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잔인한 달. TS 엘리엇(Eliot)은 그의 시 ‘황무지’를 통해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차라리 망각의 눈이 대지를 덮어줄 때가 따뜻했단다. 라일락을 키운다는 것은 동토를 열어 추악함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가 잠든 뿌리를 흔들어 다시 움트는 4월이 잔인하다고 표현 했다. 사람 사는 모양새가 유럽이라고 별다른 것은 아닌가보다.

90년도 전후 서울의 거리도 최루가스로 4월의 문을 열었다. 그 무렵 내 아이들도 어쩔 수 없이 대학을 서울로 보내야하는 엄마에게는 걱정과 불안을 떨칠 수 없는 잔인한 4월이기도 했다.

지난 1월 말 동갑내기들이 겨울바다를 즐기겠다고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추위에도 관광지와 유명세를 탄 식당들은 붐볐고 시내 면세점도 여전했다. 마지막 날 제주 4.3평화공원엘 들렀을 때 우린 말을 잇지 못했다. 먼저 우리가 고용한 기사가 4.3 평화공원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부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평생을 택시 기사로 연명했고 지금도 관광객 렌터카를 운전하며 안내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 말이다. 하긴 나도 몇 해 전 정부에서 과거사 청산 작업을 하기 전에는 보도연맹 색출이라는 명분하에 그렇게 잔인한 대학살이 있었는지 몰랐다. 더군다나 충북대 박물관팀의 주도로 유골 발굴 작업을 한 가덕 분터골은 내가 매일 지나다니는 곳이다. 이웃에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아픔을 몰랐으면서 그 기사님을 어찌 나무랄 수 있으랴. 한국판 홀로코스트다.

그 만행을 저지른 자와 그 역사를 국민에게 또 학생들에게 알리지 않고 감추는 자들이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나의 초중고 교과서에 없음은 물론이며 졸업 하는 날까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런 선생님들의 입을 통해 이완용 매국노라는 말은 많이 들었다. 가슴이 시리다. 노 대통령의 의지로 과거사 청산을 한 지금은 중학교 교과서에 4.3 사태에 대해 한 구절 게재 되었고 고등학교 교과서에 몇 줄 게재되어 있다고 한다.

전시관을 나오다가 들어갈 때 무심코 지나쳤던 백비가 눈에 들어왔다. 누워 있다. 심장을 에는 아픔들이 줄줄이 새겨진 것보다 더 많은 상처들이 보인다. 가슴이 아프다.

여행에서 돌아와 주위 이웃학생들에게 4.3 사건을 물어 보았더니 4명 중 한명이 “빨갱이 잡는다고 양민들까지 싹 죽인 거요.” 그나마 한명이라도 조금 알아서 다행인가?

두 학생의 동의를 얻어 앉혀 놓고 나는 밥을 사주면서 이야기를 펼쳤다.

광복이 되면서 인민위원회가 활개를 치기 시작했고 한반도 북쪽을 구 소련이 지배하자 남쪽에는 45년에 미 군정이 시작되었다. 당시 제주에는 남로당이 목숨 걸고 악을 쓰던 시기였다. 47년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3.1절 기념행사를 하고 군중들이 가두시위를 하자 말을 탄 경찰이 보안 차원에서 순찰 하다가 말발굽에 어린아이 한명이 밟히는 사고가 있었고 이를 본 군중들 몇 명이 그 경찰에게 돌을 던졌다. 이에 시위대의 반동으로 착각한 경찰이 쏜 총에 무고한 주민 여섯 명이 그 자리서 숨졌으니 바로 3.1절 발포사건이다. 제주 주민들은 정부와 미 군정에 반감을 넘어 한을 품게 된다. 내 개인 생각으로는 아마 이 상황을 이용해서 남로당은 순박한 주민들을 많이도 부추기고 들쑤셨을 것이다. 와중에 그해 5월 10일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뽑기 위한 투표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슴에 반감을 품은 제주 전체 민관 직장인들은 (95%) 파업을 단행했다. 이에 도지사를 비롯해서 모든 수뇌부를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외지 젊은이들을 모아서 서북청년회라는 우익 단체를 만들어 강공정책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고문치사며 서북청년회의 난폭함 등 제주 사회는 폭발할 것 같은 위기 상황이 온 것이다.

48년 4월 3일 제주의 이산 저산 봉화연기가 피어오르고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하에 무장봉기가 발발한 것이다. 이들의 슬로건은 탄압 중지, 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이다. 이 때 군대에 진압 출동 명령과 동시에 미 군정이 적극 선두에서 진압이 시작 되어 많은 남로당을 검거하기도 했지만 무고한 주민들의 희생은 벼락을 맞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해 11월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령까지 선포했으나 엄격히 본다면 제대로 법률이 수립 되지 않은 상태라서 계엄령이라 기 보다는 대통령령이라는 논란도 있었지만 이로서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어 산골마을은 무조건 불태웠다. 이런 상황이 54년까지 번복되었으니 제주 주민들의 고통을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이젠 세상 보는 눈을 뜨고 자신의 주관을 굳건히 하며 살자고 했다. 세상 돌아가는 것 알려면 신문을 꼭 보라고 했다. 두 고등학생이 한참 들어준 것도 고마운데 딱 꼬집어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가 없다며 문제는 양민들이 아는 것이 없어서 유혹 당한다며 가슴이 뜨거워진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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