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구(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 신상구(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지난 13일은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97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날이었다.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후원으로 백범김구기념관을 비롯해 중국의 상해와 중경, 안동시, 광주시 등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97주년 기념식을 개최했지만 20대 총선이어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무심코 그냥 지나치는 날이 되고 말았다.
1919년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이 우리 민족의 최대 염원인 독립으로 곧장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조금만 더 노력하면 우리도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과 의지를 갖게 했으며 임시정부 수립 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됐다.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연해주에서는 대한 광복군 정부(1914)가 조직됐다.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3.1 운동 이후였다. 3.1 운동이 한창 전개되고 있을 무렵에 13도 대표는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선 정부수립이 필요하다고 결의해 한성 정부를 만들었고 중국 상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연해주에서는 대한 국민의회가 조직됐다.
그러나 전 국민의 열망인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여러 정부를 두기보단 하나의 정부로 통합, 운영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해 민족 지도자들은 수차례의 회의를 거쳐 세 정부를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했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가의 3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을 다 갖추지 못한 망명 정부이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지 못했지만 항일독립운동의 본산으로 대한민국이 정통성을 유지하며 국통 맥을 잇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임시정부를 국내에 두지 않고 상해에 둔 이유는 상하이는 일제의 영향력이 덜 미쳤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공사관이 있어서 외교 활동을 전개하기에 편리했기 때문이다.
단일화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자유민주주의와 공화정을 기본으로 한 국가체제를 갖추고 1945년 해방 전까지 민족독립운동의 선두에 서서 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최근 경향각지에서 대한민국 건국일을 놓고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이 서로 팽팽하게 대립하면서 개천절인 10월 3일로 할 것인가, 일제 시대의 상해 임시정부 수립일로 할 것인가, 해방 후 제1공화국 수립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을 치열하게 전개하고 있어 정치·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임시정부 수립일인 4월 13일을 대한민국 건국기념일로 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건국일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로 정하면 우리 한민족사에서 일제강점기의 빛나는 항일독립투쟁사가 단절된 역사로 기록되고 제1공화국 정부수립에 참여했던 일제 부역자들에게 건국 공로를 인정하는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해 광복회와 진보진영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1948년 7월 17일 제정한 제헌 헌법에도 ‘재 건국’이라는 표현을 썼고, 제1공화국 수립을 주도했던 이승만 대통령 스스로도 그 당시 정부수립 기념 연설에서 ‘건국 30주년’이라고 말한 역사적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일본이 가증스럽게도 일본의 건국기념일을 일본 개국신인 신무(神武) 천황이 일본을 세우고 즉위한 기원전 660년 음력 1월 1일을 양력으로 계산해 2월 11일로 정하고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를 합법적이라고 주장하면서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신생 독립국’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정부가 대세의 흐름에 따라 건국절을 상해임시정부 수립일로 확정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의 민족사적인 정통성을 확립하고 불필요한 건국절 논쟁을 차단, 정치·사회적 안정을 통해 선진민주복지국가로 발돋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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