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 걸맞는 뜻 옳고 곧게 세우는게 참 삶”

김태창 박사(한·중·일이 함께 공공하는 철학모임 대표)가 지난 4일 동양일보 아카데미홀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이날 김 박사는 ‘동양일보’라는 이름을 파자(破字)해 설명하고 “이름값을 제대로 살리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최지현>

동양일보는 현대인들이 인문학적 사고를 통해 삶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하는 ‘철학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이 일환으로 매월 둘째·넷째 월요일에 특집으로 ‘동양포럼-동아시아의 공통가치를 찾아서’를 연재한다.

이 연재물에는 한·중·일의 석학들이 참여하는 좌담, 대담, 토론, 특강 등 다양한 내용이 담길 예정이다. 첫 회로 지난 4일 김태창 박사(한·중·일이 함께 공공하는 철학모임 대표)가 동양일보 아카데미홀에서 본사 전 사원을 대상으로 한 특강 내용을 싣는다. <편집자>

 

■‘맑고 깨끗한 고을’ 청주(淸州)
 오랜만에 찾은 고향 더러운 모습보고
 명칭의 가치 되새겨야겠다고 생각
 나부터 쓸고 치웠더니 주민들도 동참
 바른 환경·행동양식 모두에 정착되길
 
■ 동양일보가 가진 이름의 힘
 동 : 빛의 원천·생각·판단·책임
 양 : 큰물에서 무한·영원을 꿈꾸며
 일 : 나날이 새로워지는 ‘일신 우일신’
 보 : 전통 계승 새로운 미래 열자

 동양일보에서 마련해준 ‘포럼’ 통해
 상생·공복의 세상 열어가는
 한·중·일 철학의 공통가치 찾을 것

 


여러분 반갑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저는 이 고장 청주에서 태어나 청주를 항상 어깨에 메고, 세계 어느 곳에 가든 이 고장의 좋은 점을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저는 청주를 세계에 알리고 펼치는 데 모든 것을 다 바쳐 왔습니다. 

청주(淸州)라는 이름에는 ‘맑고 깨끗한 고을’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친한 일본 사람 두 분이 청주에 왔을 때 함께 거리를 다니며 ‘맑고 깨끗한 고을’이라 자랑했던 것이 실제와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을 알게 되고 얼굴이 뜨거웠습니다. 제가 그동안 말해 왔던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현재의 모습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하면 이름에 합당한 청주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지 생각했습니다. 남을 가르치려 해서는 오히려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것 같아 제가 스스로 솔선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집 앞을 청소하는 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청주에 살지 않아서 그랬는지 집 앞 공터가 쓰레기장이 되었고 그 해독이 저의 집은 물론 이웃의 삶의 질을 크게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 4시쯤 일어나 남들이 다니기 전에 저희 집 앞부터 제 힘이 미치는 범위까지 비로 쓸고 쓰레기를 거두었습니다.

규격봉투에 넣고 집 앞에 놓았습니다. 2주일 쯤 되니까 쓰레기를 길가에 막 버리던 사람들이 쓰레기를 봉투에 넣고 저희 집 앞 공터에 놓기 시작하더니 자기 집 앞을 청소하고 쓰레기를 봉투에 담아 자기 집 앞에 놓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은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을 보면서 흐뭇합니다. ‘청주’라는 이름에 걸맞는 생활 환경과 행동양식이 조금씩 정착되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얼마 전 유성종 선생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유 선생님은 인간 형성과 사회 발전에의 공헌을 각성시키는 종치기의 이름값을 제대로 실천해 오신 이 고장의 참된 스승이십니다. 학문 창달에 크게 이바지하라는 이름에 너무나도 미흡한 삶을 살아온 것이 안타깝던 차에 유 선생님을 모시고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이름값을 해보고자 마음먹게 되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동양일보와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왜냐고요?

‘동양일보’라는 이름에 담겨진 뜻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입니다. 동양인문학의 첫걸음은 이름을 바르게 알고 거기에 담긴 뜻을 새롭게 밝히는 일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조부께선 중국 고전을 연구하는 데 일생을 바치셨습니다. 일제시대에 시골에서 촌장 노릇을 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깨우치고 겨레 얼을 잃지 말자는 운동을 묵묵히 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을 가르치는 서당에서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할아버지가 고장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달하시는 한문을 익혔습니다.

방안 벽에는 한문글귀가 가득했고,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한자 문화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당시 조부님께서는 다른 것으로 일본에 항거할 수는 없지만 당신이 주관하시는 집안과 서당 내에서는 절대로 일본의 뜻대로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는 것은 공자님의 말씀인데 이름의 뜻을 바르게 세우고 올바로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이나 단체의 이름, 조직의 이름, 나라의 이름을 바르게 알고, 이름에 합당하게 행동하고, 이름에 합당한 목표를 세우고, 이름에 합당한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거지요. 

