벌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연로하신 분들의 체력이 바닥까지 이르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호텔 중식비는 1인당 2만원에서 3만원 정도 됐다.

조철호 단장이 그 값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돈을 허투루 쓸 일이 아녜요. 너무 비싸. 좀 더 싼데 찾아 보자구.”

조 단장은 답사일정 내내 일행들이 돈을 흔전만전 쓰지 않도록 경계했었다. 그렇다고 딱히 궁색하고 초라하게 끼니를 떼우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쓸데는 쓰되, 사치와 낭비는 가려야 된다는 생각일 터였다. 검소한 듯하면서도 기분은 다 내는, 늘 유쾌한 식사가 이어졌었다.

투어리스트로서의 기본 덕목이랄까, 아끼며 쓰는 즐거움을 조 단장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할 일을 남에게 미루는 법이 절대 없었다. 또한 좌중을 휘어잡고 이야기를 주도해 나가며 온갖 화제에 박학한 ‘말씀’을 풀어낼라치면,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때론 웃다 때론 울고 때론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거리기 바빴다. 여행자로서의 장점이 많다는 것이 그를 매력있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을 이번 답사를 통해 알게됐다.

답사를 떠나면서 신경써야 할 부분을 크게 세가지로 잡았었다.

첫번째, 동행기자로서의 취재기 메모. 두번째, 답사 행로에 맞춰 포석 기념관에 쓸 동영상 촬영. 세번째, 조 단장을 비롯한 나이드신 세 분에 대한 케어. 이밖에도 틈틈이 사진을 찍고, 일정을 체크하고 조율하며, 포석과 관련된 자료들을 채록하고 분석하는 등 잡다한 것들이 있었지만 크게 신경가는 부분은 아니었다.

김왕규씨 부부는 물론이었고, 조 단장은 여행을 하면서 챙겨야 하는 번잡스럽고 잡다한 일들을 스스로 해결해 나가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특히 연세에 어울리지 않게 욕실에서 손수 깨끗하게 손빨래하는 것을 즐겼다.

케리어라도 옮기려 거들라치면 “김 부장, 나한테 절대 신경쓰지 말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요. 자네 일도 많을테니 그것들 챙기는데 신경 쓰도록” 하며 손사래를치곤 했었다.

▲ 아무르강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답사단. 왼쪽부터 동양일보 김명기 부장(필자), 김 안드레이 전 타시켄트대 교수, 포석의 유족 김왕규씨, 나순옥 포석기념사업회장, 김왕규씨 부인 김흥남씨, 포석의 막내아들 조 블라디미르,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 김태수 진천군청 문화체육과장, 곽동환 진천군청 담당직원, 조성화 열린기획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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