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김태창 박사의 동양인문학 특강 ■다섯 가지 다움(할아버지에서 손자로 이어지는 동양인문학의 기본과 활용의 인문학)

▲ 지난달 16일 김태창 박사가 '동아시아의 공통가치를 찾아서'를 주제로 서원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 ‘사람다운 사람’ 바로서는 세상
‘인인인인인(人人人人人)’
 (人) 다섯개로 ‘사람다워야 사람’ 강조
‘견견인인(犬犬人人)’
 개들처럼 으르렁 말고 인간 화합해야
‘국국국국국(國國國國國)’
 국가 중심 바로서야 올바른 백성 만들어

■ ‘고장다운 고장’ ‘청주다운 청주’
맑고 깨끗한 고을 ‘청주’처럼
지역명칭에 맞는 모습 가꾸고
서로 함께하며 상도 지켜나가야

■ 함께 어우러져야 ‘삶다운 삶’
늘 새로운 생활의 차원 열어가며
하늘·땅·사람 더불어야 참된 인생
전체가 기뻐야 나도 행복해질 수 있어

 

(동양일보 조아라 기자)동양포럼 주간인 김태창 (한·중·일이 함께 공공하는 철학모임 대표)박사가 지난 3월 16일 서원대를 찾아 강연했다. 서원대 사범대학과 박약회 충북지회(회장 엄창흠)가 주관한 이날 강연에서 김 박사는 ‘사람다움’이 ‘고장다움’에 연결되고, ‘나라다움’에 이어지며 그 안에서 ‘회사다움’과의 관계를 살피고 마침내 ‘삶다움’의 참모습에 눈을 뜨게 되는 동양인문학의 핵심을 이야기했다. 김태창 박사의 두 번째 동양인문학 특강 내용을 요약,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오늘 이렇게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약 30여년 전 이 대학에서 5년 정도 시간 강사를 했던 인연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청주여자사범대학이었는데 35년 만에 와 보니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 뽕나무밭이 큰 바다가 된 것처럼 많은 변화가 일어났네요. 젊은 여러분을 보니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제가 나고 자라고 배우고 가르치면서 생애를 보냈던 고장으로 돌아와 젊은 여러분과 대화하게 된 것을 무엇보다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 저는 지난 83년 동안 세계를 다니면서 배우고 느끼고 체험한 바를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두 가지 말씀과 거기서 발전시킨 저 스스로의 세 가지 깨달음으로 간추려서 말씀드리고 여러분의 비판을 받고자 합니다.
먼저 여러분의 양해를 구할 것은 한·중·일을 넘나들며 더불어 행복해지는 동아시아를 함께 일으키자는 철학대화를 계속해오는 과정에서 상호소통의 효과적인 매체로서 최소한의 한자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현실적 제약에 관해서입니다. 제가 아직 어렸을 때 저의 할아버지가 시골에서 훈장을 하셨는데 그때 늘 마을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기 위해 간단한 한자를 써 놓고 그 뜻을 되새겨 보게 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당시는 일제 시대였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일본말을 가르쳤고 일본어를 쓰지 않으면 벌을 받았어요. 할아버지께서는 일본어 대신 쉬운 한문을 쓰시며 우리 얼을 조금이라도 마음속에 담도록 하셨습니다. 그 중 오늘 세 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인인인인인(人人人人人)’입니다. 할아버지는 사람인(人)자 다섯 개를 써 놓고 이 뜻이 뭐냐고 물으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고 있으니까 할아버지께서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다움’의 내용을 가장 알기 쉽게 가장 핵심적으로 설명하셨던 거지요.
그 말씀에 이어서 ‘견견인인(犬犬人人)’이라는 네 개의 한문자를 써 놓으시고 그 뜻을 풀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개 두 마리가 만나면 으르렁대고 싸움이 일어나거든요. 이것을 일본 사람에 빗댄 겁니다. 개들처럼 만나면 으르렁대지 말고 사람과 사람이 정답게 만나서 함께 힘을 합쳐 좋은 미래를 열자는 뜻이라고 풀이하셨습니다.
함석헌 선생처럼 유명한 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할아버지께서는 思民(생각하는 민중)이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다니셨습니다.
한참 지도자론이 유행하는 시대이지만 저는 올바른 백성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백성, 민중이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가슴으로 느끼고 스스로의 팔다리로 실천하는 삶의 자세를 ‘철학하는 백성(哲民)’이라고 이름 지어 왔습니다. 플라톤의 ‘철인왕’이 아니라 ‘철인민’입니다.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없는 것도 문제지만 백성다운 백성이 있어야 지도자도 지도자답게 되지 않겠습니까. 유럽에서는 소크라테스적 시민이라는 말이 최근 유행하고 있습니다.
‘국국국국국(國國國國國)’, ‘나라국(國)’자 다섯 개는 ‘나라면 다 나라냐 나라가 나라다워야 나라지’라는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國’이라는 한자는 나라라는 뜻이지만 그 글자의 모양을 잘 보면 무력으로 정복한 땅덩어리라는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무위국가’였기 때문에 글자 뜻에 걸맞습니다. 그러나 ‘구슬옥(玉)’자를 네모꼴 속에 넣는 ‘나라국(?)’자도 있습니다. 가운데 있는 ‘옥(玉)’자는 임금의 몸. 즉 옥체가 중심이 되는 나라라는 뜻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일본은 천황이 중심이 되는 나라이기 때문인지 그 한자를 잘 씁니다. 