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현
-다자이후의 오노조(大野城), 미즈키(水城), 기이조(基肄城)

▲ (왼쪽부터) 오노조(大野城), 미즈키(水城)跡 개관, 기이조(基肄城) 토성.

현재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시에 위치한 다자이후는 고대일본의 규슈 지배와 외국으로부터의 외교사절 접대 등을 담당했던 곳으로 당시 서쪽의 수도로 불릴 만큼 번영했다. 660년 백제의 사비성이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함락당한 후 백제와 일본의 연합군이 663년 백강 어귀에서 신라와 당의 연합군과 해전을 벌이지만 결국 백제는 멸망하고 많은 유민들이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후 일본의 야마토 정권은 신라와 당에 의한 일본열도 공격의 위험에 직면하게 돼 당시 대륙의 관문이었던 규슈일대의 방어에 부심하지만 그 중에서도 다자이후의 방어는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다자이후의 주변에 성을 쌓아 외부의 적을 방어하려 했다. 그 성들이 바로 오노조(大野城), 미즈키(水城), 기이조(基肄城)인데 이중에서 오노조와 기이조는 산성이고 미즈키는 평지에 있는 성이다.
당시 일본은 이러한 성을 축조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성의 축조는 백제에서 망명한 사람들의 감독 하에 진행됐다. 이러한 축조 사실은 일본 측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도 잘 기술돼 있고 또 이렇게 백제의 망명귀족들에 의해 축조된 성들을 일본에서는 ‘조선식 산성’으로 부르고 있다.
먼저 오노조에 대해서 살펴보면 이 산성은 다자이후의 북쪽에 위치한 해발 410m의 시오지산(四王寺山)에 축조돼 있다. 성의 길이는 총연장 6.2km, 성내의 면적은 180ha로 상당히 큰 규모의 포곡식 산성(성의 내부에 계곡도 포함하고 있는 산성)이다. 성벽은 토루와 석루가 혼합돼 축조돼 있고, 그 모습이 아직도 잘 남아 있다. 성의 내부에는 건물터가 남아 있고 또 건물의 축조에 사용됐던 백제계 와당도 발견됐다. 기이조는 다자이후의 남쪽 약 7km 떨어진 해발 415m의 이야마(基山)산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성은 총연장 약 4.2km, 성의 면적은 약 64ha, 성벽은 토·석축(土·石築)혼합의 포곡식산성이다.(岩波日本史辭典)
이상의 오노조와 기이조의 축조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텐치 4년(天智 4년, 665년) 8월조에 백제의 망명귀족인 억례복류(憶禮福留)와 사비복부(四比福夫)에 의해 축조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실제로 이 두 성은 현재 한국에 남아있는 백제지역의 산성과 비교해 볼 때 많은 유사점이 발견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산성의 축조 방식이 한국 고대의 산성 축조방식인 판축공법(흙을 다져서 몇 개의 층으로 나누어 쌓는 방식)을 채용하고 있는 점, 그리고 산성의 입지가 백제 사비시대에 있는 도성의 배후에 산성을 축조하고 있는 것과 같이 다자이후의 배후의 산성으로 위치하고 있는 점이다. 이 경우 산성은 유사시의 피난성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미즈키는 엄밀하게 말하면 성 보다는 제방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미즈키는 다자이후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는데 축조 목적은 다자이후의 입구에 제방을 쌓고 그 안에 물을 넣어 인공적인 저수지를 만들어 방어에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즈키의 규모는 길이 1.2km, 높이 13m, 기저부의 폭이 80m이며 흙을 이용한 판축공법으로 축조됐다.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텐치3년(天智 3년, 664년)조에 축조 기록이 남아 있다. 축조 담당자에 대한 기록은 ‘일본서기’에 남아 있지만 축조방식에 판축공법을 사용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백제의 축조 기술자가 관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소]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시(福岡縣 太宰府市)
[교통편] 다자이후(太宰府)까지는 규슈(九州)의 하카타(博多) 역에서 JR 가고시마(鹿兒島)본선을 타고 도후로(都府樓) 역에서 하차, 오노조(大野城)는 택시로 이동 가능.

