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대 <화가>

 

내가 여산 이원재(余山 李元載) 선생님을 처음 대면하게 된 것은 1981년 현대 한국화 협회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면서 부터이다. 초대 멤버로는 서울미대학장이던 박세원 교수, 숙명여대 학장이던 이인실 교수, 아산 조방원 화백, 의재 허백련 화백의 애제자인 옥산 김옥진 화백, 청전 이상범 화백의 자제인 이건걸 상명대 학장 등 한국 동양화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이 협회의 초대 발기인으로 참여했는데 충북에서는 과분하게도 40대 초반의 내가 같이하게 됐다.

그때 만난 한사람과의 인연이 내 인생의 큰 징검다리가 돼 그렇게 오래도록 이어가게 되리라고는 그땐 정말 미처 알지 못했었다.

그 몇 달 후 내가 청주에서 서울로 상경하며 나름대로 개인화실이라도 마련할까 싶어 그 당시만 해도 내겐 낯설었던 인사동길을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는데 저 앞에서 누군가 걸어오며 반갑게 “송계 선생 아니시오?” 하며 말을 걸었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바로 협회 이사장으로 추대됐던 여산 이원재 성생님이 아닌가?

자주 만나던 사이도 아니거니와 타향에서 나를 알아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하물며 차나 한잔하자면서 가까운 찻집으로 나를 안내해 주셨다.

자리에 앉아 내가 서울로 올라오려는 연유를 이래저래 들어보시더니 ‘허허’ 웃으시면서 “참 그 용기가 대단하다”고 대견해 하셨다. 그러다 잠시 후에 탁자를 ‘탁’ 치시더니 “아! 참! 내가 근처에 작은 화실을 하나 갖고 있는데 며칠 후에 내가 외국으로 출장을 몇 달 가게 됐네. 급하게 화실을 마련하려 애쓰지 말고 내 사무실에 머물면서 천천히 구해 보는 게 어떨까 싶은데…….”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고마운 제안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때서야 그 분께서도 중·고등학교 재학시절 미술반에서 활동하셨고 지금까지도 소문내지 않으며 틈틈이 그림을 그려오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동아일보,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을 맡으시며 문화부까지 신설하셨고 그때까지만 해도 불모지였던 문화면에 이구열 같은 기자를 훈련시켜 기사를 전담시키고, 키워내셨다는 내용도 차츰 알게됐다.

서슬 퍼렇던 군부독재 시절에도 언론인의 절개를 잃지 않고 개인적으로 그려온 그림 실력은 상당히 수준 높은 서양화였는데 내가 보기에도 전문작가 이상의 좋은 그림을 그려 놓으신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 후 선생님 말씀대로 인사동에 적당한 곳이 있어 화실을 마련했다. 그때부터 여산 선생님과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식사를 하든, 차를 마시든 시간이 있을 때는 술 한 잔까지 같이 모시는 시간이 많았다.

식견이 넓지 않았던 내게 그분의 해박한 지식과 연륜에서 오는 촌철살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은 그야말로 내 흐리멍덩한 정신의 때를 벗겨주시는 듯 그 해박함이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 열두 과목의 스승을 한자리에 모시는 것 같았다. 동·서양을 관통하는 그분과의 시간은 참으로 소중하고 늘 짧고 아쉬웠다.

“돌아보면 나는 참 촌놈 이었구나”

옛날의 내 자신이 참으로 시시해 지기까지 하며 우물 안 개구리로 우쭐해하던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함께 시내에서 강물로, 더 넓은 바다로 그 드넓은 앎의 세계는 무한했다. 그때 뼈저리게 내가 절감한 사실이 있었으니 ‘아! 사람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생각의 폭이 달라지고, 시야가 넓어지는 구나’에 대한 깨우침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선생님께 이런 고백을 해버리고 말았다.

“선생님! 선생님을 뵙고 나면 제 정신이 세척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중 한 예로 어느 날 안부전화를 댁으로 드렸더니 손녀딸이 전화를 받으며 전해주는 말.

“할아버지, 오늘 생신인데요. 증조할아버지 산소에 인사드리러가셨는데 아마 거기 계실 거예요”

나를 낳아준 부모를 내 생일날 찾아뵙는 그 정신.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더불어 나의 그림세계도 관념적인 것에서 차츰 자유로움으로 변화해가기 시작했다. 언제 만나도 국·내외 작가들의 활동과 미술시장의 흐름을 너무나 정확히 꿰뚫어보는 총명함, 기억력, 그 박식함이 정말 존경스럽기도 하거니와 특히나 내가 전시회라도 할라치면 오픈 날부터 끝나는 날 까지 틈틈이 자리를 지켜주시며 함께 즐거워하시고, 격려를 해주시곤 했는데 선생께선 단 한 번도 “작품이 좀 팔렸느냐” 따위의 금전적인 질문은 일체 하지 않으셨다. 처음엔 “이 양반이 작가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너무 모르시는가?” 싶어 어설픈 오해를 하기도 했는데 차츰 뵙다보니 작가의 자존심을 생각한 그분 나름의 속 깊은 배려였음을 알게 되면서 서운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있었다. 작품의 순도를 논하는 그분의 가감 없는 조언이 내게는 그 어떤 칭찬보다도 꼭 필요한 길잡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후배들이 다 어려워하는 그런 어른인데 어떻게 몇 십 년을 그렇게 편하게 모실 수 있냐”며 선생의 고향 후배가 길에서 만난 내게 물어오던 것이 생각난다. 고향도, 학연도 전혀 인연이 없는 한참어린 후배인 나를 그처럼 작가의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챙기고 보살펴주셨다는 것이 내겐 큰 행운이었고 그늘이었다.

그처럼 후배의 허물은 덮어주시고 나름대로 좋은 점은 크게 보셔서 격려하고 사랑을 나눠 주시던 분이셨다. 내겐 큰 언덕이셨던 그 분도 세월을 못 이겨 80 넘어 보행이 불편해지시며 댁에서 요양을 하셨는데 언제나 정신은 꼿꼿하셔서 가끔씩 찾아뵈면 그렇게도 반갑게 맞아주셨고 여전히 활동하는 나보다 더 환하게 미술계의 흐름을 꿰뚫고 계셨다.

작년 90세로 수명을 다하셨는데 ‘박영대의 그림책 2016’을 못 보여드리는 것이 아쉽다.

“잘했어! 잘했어!” 대견해 하시며 어깨를 두드려 주셨던 선생님.

좋은 일이 있으면 제 마음은 언제나 선생님을 만나러 갑니다.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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