현재의 일본은 저의 생활 체험으로 말씀드리면 네모꼴 속에 관(官)을 써넣는 한자나 쇠금(金)자를 넣는 한자를 만들어 쓸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철저한 관주주의(官主主義·관이 주인이 되는 나라)나 금주주의(金主主義·돈이 주인이 되는 나라)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중국도 비슷한 데가 많습니다. 물론 미국도 영국도 금주주의가 팽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께서 꿈에 그리셨던 나라다운 나라는 백성이 주인인 나라였고 그래서 한자로 표현하자면 백성 ‘민(民)’자가 네모꼴 한가운데 있는 ‘나라국(?)’자가 되는 것입니다. 카마쿠라 시대의 니찌렌이라는 일본스님이 이 글자를 그의 저서에서 쓰고 있습니다. 나라가 나라답게 되어야 그 주인인 백성이 백성답게, 사람이 사람답게 되고 역으로 백성이 백성답고 사람이 사람답게 되어야 나라가 나라답게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할아버지에게 배운 ‘人人人人人’과 ‘國國國國國’이 저의 동양인문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세계의 여러 곳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체험학습의 성과는 ‘里里里里里(동네, 마을, 고장 이라는 뜻, 고장이면 다 고장이냐 고장이 고장다워야 고장이지)’와 ‘社社社社社(회사면 다 회사냐 회사가 회사다워야 회사지)’라는 세상이치의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80세를 넘고서야 마침내 ‘生生生生生(삶이면 다 삶이냐 삶이 삶다워야 삶이지)’이라는 삶의 참모습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께서 깨우쳐 주신 인문학적 상상력의 기초를 터전으로 삼고 거기서 한껏 펼쳐본 활용의 비상이었다고 생각하면 새삼스럽게 그 은혜가 큼을 절감합니다.
그러면 고장다운 고장이란 어떤 고장일까요? 여러분은 인생의 한 때를 청주라는 고장과 인연을 맺고 살고 계십니다. 특히 서원대라는 청주에 있는 대학에서 배우고 익히고 성장·성숙하는 값진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실지 충분히 헤아리지 못합니다만 저는 청주라는 이름 뜻이 좋아서 이름 뜻에 합당한 청주인으로 세계를 넘나들며 철학대화를 나누어 왔습니다. 맑고 깨끗한 고을이라는 것은 현실이기도 하지만 꿈이기도 하고 목표이기도 하고 이상이기도 합니다. 현대감각을 넘어서 구태여 말을 하자면 ‘에코타운(생태학적 건전성이 담보된 고장)’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러운 거리를 보고 담배꽁초를 아무데나 버리는 사람을 마주치게 될 때마다 몸과 마음과 얼이 심하게 아픕니다. 청주가 청주답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공자께서는 ‘어진 마음이 고장에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의 유학자 가운데도 어진 마음이 깃들인 마을이 아니면 거기서 살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서로 화합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가장 바람직한 고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장됨이 사람됨에 영향을 끼치고 또 사람됨이 고장됨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겠지요. 고장과 어긋나는 경우도 있고 고장과 함께 되고 변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됨과 나라됨의 관계도 비슷하겠지요. 모두 ‘상반상성(相反相成·서로 어긋나면서 서로 이루어나감)’의 상보관계로 맺어져 있는 것이니까요. 저는 청주를 중심으로 한국에서 30년 남짓 살고 난 다음, 30년 정도는 비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남북 아메리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북유럽을 돌아다니면서 배우고 연구하고 대화를 나누다가 여러 인연으로 일본에서 25년째 살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대학이나 연구소를 거점으로 대화활동을 폈다면 일본에서는 수많은 회사나 기업-특히 건실한 중소기업-과 깊은 관계를 맺고 학자, 공무원, 일반시민, 학생과는 다른 회사인-기업인, 상인 그리고 농민, 특히 농업기업인-과의 사귐이 많았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국가나 정부나 대학이 하지 못하는 일을 회사와 기업이 할 수 있는 분야가 있고 그것이 세상을 바꾸고 사람이 사람답게 될 수 있는 기본조건을 세우는데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함께 일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리고 경험이 쌓일수록 점차 몸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친절하고 정성스러운 대우를 받아도 오랫동안 대학에서 연구와 교육과 사회봉사에 주력해온 저에게는 무엇인가 마음이 불편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어서 간단히 설명 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구태여 오해의 여지를 무릅쓰고 말씀드린다면 저는 이때껏 사람을 살리고 저도 사는 활인과 상생의 철학을 기본으로 해왔는데 그 사람들은 회사나 기업 또는 성과의 목표 달성-가령 이윤 획득의 최대화-을 위해서 사람을 쓰고 평가한다는 용인(用人)과 용력(用力)의 철학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치가나 기업인의 경우 용인술이 뛰어나다는 말을 훌륭한 덕목처럼 쓰는 언론인이나 언론매체가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치자(治者) 중심의 편향사고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인격 모독이요 반인권적, 반윤리입니다. 