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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13>
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13>
  • 김명기 기자
  • 승인 2015.08.23 1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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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10릿길 헤치며 5원을 갚으려 찾아온 포석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한설야는 자신도 가난하면서 더 지극한 가난에 허덕이는 포석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남달리 많은 가족, 포석에게는 아내 민식과 장녀 중숙, 차녀 중남, 장남 중락이 있었다. 1924년 중숙은 열 살이었고, 중남은 다섯 살, 중락은 한 살이었다. 1927년 포석이 소련으로 망명하기 전 해에 낳은 중윤까지 치면 ‘줄줄이 사탕’으로 자식만 넷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석은 한설야, 이기영 등을 비롯한 조선의 진취적이고 정열적인 작가들에게 늘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며, 쉬 해법을 제시하는 선배이자 스승이었으며, 그들이 추구하고자 할 지향점이었다.

가난했지만 인간적이었고,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옳고 그름에는 꼿꼿했던 포석을 여러 문인들은 좋아했고, 또 그런 포석에게 존경을 보냈다.

▲ 조명희를 누구보다 존경했던 김소운. 그는 월북작가 등에 대한 해금이 이뤄지기 전에도 포석의 이야기를 즐겨 다뤘다.

 

김소운(27)이 쓴 글을 보면 포석의 성정(性情)이 잘 드러나 있다. 김소운은 포석을 두고 ‘털끝만큼도 타협을 모르는 꼿꼿한 성품’과 ‘정에 대한 정열은 언제나 소년같다’고 했는데, 이 글은 중앙일보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981년 1월 30일부터 4회 게재) 기획물에 김소운이 ‘비인격의 떠돌이 인생’이란 회상기 연재물을 통해 포석의 인품을 회고하고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월북작가 등 사회주의 계열의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해금(解禁)이 이뤄지지 않았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포석을 거론하기를 꺼려했다. 월북작가 작품 등에 대한 해금조치가 이뤄진 것은 1988년 7월 19일이었다. ‘7.19 해금조치’는 단지 월북하거나 납북됐다는 이유만으로 사실상 논의조차 불가능했던 월북문인 120여명에 대한 규제가 사라진 것인데, 이 조치로 인해 한국 문단은 막대한 자양분을 유입하며 비옥해졌다 할 수 있다. 제대로 된 문학사적 조망이 가능해진 이 조치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좌우 입장을 막론하고 문단에 큰 족적을 남긴 대가들이 포함돼 있었다. 카프 쪽에는 이기영, 한설야, 임화, 김남천 등이 포함돼 있었고, 구인회 쪽에는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등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평소 포석을 흠모하고 존경했던 김소운(金素雲)은 수필에서도 포석을 떳떳이 즐겨 다뤘다. 김소운은 공교롭게도 포석에 대한 회상기를 쓴 해인 1981년 사망했다.

내용 가운데 ‘早稻田大(조도전대·와세다대학)를 다닌 留學生(유학생)’은 ‘東洋大學(동양대학)’의 잘못이고, 重男(중남)은 열아홉 젊은 나이로 죽었다. 따라서 김소운이 말한 중남은 장녀인 중숙을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김소운이 쓴 글이 가리키는 시점은, ‘부인과 어린 자녀 셋’이라는 서술로 보아 1924∼1927년 사이로 보인다. 포석이 셋째 중락을 낳던 해가 1924년이었고, 넷째 중윤을 낳던 해가 1927년이었기 때문이다. 김소운이 쓴 원문 그대로 싣되, 한자는 괄호 안에 음(音)을 단다.

 

抱石(포석) 趙明熙(조명희)씨를 대하면 마음은 구김살 없는 소년으로 되돌아간다. 抱石댁은 昭格洞(소격동)-空超(공초)선생(오상순을 말한다. 1920년 폐허 동인으로 김억, 남궁벽과 친했다. 8.15 해방까지 방랑벽으로 살았는데 담배를 하루에 20갑 넘게 피우던 습관은 한국 문단에 널리 알려져 있다.)이 사는 鍊洞(연동)과는 지척이다. 힘들여 밀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대문에 안채엔 방 둘, 아래채 하나, 부인과 어린 자녀 셋-그런 살림이었다.

抱石을 처음 만난 그날부터 그의 인간적인 매력은 나를 압도해 버렸다. 일본작가 ‘아꾸다가와(芥川龍之介)’와 어딘지 닮은 풍모인데, 그 단정한 얼굴은 언제나 침울에 잠겨 있었다. 그 얼굴에 가끔 쓰디쓴 웃음이 떠오른다.

낮에는 ‘帝通’(제통) 記者(기자) 노릇을 하면서도 밤이면 자주 抱石댁을 찾아갔다. 어느 때는 밤이 늦어 抱石과 한방에서 자고 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抱石은 소년같은 정열로 내게 새로 쓴 詩(시)를 읽어주고, 詩論(시론)의 원고를 들려주고 하면서 밤 깊은 줄을 몰랐다.

그의 詩나 詩論이 어디까지 내게 이해됐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抱石에게서 배운 것은 文學(문학)의 지식이나 詩의 기술이 아니요, 빈곤과 오뇌 속에서도 언제나 돋아나는 떡잎같이 신선한 그의 정열-毫釐(호리)와 타협이 없는 꼿꼿한 신념-그것이었다.