여러분들은 ‘동양일보’라는 이름과 함께 일을 하고 계시고 저도 그 일에 함께 동참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동양일보라는 이름을 바르게 알고 그 뜻에 걸맞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판단하고 책임을 질 수 있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동양일보라는 말 뜻을 새롭게 밝혀 보려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동양일보의 ‘동(東)’이라는 한자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는가를 살펴봅시다. ‘東’이라는 한자를 파자(破字·한자의 자획을 풀어 나눔)하면 나무 목(木)자에 날일(日)자로 나뉩니다.

뜻을 알기 위해 이렇게 나눈 것을 다시 합쳐보면 ‘나무 사이에 해가 떠오르’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거기서 ‘해 뜨는 곳’이라는 뜻이 나타납니다. 거기서 동양일보의 ‘동(東)’은 ‘항상 빛의 원천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판단하고 책임진다’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빛의 원천에서 생각한다는 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나라의 고유 사상, 즉 한사상의 핵심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말이 ‘새밝’입니다. 한자로 표시하면 ‘개신(開新)’입니다. 새로운 뜻을 밝히고 새로운 하늘과 땅을 연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낡은 관념에 구애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평, 새로운 차원, 새로운 역사를 개벽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70여년 전, 아마도 제가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을 겁니다. 국사 선생님이 경주로 여행을 가자고 하셔서 충청도 촌뜨기 몇이서 선생님을 따라서 경주 불국사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주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선생님께서 “너희들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해. 새벽 4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하시는 겁니다. 왜 그렇게 일찍 일어나야 하는가 의아해 하면서 1시간 정도 깜깜한 산길을 올라갔지요. 거기가 석굴암이라는 절입니다. 거기서 해돋이를 기다렸습니다.

지금 기억에는 새벽 4시 30분 경이었을 겁니다. 칠흑 같은 어두운 동해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머나먼 수평선에서부터 약간 불그스레해지더니 거기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전 그 때 태양광선이라는 말을 실감했어요. 햇빛의 첫 빛살이 일직선으로 석굴암 부처님의 눈을 향해서 비추더니 거기서 다시 빛살이 반사해서 동해 쪽으로 비쳐서 어둠을 쫓고 밝은 새벽을 여는 너무나 감동적인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 때부터 저는 새벽을 좋아하게 되었고 새벽은 하루의 삶을 새로운 뜻 밝힘으로 시작하는 귀중한 때와 곳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만물만사가 새롭게 시작하는 때와 곳이 해 뜨는 곳이라는 뜻의 ‘東’이라는 글자 속에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고대 중국인들은 해가 떠오르는 것을 바다에서 보기 보다는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본 기억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해돋이를 처음으로 목격하셨습니까? 어쨌든 ‘동’이라는 글자에는 ‘새밝’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 그 뜻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자는 것이 우리가 이제부터 하는 함께 하는 인문학적 대화 학습의 첫 걸음입니다. 동양일보의 인문학 운동은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새벽의 빛살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양(洋). 이것을 파자하면 물을 뜻하는 ‘수(水)’와 크다는 뜻의 ‘양(羊)’으로 나뉩니다. 그렇다면 ‘큰 물’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혹시 바닷가를 거닐어 보신 적 있나요? 작년 연말 국립해양대학교 국제대학원 원장으로 있는 김태만 박사의 요청으로 부산에 인문학 강좌에 특강하러 갔었는데 해운대 근처의 호텔에 묵게 됐어요.

그곳에서 새벽에 바닷가를 거니는데 문득 무한과 영원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새벽의 바다는 새롭게 시작되는 하루가 무한과 영원의 뜻을 담고 하루의 삶을 여는 놀라운 순간이요 그것은 한없이 고맙고 값진 기적이라는 것을 어리석은 저에게 깨우쳐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일보’의 ‘일(日)’입니다. 이 글자를 보면 얼른 생각나는 말이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입니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뜻이지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이어지는 삶이 늘 새로운 뜻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삶’이란 한자어가 아닌 순수한 한글말입니다. 그 뜻을 풀어보면 ‘살’과 ‘암’이라는 두 개의 낱말이 합성된 것입니다. ‘살’은 몸이라는 뜻이고 ‘암’은 알다-앎-암으로 이어져서 깨닫는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삶이란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면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 나날이 새로워지는 삶이라는 뜻이 ‘일(日)’이라는 말 속에 함축돼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보(報)’입니다. 이 말에는 ‘갚는다’와 ‘알린다’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오늘의 내가 지금 여기에 있게 된 인연에 감사하고 그 인연을 값지게 키우기 위한 노력과 지혜를 서로 알리고 알자는 것입니다. 