-조선 왕족 일연(日延)과 하카다 묘안사(妙安寺)

▲ (왼쪽부터)妙安寺 입구, 도가와가 조각한 일연상

2002년 10월 23일. 조선 선조의 맏손자로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뒤 그곳에서 출가해 큰 족적을 남긴 일연(日延·1589~1665) 스님이 마침내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의 일본에서 삶의 자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이 발발해 함경도로 피난간 선조의 장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가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에 의해 포로가 되는 참변이 일어났다. 이들은 강화교섭에 의해 풀려났으나 함께 붙잡힌 임해군의 두 남매는 분로쿠(文祿) 원년(1592)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포로로서 끌려 왔다. 그러나 정유재란을 포함해 몇 년간 지속된 전쟁과 임해군의 불우한 종말로 인해 두 남매는 결국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일본에서 한 평생을 보내게 됐다.
임해군의 아들인 일연(선조의 장손)은 하카다(博多) 호쇼지(法性寺)에서 닛쿄(日敎)에 의해 머리를 깎고 여러 곳에서 수학과정을 거친 후 26~7세경 니치렌슈(日蓮宗) 개조 니치렌(日蓮)의 출생지인 지바(千葉) 고미나토(小溱) 다뇨지(誕生寺)의 주지, 즉 관주(貫主)가 되면서 니치렌슈 승려로 일본 불교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는 관주 시절 조사당(祖師堂)을 짓는 등 사찰의 기반을 닦는 한편 현재 기타규슈시 야하타(八幡)구로 이전한 용잠사(龍潛寺)나 에도의 가쿠린지(覺林寺), 엔신지(圓眞寺) 등의 중건이나 건립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1630년 사령(寺領)문제에 관한 논쟁인 신지대론(身池對論)에 의해 에도에서 추방됐다. 일연은 니치렌 호케슈(法華宗) 이외의 신자에게는 보시를 받지 않는다는 불수불시파(不受不施派)의 일곱 성인의 한 사람이 됐지만 이 파는 에도시대 내내 막부에 의해 금지된 일파로 일연의 이름이 역사 속에 희미하게 묻혀지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일연은 이즈(伊豆)의 섬에 유배된 같은 일파와는 달리 멀리 규슈로 향했다. 하카다는 처음 출가한 지역이기도 하지만 조선과 가까운 곳이었고 또한 그의 여동생 묘경일법(妙慶日法)이 사는 곳이기도 했다. 그녀는 일연과 함께 끌려와 구로다(黑田)번의 도가와 미치야스(戶川達安)와 결혼했고 일연은 이를 인연으로 구로다가의 도움을 받아 고쇼지(香正寺) 그리고 1660년에 조선쪽을 향하고 있는 바다 근처에 묘안지(妙安寺)를 개창했다. 그가 1665년 77세로 열반한 묘안지에는 여동생 일법의 손자인 도가와(戶川俊勝)가 조각한 일연상이 있으며 도가와가는 지금도 묘안지의 대단월로 남아 있다. 한편 고려요사(高麗遙師)로 불린 구마모토 혼묘지(本妙寺)의 3세인 일요(日遙)도 당시 조선에서 끌려온 인물로 이들은 이곳에서 많은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구로다는 바둑을 좋아해 일연스님과 수시로 바둑을 즐겼는데 하루는 일연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 연유를 물은 즉 장마로 강을 건널 수가 없어서 오지 못했다는 신하의 이야기를 듣고 그 즉시 그가 올 수 있도록 다리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그 다리가 하카다에서 가장 큰 대교이며 지금도 하카다오오하시라고 이름이 불리고 있다. 
겨우 4살에 일본으로 온 그가 하카타(博多) 법성사(法性寺)에 출가해서 치웅(台雄) 또는 대응(大應)이라고 일컬어지고 16세가 된 승려는 쿄토(京都) 혼고쿠지(本圀寺), 시모우사(下總) 이이다카(飯高檀林)에게 배워 드디어 칸에이(寬永) 4년(1627) 고미나토(小湊) 단조지(誕生寺)의 18대로 영립돼 가관원 일연(可観院日延)으로 개칭했다.
칸에이(寬永) 7년(1630) 2월, 에도(江戶) 성에서 실시한 신지 대담에 의해 추방과 유죄의 죄과를 받은 일연 스님은 칸에이(寬永) 9년(1632) 하카타(博多) 법성사에 몸을 의지하고 후쿠오카 지방영주인 구로다(黑田忠之)에의 귀의(歸依)가 받아들여져 야쿠인(藥院) (현 警固)에 9000평의 절과 토지를 받아 향정사(香正寺)를 창건했다.
만지(萬治) 3년(1660) 일연스님은 고국 조선이 보이는 땅에 거주하는 것을 청원해 이자키하마(伊崎浜) (현 唐人町)에 3000평의 절과 토지를 받아 ‘해복산 묘안사(海福山妙安寺)’를 건립해서 은거, 관분(寬文) 5년(1665) 정월 26일 희수를 맞이한 그 해 그는 파란에 찬 생애를 이국의 땅에서 마쳤다.


[주소] 810-0063 후쿠오카현(福岡県) 후쿠오카시(福岡市) 주오구(中央区) 당인정(唐人町) 2쵸메(丁目) 4-59. 전화=☏092-751-4024.
[교통편] 하카다역에서 전차로 가라쓰(唐津)역에 하차 1.5km정도.
        후쿠오카한국총영사관에서 500m정도.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