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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5>
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5>
  • 김명기 기자
  • 승인 2015.06.14 1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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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운동 주도하다 일경에 발각, 3개월 옥고 치러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 선언을 세계 온 나라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크고 바른 도리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후손들에게 깨우쳐 우리 민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길이 지녀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半萬年(반만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 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此(차)를 佈明(포명)함이며,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여일)한 自由發展(자유발전)을 爲(위)하야 此(차)를 主張(주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의 發露(발로)에 基因(기인)한 世界改造(세계개조)의 大機運(대기운)에 順應幷進(순응병진)하기 爲(위)하야 此(차)를 提起(제기)함이니, 是(시) 天 (천)의 明命(명명)이며, 時代(시대)의 大勢(대세)며, 全人類(전인류) 共存同生權(공존동생권)의 正當(정당)한 發動(발동)이라, 天下何物(천하하물)이던지 此(차)를 沮止抑制(저지억제)치 못할지니라.

반만년이나 이어 온 우리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된 마음을 모아서 이 선언을 널리 펴서 밝히는 바이며, 민족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며,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인류적 양심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올바르게 바뀌는 커다란 기회와 운수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워 보이는 것이니, 이 독립 선언은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민족 자결주의에로 옮아가는 시대의 큰 형세이며 온 인류가 함께 살아갈 권리를 실현하려는 정당한 움빅임이므로 천하의 무엇이든지 우리의 이 독립 선언을 가로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 독립선언서 이하 생략.

 

처음 계획은 오후 2시에 태화관과 300여미터 떨어진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거사를 일으킬 것이었다. 그러나 민족대표 29인은 이미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 전화를 걸어 자진 연행돼 갔던 까닭에 그들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탑골공원에 모인 1000여명의 학생들은 처음엔 당황했으나 이내 마음을 추슬러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 숨죽여 있던 금기어(禁忌語)를 억눌려 있던 마그마를 분출하듯 활화산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조선독립만세!”

만세 시위 군중은 두 갈래로 나뉘어 행진했다. 한 갈래는 종로 보신각을 지나 남대문 쪽으로, 또 한 갈래는 매일신보사 옆을 지나 대한문을 향하였다.

그들의 손에는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시위 행렬엔 수만명의 시민들이 가담했다. 서울은 흥분된 군중의 만세소리가 넘쳐났다. 그 소리는 거센 바람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오후 6시 진남포, 선천, 안주, 의주, 원산, 함흥, 대구 등지에서 연쇄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그 다음날에는 전국 방방곡곡에 독립만세와 시위 운동이 거스를 수 없는 거센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3.1운동의 만세 함성은 진천 벽암리에서 독서에 골몰해 있던 포석에게도 전해졌다.

3월 2일 청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11일 쯤에는 청주농업학교에서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메마른 봄 들판에 불붙듯 번지고 있는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포석은 적극적인 거사를 계획했다.

포석의 맏형 조공희(趙公熙)는 조국의 망국적 운명을 개탄하며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 칩거한 인물이었고, 포석 자신 또한 그런 가정의 영향을 받아 나라를 구한다는 거대한 명분으로 북경사관학교에 들어가려다 둘째형 경희에게 붙잡혀 온 ‘전력(前歷)’이 있던 것을 비춰보면 당연스런 일이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은 그에게 손놓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뜻이 맞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조직을 꾸리고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진천은 일찍부터 성공회 계열의 교육기관인 신명학교가 설립돼 있었던 까닭에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현실을 깊이 부끄러워하고 큰 일을 도모하고자 하는 이들이 적잖았다. 그런 지역적 환경으로 일은 어렵지 않게 추진됐다.

3월 15일, 포석은 진천장터에서 그동안 준비해왔던 태극기를 나눠주고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분출하는 깊은 목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이 일은 일경(日警)에 사전 발각돼 ‘시위기도’에 그치고 말았다.

이 일로 체포된 포석은 3개월간 투옥생활을 하다 출감하게 된다.

 

앞 글은 포석과 관련된 팩트(fact)의 조각들을 모아 재구성해 본 것이다. 그러나 포석이 진천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는 것과 일경에 체포돼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는 것은 사실이 확실해 보인다.