저는 여태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제가 83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저 은혜를 느끼기만 하면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끝나잖아요. 조금이라도 삶의 의미를 크게 하려면 입은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삶이 되어야겠지요. 그런데 입은 은혜를 갚는 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일찍이 유영모 선생은 “은혜는 옆으로 갚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에 공감합니다. 받은 것, 입은 것, 베풀어진 것을 우선 느끼고 갚는데, 어버이에게 입은 은혜를 자식에게 베풀 듯 아래로만 갚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도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눔의 정신이 나옵니다. ‘보도’라는 차원에서만 ‘보’를 생각하는 시대는 지났어요. 역사와 전통에 감사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길을 알리는 사명이 ‘보’라는 글자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한 글자마다에 담긴 뜻이 함께 어우러지는 가운데서 떠오르는 동양일보라는 이름값에 합당하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책임진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뉴스페이퍼(newspaper)라는 영어는 동서남북에서 모아온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문보다 더 빠른 정보 전달 매체가 많아요. 신문 보다 더 빠른 속도로 동서남북에서 일어난 일들이 세계로 전달됩니다.

그래도 여전히 신문은 필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신문이 시대의 급격한 변화와 미래의 도전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신문이라는 이름을 새롭게 세우고 그 뜻을 새롭게 밝히는 일부터 시작해야 될 것입니다. 

‘신문’의 ‘문’을 ‘들을 문(聞)’자로만 이해하면 무한대의 의미를 가진 한자의 뜻을 너무 좁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제가 세계의 여러 사람들을 만나던 중 90세의 노승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70대였습니다.

그 스님이 저에게 “선생님, 여러 나라 말을 많이 하시는데 한자의 뜻을 하나 여쭤볼게요. 여태까지 ‘문법치우(聞法値遇)’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하시는 겁니다. “모처럼 값진 만남이 이루어졌으니 여기서 서로가 진리의 말씀을 듣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는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일간신문의 새로운 역할은 나날의 새로움 속에서 새로운 만남을 이루게 하고 거기서 참삶의 뜻을 듣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결국 동양일보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살리는 길을 어디서 찾느냐라는 긴급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말이 됩니다. 유성종 선생님을 모시고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의 60년에 걸친 학문 연구의 생활과 지난 25년 동안 줄곧 힘써온 공공철학 대화운동을 통해서 절실하게 그 필요성과 중요성을 실감해온 과제입니다. 그것은 한·중·일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공통 가치를 찾는 것입니다.

좋아도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한국과 중국과 일본은 서로 끊을 수 없는 지정학적 관계 속에 자리매김되어 있고 더불어 미래를 열어갈 수 밖에 없는 지리문화적 연관 속에 뜻매김하는데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르고 어긋나는 일이 많아도 함께 살아가면서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나갈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동양포럼을 시작하려는 것입니다. 동양일보가 그 매개적인 역할을 가시화하고 의식화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제가 힘을 합쳐서 이 역할을 감당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언어력을 갖고 하는 것입니다. 이기고 지는 승패의 언어가 아니고 손해냐 이익이냐의 언어도 아닙니다. 상생과 공복(共福)의 언어를 가지고 시작하는 일입니다. 우선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함께 납득할 수 있는 상생과 공복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공통 가치를 각자의 능력과 자원과 지혜를 모아 밝히고 가꾸고 키우자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나날이 새롭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가운데서 청주와 동양일보라는 이름 뜻에 합당한 삶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저로서는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어쩌면 개인적으로는 제 삶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을 여러분과 함께 일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쁩니다. 여러분이 저의 동행이 되어 주시고 제가 여러분의 동료가 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조아라>

 

●김태창 박사 약력

△1934년 청주 출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정치학 박사
△충북대 교수,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역임
△일본동경대학, (경도)국제일본학연구센터 객원교수, 북구주대학 교수, 구주여자대학 교수 겸 문학부장 역임 
△세계미래연구협의회 국제집행위원
△일본 장래세대종합연구소장, 공공철학 공동연구소장, 수복서원 원장 역임
△중국 인민대학초빙교수, 홍콩대학 객원교수 역임
△현 미래공창신문 이사, 한·중·일이 함께 하는 공공하는 철학모임 대표
△청주시 문화상, 충북도 문화상,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글로벌 장래세대포럼(40회), 공공철학 교토포럼(120회), 재일본외국유학생포럼(30회), 일본 내 유명대학 순회 교토포럼(10회) 등 주재
△현 동양일보 부설 ‘동양포럼’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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