나는 이날까지 詩人(시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를 허다히 보아왔다. 내 나라에서나, 남의 나라에서나-그러나 내 눈에 비친 그런 시인 중에는 抱石처럼 자기자신에 대해서 준엄한 詩人은 없었다.

어느날 새벽, 抱石댁에서 밤을 새운 나는 잠결에 부인이 와서 남편을 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었다. 쌀이 없다는,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부인이 나간 뒤에 抱石이 내쪽을 보면서

“소운- 돈 좀 가진 것 없소?”하고 물었다.

“있습니다. 얼마나 드릴까요?”

“한 5원만-내일은 어렵고 모레 안으로 돌려 드릴께-”

“괜찮습니다. 지금 당장 쓸 돈도 아닌데요.”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5원 지폐 한 장을 주머니에서 꺼내에 抱石께 드렸다.

하루 사이를 두고 밤들어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그 다음날도 진종일 눈보라가 그치지 않는다. 밤 10시나 되었을까-三坂通삼판통(東子洞효자동) 내 숙소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가보니 전신에 하얗게 눈을 들러쓴 抱石이 서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오. 돈이 좀 더디 돼서-”

그러면서 抱石은 5원 지폐 한 장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昭格洞에서 三坂通까지는 거의 10릿길이다. 더우기 이 밤중에-이 눈길을-. 아무리 약조를 했기로니-나는 抱石의 그 고지식이 되려 원망스럽기도 했다.

“객지사람의 주머니를 털어서 미안하오. 그럼 잘 자시오.”

문간에 선 채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다시 눈보라 속으로 사라진 그의 뒷모습을 눈물겨운 감동으로 나는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 이 만화는 1987년 ‘소년중앙’ 1월호에 길린 길창덕 만화가의 ‘쭉쟁이’의 한 부분이다. 아마도 길씨는 김소운이 쓴 글 ‘포석 조명희’를 읽고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26) 카프(KAPF)

1925~35년에 활동했던 진보적 문학예술운동단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약칭은 카프(KAPF :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로 에스페란토어에서 따온 것이다. 3.1운동 이후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민중의 민족해방운동을 본 문인들이 문학도 프롤레타리아 해방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조직된 문예운동단체이며 소련의 라프(RAPP), 중국의 중국좌익작가연맹(左聯), 일본의 나프(NAPF)와 뜻을 함께하는 단체이다.

염군사와 파스큘라에 참가한 문인들과, 이와 비슷한 경향의 작품활동을 하던 이기영, 조명희, 한설야, 최서해 등이 당시 사회주의 운동계의 조직 통합을 계기로 하여 1925년 8월께 카프를 결성하게 된다. 초기에는 구체적인 작품보다는 문예운동의 이념과 방법에 대한 논의가 중심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김기진과 박영희가 벌인 ‘내용형식논쟁’은 카프조직 내의 최초의 논쟁이다. 잡지 ‘염군’에 발표된 몇 편의 작품부터 1927년 이전까지 발표된 작품을 ‘신경향파 문학’이라 하는데, 김기진, 박영희, 이상화, 김창술, 박팔양 등의 시와, 최서해, 조명희 등의 소설, 김영팔, 김우진 등의 희곡이 여기에 속한다.

1927년 목적의식적 방향전환 이후 카프에 의해 전개된 문학을 프롤레타리아 문학(프로 문학)이라 하는데, 이는 신경향파문학을 발전시킨 형태이다. 특히 이 시기에 발표된 조명희의 ‘낙동강’은 학자에 따라 신경향파 문학이나 프로 문학에 포함시키거나 양자의 중간에 두기도 한다.

1934년 일제의 ‘2차검거’로 대다수가 검거되고 1935년 5월 주도세력인 임화, 김남천이 경기도 경찰국에 해산계를 제출함으로써 10년에 걸친 카프의 활동은 마감됐다.

 

(27) 김소운(金素雲)

1907년 부산 출생 1981년 사망. 본명 교중(敎重), 호는 소운(巢雲), 필명은 삼오당(三誤堂). 시인, 수필가, 번역가.

1919년 옥성보통학교 4년을 중퇴하고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가이세이중학교(開成中學校) 야간부에 입학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중퇴했다.

1929년 매일신보 학예부원으로 근무했고 1948년 주간지 ‘청려’를 발행, 발매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1923년 시대일보에 시 ‘신조’를 발표하고, 1925년에는 첫 시집 ‘출범(出帆)’을 간행하려다가 인쇄비 미납으로 이루지 못했다. 출범의 서시는 조명희가 써주었다. 1927년 ‘조선의 농민가요’를 일본의 ‘지상낙원(地上樂園)’지에 번역, 소개하면서 시작된 그의 한국 문학 번역 작업은 민요·동요·동화·현대시·사화(史話) 등 여러 부분에 걸쳐 폭넓게 이뤄졌다. 첫 수필집 ‘마이동풍첩’(1952)을 낸 뒤부터 ‘목근통신’(1952), ‘삼오당잡필’(1955) 등 8권의 수필집이 있다. 일본 체류 중 제1공화국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이승만에 의해 입국이 거부돼 1965년에야 영구 귀국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위해 발표한 예비명단에 포함됐다가, 친일 작품 발표 시기가 강압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일제 강점기 말기에 몰려있고 편수도 적은 점, 일본에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데 일조한 공으로 1980년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다는 점 등으로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서는 제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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