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원(청주시 청원구 기획감사팀장)

 

조선 말기에 세도정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리고 당시 사회가 몹시 어지러웠다는 것도 다들 알고 있다. 세도정치 시대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요즘 돈으로 한 5억쯤 쓰고 어떤 고을에 목민관 자리를 얻었다. 난생 처음 관직에 기분이 늘어져 수차 축하 잔치를 벌이고는 부임지로 갔다. 한데 원래 공석이었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떠억하니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가 뇌물을 바치고 다음날 다른 이가 한 10억쯤 되는 뇌물을 바쳤다. 일가친척의 재산까지 끌어 모아 뇌물을 마련했던 다른 이는 관직을 얻자마자 부임지로 향했다.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목민관 감투로 고을 주민들의 재물을 끌어 모으려는 생각에 하루가 급해서 말이다.

정약용은 세도정치 기간 중 전라도 강진의 유배지에서 ‘목민심서’를 썼다. 이것은 한국인이면 대부분 아는 일이다.

그런데 정약용 자신은 목민관 생활을 거의 하지 않았다. 정조 임금의 두터운 신임으로 관직생활 대부분을 중앙 부서에서 지냈다. 하여 목민관으로는 짧은 기간 황해도 곡산의 부사 직분을 수행했을 따름이었다. ‘목민심서’ 제목을 풀이하면, ‘목민관의 마음가짐에 관한 글’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인터넷에서 정약용의 이력을 검색하면, 이런 생각이 들 만하다. ‘목민관의 맛만 봤던 사람이 뭘 안다고….’

정약용은 학문이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기도 수원에 화성을 축조할 때에는 무거운 돌을 공중으로 끌어올리는 거중기를 발명하기도 했다. 그런 정약용이 정조 사후 관직에서 쫓겨나 18년에 이르는 긴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목민심서’는 그 18년 유배가 풀리는 해에 원고 작업이 끝났다. 민생을 개선시키고 싶은 욕구가 누구보다도 강열했던 사람이 민간인 신분으로 지방에서 세도정치의 폐단을 목격했다. 어이없고, 기가 막히고,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한 일들이 숱하게 벌어졌으리라.

당시 정약용이 들었던 얘기 중에는, 자식 낳아봤자 조세만 늘어난다며 생식기를 돌로 내리쳤다는 처절한 사연도 있었다. 관이 믿고 의지할 언덕이기는커녕 힘으로 주민들을 억누르고 그나마 가진 것을 빼앗는 기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약용은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 바람직한 목민관의 상을 제시하려 ‘목민심서’를 집필했다. 그 ‘목민심서’의 내용이 방대한 것은 정약용이 어이없고, 기가 막히고,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한 일들을 직접 경험했고, 생생한 증언을 들었던 결과였다. 목축, 유목, 목동의 목(牧), 예배당에서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니’ 라고 할 때의 목(牧), 목민관의 목(牧)은 한자로 같은 글자다. 기른다, 보살핀다, 이끈다 등의 의미로 쓰는 목이다,

지금 현재 지자체 선거에서 군수, 시장, 도지사 후보가 ‘당선되면 나는 주민들의 목자로서’ 라고 연설했다가는 욕 얻어먹기 십상이다. 주민이 주인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방 행정을 담당한 공직자에게 ‘주민을 보살펴야 하는 책무’는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내려놓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주인이기에 더욱 알뜰살뜰 보살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정약용이 지방관을 목민(牧民)으로 표현한 취지가 그러했으리라.‘세 모녀 법’을 만들기 이전에 보살핌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있는가, 세심히 살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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