사람을 사람됨의 귀중함이 아니라 자기 목적 달성을 우한 수단이나 도구로 여기는 반인륜적, 반도덕적 사고 행태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유명한 일본인 기업 경영인이 회사·기업의 목적은 사원 한 사람 한 사람이 행복하게 되는 것이라는 그럴듯한 기업 이념을 강조하고 일본 국내·외-주로 브라질과 중국-에서 여러 차례 대규모 강연회를 연 바도 있습니다마는 제가 직접 가까이에서 관찰한 바에 의하면 회사원, 기업종사자들에게는 행복과는 거리가 먼 과노동과 인권 무시가 비일비재인 현실을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은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규모도 작고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은, 성실하고 사람됨을 소중히 여기는 회사의 기풍-사풍(社風)이라는 말을 씁니다-을 실천하고 강조하는 경우를 목도하게 되면 마음이 흐뭇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는 양질의 상도 또는 상인도, 상인철학의 전통이 있는데 그것의 핵심은 물건을 팔아서 즐겁고 물건을 사서 기쁘고 그런 관계가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데 상인의 올바른 자세는 바로 그 이치를 몸과 마음과 일상적인 영업에서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회사다운 회사는 회사원이 행복해지는 회사가 아니라 회사에서 만든 상품이나 서비스가 판매자 또는 제공자와 소비자 또는 수요자가 더불어 함께 기쁘고 그런 단계가 곳곳에 퍼져나가는 행복사회의 공동창출에 기여하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이겠지요. 오만불손한 사장이나 최고경영자도 적지 않게 만났고 사귀기도 했지만 거기서 느낀 실망과 좌절을 말끔히 씻어주고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는 희망과 용기를 환기시켜 준 사장이나 기업경영자도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기대를 아직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삶이면 다 삶이냐 삶이 삶다워야 삶이지’라는 삶의 진실에 눈이 뜨게 될 때 비로소 동양인문학의 핵심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많은 사람들과 철학대화를 펼치다 보니 여러 나라 말을 배우게 됐고 거기서 특히 ‘삶’이라는 뜻에 가까운 낱말들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특히 한자어의 ‘生命’. 일본 말의 ‘이노찌(숨의 힘)’와 우리말의 ‘목숨’이라는 어휘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 나름대로의 연구와 증험의 결과를 압축해서 말씀드리면 ‘生’이라는 글자에는 개별적인 생명체에 나타나는 생명 현상을 의미하고 ‘命’은 그것을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힘으로 받쳐주고 있는 근원적인 생명에너지를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말의 ‘이노찌’는 개별적인 생명체가 나타내는 생명 현상이나 그것의 내면에서 떠받쳐주고 있는 것이 모두 개별적, 전체적인 ‘호흡의 힘’에 의한 것이라는 뜻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의 ‘목숨’은 주로 신체적 생명현상의 근원이 목을 통해서 들락날락하는 대기의 순환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어김없는 사실과 거기서 생생화화하는 마음 숨과 얼숨으로 이루어진다는 보다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삶’이라는 우리말의 독특한 뜻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삶’이란 ‘살’과 ‘암’의 합성어인데 ‘목숨’과 ‘마음숨’과 ‘얼숨’이 서로 어우러지고 함께 더 깊어지는 근원적 생명의 참모습에 눈이 뜨고 그것을 몸과 마음과 얼로 깨달아 스스로 체감, 체험, 체인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대상으로서 인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살아있음을 몸으로 실감하고 마음으로 확인하고 얼이 기뻐하는 깨우침이요 눈뜸이며 새로운 길에의 출발이기도 합니다.
삶다운 삶이란 늘 새로운 삶의 차원을 열어가는 삶입니다. 우리 고유의 한 사상의 키워드를 하나 빌려 쓰면 ‘새밝’입니다. 새로운 하늘과 땅과 사람의 뜻을 밝히고 새롭게 밝혀진 삶의 길을 정성껏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 삶’과 ‘땅 삶’과 ‘사람 삶’이 함께 어우러져서 더불어 행복하게 되는 삶이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는 미야자와 켄지라는 작가가 한 말 중에 “우주 전체가 행복해지기까지는 나 자신의 행복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이 삶다운 삶의 지표로 거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다운 생명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체보다 전체를 우선시하는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전체라기 보다는 집단의 행복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조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 고유의 사상적·철학적 맥락에서 잘 추려보면 전체와 사이로부터 그 양측을 함께 어우르는 행복을 삶다운 삶의 기본으로 삼았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천부경’이라는 우리의 가장 오래된 경전에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하늘과 땅을) 고르고 바르게 맺고 있고 살린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삶다운 삶의 핵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을 만나서 행복했습니다.
▶글/조아라·사진/최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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