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이다” 육촌동생이 소리치며 헐래 벌떡 뛰어온다. 어디? 하면서 조심조심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봉분 옆으로 땅굴을 뚫고 그 안에 여차하면 날아오를 자세로 까맣게 벌들이 매달려 있다. “피해” 소리치고 달아났다.

우리 형제들은 육촌, 사촌 모두 합하여 열일곱 명으로 일 년에 한번 벌초 때 만나는데 오늘이 그날이다. 벌초는 우리 민족이 대대로 내려오는 미풍양속으로 고향근처에 사는 후손이나 외지에 나간 후손들이 찾아와서 조상의 묘에 자란 풀을 제거하고 묘 주위를 정리한다. 백중이 지나 처서가 되면 풀의 성장이 멈추기 때문에 오랫동안 산소가 깨끗이 보전되며 추석에 성묘를 하기 위해서 반드시 추석 전에 벌초를 끝내야 한다.

멀리서는 부산, 인천에서 형제들이 모였다. 원래 선조들께서 손이 귀하여 독자로 내려오시다 할아버지 삼형제를 시작으로, 큰할아버지는 사형제, 둘째, 셋째 할아버지는 형제를 두셔서 모두 여덟 분으로 그중에 두 분은 육이오 때 행방불명되시고 여섯 분이 낳으신 사촌, 육촌 형제가 열일곱 명이 되었다. 물론 딸들을 제외한 아들만 열일곱 명의 형제들이 모여서 우리 집안의 제일 선조이신 ‘신자’ ‘영자’ 할아버지 성함을 딴 ‘신영회’를 조직하여 벌초와 함께 총회를 연다. 어렸을 때에는 할아버지 형제분들과 아버지 형제분들이 일일이 낫으로 벌초를 하루 종일 걸려 했는데 지금은 모두 돌아가시고 작은아버지와 당숙 두 분만 계신다.

형제들이 예취기 3대로 윙윙거리며 벌초하면 점심때쯤이면 끝난다. 벌초 후에는 ‘신영회’ 총회를 겸하여 점심 먹으러 간다. 오늘은 초평저수지로 메기매운탕을 먹으러 가기로 하였다. 회의를 할 만한 안건은 없지만 그동안 있었던 일 등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먹는다. 오늘 주 안건은 산소자리가 우리가 자리해야 할 공간이 없으니 대책을 논의 하는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살아계신 아버지 대에서 작은아버지와 당숙아저씨 두 분 공간만 여유분으로 남아 있다.

종중 땅(논)을 팔아서 산소자리를 사자는 안과, 지금 자리에 납골당을 지어 모두 한군데 모시자는 안이 대립했다. 벌써 우리 자리를 걱정해야 할 시기가 왔는가? 하는 생각에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납골당으로 하자는 안에 찬성하는 형제들은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지 않아도 되고 힘들게 벌초 등 관리를 안 해도 된다는 얘기였다. 우리가 없으면 누가 관리할 것이냐? 맞는 말이다. 우리 다음 세대인 아들들을 참석시키려 별 당근책을 써도 효과가 없다. 한편 벌초를 안 하면 형제들이 오늘처럼 함께 모일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는 거네 하는 생각이 스친다. 결국 결론 없이 차차로 생각해보며 결정하자고 했다. 차 없이 온 동생들은 오랜만이라고 술도 거나하게 나누고 동안 밀린 애기도 나누는데 나이 먹은 형제들은 거의 말이 없이 동생들 말만 듣고 있지만, 오랜만에 만난 형제들인지라 말로 표현은 안 해도 반가운 표정이 역력하다.

벌초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는 없지만, 제사와 함께 유교가 전해지기 시작한 조선시대일 것 같다. 형제들 간에 우애를 나누라고 벌초나 제사를 만들어 관습으로 내려오는 것은 우리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미풍양속이 아닐까?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지혜로운가 생각된다. 벌초하는 중 형제 중에 누군가가 말했다. 벌초가 없다면 우린 언제만나나? 몇 년에 한번 있는 큰일 있을 때나 만날까. 만날 일이 거의 없다. 이럴 듯 조상들께서는 후손들이 사이좋게 우애를 가지고 살라고 제사도 만들고 벌초라는 것을 만들지 않았을까? 물론 조상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의미가 더 크겠지만, 조상이 없었다면 우리가 존재하지도 못했을 테니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겠다. 옛말에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 이란 말이 있듯이 조상님들이 낳아 키워주시고, 자손이 잘못되면 그 잘못 까지도 조상님들이 덮어 쓰신다. 그러니 살아 계실 때는 물론이거니와 돌아가신 후에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잘 모셔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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