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희돈 청주대 명예교수

17.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 갔구나! (정지용 시 ‘유리창’ 전문)

위의 시 ‘‘유리창’은 시인이 29세 되던 해 잃어버린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견고한 이미지로 그려 낸 작품이다. 자식을 잃은 젊은 아버지의 비통한 심경을 주제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절제된 언어와 시적 형상으로 객관화한 점이 인상 깊다. 밤에 유리창 앞에서 잃어버린 자식을 그리워하는데, 유리창 너머의 ‘밀려와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는’ 무한한 어둠의 세계와 시인의 허전하고 괴로운 마음이 대결적으로 작용한다. 기운 없이 불어낸 입김 자국이 쉽게 사라지는 모습에서 가냘픈 새의 모습을 연상한다. 그 ‘새’는 바로 허망하게 시인의 곁을 떠나 버린 아이의 비유적 형상이다.’ (김윤식 평론가 해설) 언 날개의 이미지에서 아들을 연상하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아들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눈물 흘리고 결국은 산새처럼 날아갔음을 인정하면서 아들을 잃은 상실의 슬픔을 언어미학으로 승화시킨다.

더러는/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흠도 티도,/금가지 않은/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더욱 값진 것으로/드리라 하올 제,//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김현승 시 ‘눈물’)

이 시는 시인이 어린 아들을 잃고 어느 날 문득 쓴 시라고 한다. 시인은 ‘가슴의 상처를 믿음으로 달래려고 그러한 심정으로 썼다’고 창작동기에서 밝히고 있다. 그 믿음의 심정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을 신에게 바치는 심정이다. 그것은 옥토에 떨어지는 생명이며, 흠 없이 순수하고, 나의 전체인 눈물이다. 인간이 신에게 드릴 최후의 것은 신 앞에서 흘리는 눈물인 셈이다. 꽃이 시든 후에 열매를 주시듯 웃음 뒤에도 새로이 지어주시는 눈물이다. 새로이 주시는 눈물이므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윤동주 시 ‘팔복(八福)’)처럼 슬픔이 진행될수록 복이 깊어진다. 슬픔이 눈물처럼 투명하고 빛나는 가치임을 역설적으로 받아들인다. 이 받아들임은 슬픔의 극복 의지이며, 슬픔을 눈물로 녹여내는 초극의 이미지이다.
박완서는 자신의 소설 제목에 ‘눈물’의 한 구절을 차용한다. 그녀는 한 때 외아들을 잃고 혼절의 상태에 빠졌었다. 한국문단을 선두에서 이끌던 자존감도 페미니스트 작가로서의 명망도 모두 뒤로 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하느님과 직접 대면한다.(‘한 말씀만 하소서’) 그 후 수도원을 나와서 다시 창작을 하게 되는데, 그때 나온 작품이 바로 중편소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다. 그녀는 슬픔의 덩어리는 결국 작품으로 풀어버린 셈이다.
이 소설은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손위동서에게 전화로 푸념을 하는 형식으로 꾸며졌다. 혼자 무대 위에서 두 시간여 독백을 하는 어머니의 푸념이라고 상상하면 이해가 쉽겠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눈물로 녹여내는 치유의 모범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들을 잃고 나서 어머니에게 큰 변화가 온다. ‘지금까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하나도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은 것이 중요해졌다. 전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중요했는데 이젠 내가 보고 느끼는 나가 더 중요하다. 전엔 장만하는 게 중요했는데 이젠 버리는 게 더 중요해졌다.’ 
소설의 끝자리에 이르러 어머니의 울음이 터진다. 내면에 차곡차곡 쌓였던 울음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꾸며 왔던 지난 세월이 모두 눈물에 녹아 떠내려간다. 눈물은 단단하게 뭉친 응어리를 녹이고 슬픔을 정화시킨다. 그 눈물은 마침내 손위동서에게도 그대로 전이된다. 위엄을 일관되게 가장해 왔던 손위동서가 비로소 슬픔을 슬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전화통에 대고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함께 울고 있다. 이들의 눈물은 그대로 독자에게 감염된다. 눈물로 너와 내가 함께 이루는 공감과 치유의 소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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