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구보 선생이 맡은 학급은 2학년 인문계 반이었다. 가정환경이 상류층인 학생과 하류층인 학생이 많고 중산층 학생은 오히려 적었다. A급 문제아 세 명 B급 문제아 일곱 명 C급 문제아 다섯 명 모두 열다섯 명이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그때까지 특별히 문제를 일으킨 학생은 없었으나, 문제아에 속하지 않은 한 학생이 매일 지각을 하고 있었다. 키가 중간쯤이고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공명이라는 학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학생이 아침에 보이지 않더니 6교시가 끝나고 청소가 다 끝날 후에야 나타났다. 책가방도 없이 온 걸 보면 큰 결심을 한듯하였다. 공명이와 나는 상담실에 가서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었다. 공명이의 눈은 우수에 깃든 듯하면서도 적개심 같은 것이 어리어 있었다.

“선생님은 왜 저를 안 때리세요? 차라리 때려주세요.”

갑작스런 공명이의 말은 떨리고 있었다. 구보 선생은 당황하였으나 냉정을 잃지 않았다.

“선생님도 때릴 줄 알아. 그렇지만 무얼 잘못했는지 알아야 때리지? 그리고 맞아서 고쳐질 일이라면 얼마든지 때려주지.”

공명이는 그 짧은 시간에도 몇 번이나 한숨을 내 쉬었다.

“한숨을 자꾸 쉬네. 참기 힘든 모양이구나.”

공명이의 눈빛이 살짝 흔들린다. 공명이의 눈동자 속에 네모진 구보 선생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잠시 후 공명이가 다소 안정을 찾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하고 아버지 작은마누라하고 둘이서 어머니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고 해서 저도 아버지와 치고받고 싸웠어요.”

공명이도 울고 선생도 울었다.

“그랬구나. 공명아, 미안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선생님은 공명이를 미워했어. 선생님이 공명이 입장이었어도 공명이처럼 행동했을 거야.”

“선생님 죄송해요.”

“공명이 잘못은 없어?”

“제가 자꾸 지각해서요.”

공명이의 말하는 소리가 점차 또렷해져 갔다.

“호랑이가 잡아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 들어봤지?”

“예.”

“정신만 차리면 호랑이도 순하게 변한다는 뜻이야. 그리고 반대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내 주위 모든 사람이 부모님이든 선생님이든 친구든 누구든 나를 잡아먹는 호랑이로 변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

“ …… ”

“집에 들어가기가 두렵지? 선생님이 같이 가 줄까?”

“괜찮아요. 저 혼자 들어갈게요.”

“집에 가는 동안 어머니 위로해 드릴 말 한 마디만 찾아봐. 생각이 나지 않으면 말은 안해도 돼. 공명이가 해야 할 일을 찾아봐. 가령 내일 시간표 확인하고 책가방 싸는 일 같은 거, 그런 작은 일을 잘 하는 게 정신 차리는 일이야.”

그날 이후 공명이의 표정이 점차 좋아졌다. 등교 시간도 잘 지키고 성적도 조금씩 향상되어 갔다. 구보 선생은 그해 말 교단을 나와서 박사 공부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가을 공명이가 찾아왔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하지 못했단다. 남대문 시장에서 옷가게 점원으로 일한다면서 가을 잠바 하나를 내놓았다.

반응(reaction)과 공감(Empathy)은 경청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어떤 자세로 듣느냐에 따라 말하는 이의 태도도 달라진다. 효과적으로 반응하기 위해서는 말하는 이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요구된다. 학생이나 어린이처럼 나이가 어릴수록 작은 소리나 몸짓이나 표정에 반응을 보여주면 소통이 원활해진다. 그러면 말하는 이와 같은 감정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자연스럽게 부정적 감정(편견, 불안, 경멸, 혐오, 실망감 등)이 비워진다. 이 때 말하는 이도 상대방이 자신이 하는 말에 공감(Empathy)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상대방으로부터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대화에 참여하게 된다.

<청주대 명예교수>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