첫째, 그 당시 상황과 전개과정을 직접 보았던 포석의 조카 우봉(牛峰) 조중협(趙重浹) 등 집안사람들의 일관된 증언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중협씨의 아들 성호·철호씨도 일관된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고, 포석의 첫째 부인의 장녀인 중숙(重淑)씨와 그녀의 아들인 김왕규씨 또한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적어도 조명희 가계(家系)에서는 포석의 3.1운동이 명확한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둘째, 황동민(5)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교수의 이와 관련된 진술이 있다. 역사학자이자 조명희문학유산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황 교수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만든 ‘조명희 선집’의 서문인 ‘작가 조명희’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3.1운동은 일제의 잔인무도한 무장 탄압에 의하여 진압되었고 수 만명의 우수한 조선인의 아들과 딸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조명희 역시 다른 애국적 청년들과 같이 투옥되었으나 감옥에서도 그는 조국의 해방과 인간의 자유를 위하여 원수에게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는 굳센 정신과 투지를 가지고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는 수 개월의 구금 생활 후 석방되었다. -황동민 ‘조명희 선집’ 서문, 1959년.

셋째, 이기영(6)의 진술. 이기영은 1959년 발간된 ‘조명희 선집’에 싣는 특별기고문을 1957년 1월에 썼는데, 3.1운동과 포석의 관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19년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 당시, 조명희는 자기의 고향에 있었다. 그는 청년들을 이 폭풍과 같은 봉기에 불러 세우는데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3.1운동이 일제의 잔인무도한 무장 탄압에 의하여 진압되자 그는 계속 고향에서 문화 계몽운동을 위한 순회연극을 군내에서 하였다. -이기영, 조명희선집 특별기고, 1957년.

넷째, 일경이 작성한 ‘일차보고(日次報告)’(도표 참조) 내용을 보면 포석과 3.1운동의 개연성이 나타나고 있다. 일경의 ‘일차보고’는 일경이 그날그날의 만세운동 상황을 상부에 보고했던 내용이다. 따라서 조금 더 정밀한 내용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가 쓴 논문에 따르면 충북에서는 최소 35회의 만세시위가 일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발간 ‘중원문화연구’에서 박 교수는 35회 만세시위가 일어났던 도표를 제시하며 “그러나 이 자료도 누락된 것이 많다. 우리 측 자료는 물론 일제 측 자료에서도 소규모 인원이 모여 단순히 만세를 외친 경우, 일제 군경이 출동하지 않고 시위 후 자진 해산한 경우, 경찰이나 헌병주재소와 멀리 떨어져 있어 일제가 뒤늦게 파악한 경우 등은 통계에서 제외되었다. 따라서 3.1운동 관련 통계는 우리나 일제 측 자료 모두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것이다. 필자가 종합한 바에 다르면 도내 각 군에서 최소한 50회 아상의 만세시위가 발생했음이 확실하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 볼 부분이 박 교수가 산재돼 있던 자료를 모아 만든 도표 중 3월 15일 부분이다. 이날 시위는 군중수나 출동병력, 발포개소, 사상자 등이 명기돼 있지 않다. 사전에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고란에 보면 ‘보통학교 학생 시위 기도’라는 내용이 나온다.

1919년 당시 진천 출생으로 진천에서 거주하고 있던, 소위 ‘인테리겐차’로 불리던 보통학교 학생는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포석은 그때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북경사관학교에 들어가려던 시도가 둘째형에게 제지된 뒤 진천 벽암리에서 5년 동안 망국적 울분을 달려며 독서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일경에서 작성한 ‘일차보고’ 내용 가운데 진천에서 발생한 3월 15일 시위기도 사건은 그 주도자가 포석이었을 것이란 개연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포석이 진천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라는 팩트가 왜 그리 중요하냐는 반문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민족민중주의자로서의 포석에게 ‘시위를 기도하고 3개월간 투옥됐었다’는 사실은 그의 정체성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을 뿐만아니라, 그의 문학적·사상적 삶의 여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키워드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만 아쉬운 것은 정황상 밀접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고, 유력한 인사들의 증언이 포석의 3.1운동이 사실임을 밝혀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포석을 명시한 3.1운동 기록을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5) 황동민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교수로 역사학자다. 조명희문학유산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으며 조명희의 문학적 가치와 의미를 재조명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포석이 러시아 망명 후 륙성촌에서 륙성농민청년학교 교사로 있을 때 그의 누나인 황 마리아를 소개시켜 부부의 연을 맺게 했다. 황 교수의 부인 최 예까떼리나는 륙성촌에 포석이 교사로 있을 때 제자였으며 포석의 글을 발굴하고 포석의 문학적 업적을 고양시키는데 앞장섰다.

 

(6) 이기영

▲ 민촌 이기영

1895년 5월 29일 충남 아산 출생, 1984년 8월 9일 평양에서 사망. 20세기에 활동한 우리나라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로 평가된다. 호는 민촌(民村). 1925년에 조명희의 주선으로 〈조선지광〉의 편집기자가 되었고,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해 중앙위원 및 출판부 책임자를 지냈다. 1931년 KAPF 1차 검거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2개월 만에 풀려났고, 1934년 KAPF 2차 검거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 등 북한에서 문학예술 분야의 고위직을 두루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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