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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포럼-'조명희 전집을 읽고'(2)
지상 포럼-'조명희 전집을 읽고'(2)
  • 동양일보
  • 승인 2017.03.05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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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경계인, 그 철망(鐵網) 속의 외침- 조명희와 부산 -

김태만 한국해양대 교수

포석에게 부산은 이미 낯익은 도시였다. 동경(東京)으로 유학을 떠나던 그해(1919) 관부연락선을 기다리며 묵었던 곳도, ‘동우회순회연극단(同友會巡廻演劇團)’을 조직해 홍난파(洪難破), 김우진(金祐鎭), 윤심덕(尹心德) 등과 전국 순회공연을 위해 첫발을 디딘(1921) 곳도 부산이었다.

‘김영일의 사(死)’는 근대적 의미의 대학극단 순회공연의 개막이었다. 부산에서 시작해 경성의 단성사에 이르기까지 장장 40여일 간의 공연마다 “잘한다, 잘한다!”라는 박수소리를 들었을 그들의 감격을 백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가 감히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동경 유학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 와 이런 저런 궁리에 머리가 뒤숭숭하던 어느 여름날, ‘수산이 죽었다’(1926년 8월 4일)는 급보를 접했다. ‘동아일보’는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시모노세키를 떠나 야간항해를 하던 도쿠슈마루(德壽丸)에서 수산과 심덕이 함께 새벽 바다로 뛰어 들어 정사(情死)했다고 전했다. 김우진이 목포 최고 갑부집 장남이자 수재였고, 윤심덕이 최고의 성악가로 성장할 미모의 관비유학생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삿거리가 되었다. 신문들은 그 후로도 한참동안 이 둘의 기사에 열을 올렸다. 포석에겐 기사가 도저히 써 낼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실감을 주었다. 유학시절, 가난과 배고픔은 물론 미래 없는 디아스포라의 막막함과 ‘정신적 고독’을 함께 고뇌하며 한없이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평생을 신뢰할 친구’(‘金水山군을 懷함’)였기에 우진(水山은 그의 호)의 죽음이 포석에게는 지울 수 없는 아픔이 되었다. 우진이 떠난 이듬해(1927)만 해도 포석은 두 번이나 부산을 찾았다. ‘해면의 조망(眺望)’이 탁월하거나, ‘훌륭한 로멘스냄새가 나는 곳도 아니지만’(‘단상 수편’), 포석은 다른 해변도시보다 부산을 사랑했다. 마치 꿈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 주는 기차를 상상할 때면 포석은 ‘부산역’을 떠올렸다(‘땅 속으로’). 포석에게 각인된 부산은 과연 어떤 이미지였을까? 친구와의 추억이나 그 흔적을 찾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포석이 내왕했던 1919~1927년 즈음만 해도 부산은 조선 제일의 예술 도시였다. 조선 최초의 영화관이 서고 조선 최초의 영화사도 탄생했다. 일본과 조선반도를 잇는 유용한 교통편 때문이었겠지만, 식민지 경제의 ‘제한된’ 풍요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김영일의 死’가 부산을 첫 무대로 선택한 이유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외양에 불과했고, 부산은 심각한 일제의 수탈경제 속에 허덕이고 있었다. 일제의 수탈경제 첨병 노릇을 했던 항구도시의 기능만으로도 그 까닭은 쉽게 찾아진다. 일제는 조선반도에 대한 경제권 박탈을 위해 토지와 삼림(森林)은 물론 소규모의 민족기업 마저 모조리 수탈하려는 의도를 노골화 했다. 1912년부터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은 농민을 토지로부터 몰아내고 조선인의 재부를 일본인의 손에 넘겨주기에 급급했다. 부산은 물론, 광활한 농토가 있었던 김해나 양산도 다르지 않았다.

특히 부산은 부두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극심했다. 이런 배경 위에서 노동계급의 프롤레타리아운동의 가능성과 민족저항운동의 맹아가 점차 숙성해 가고 있었다. 그 결과, 조선총독부와의 대립갈등이 고조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저항 운동이 시작되었다. 조국을 상실한 민족에게 자유로운 영혼은 존재할 수 없었다. 땅을 빼앗긴 자들은 봄이 와도 기꺼이 할 일이 없었다.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도 속수무책이었다. 가난과 배고픔, 민족적 억압과 일제의 마름으로 변신한 친일세력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1921년 9월, 5000명이 모여 근 한 달여를 끌었던 부두노동자 파업은 부산 최초의 저항운동이자 전국적인 항일투쟁의 모범이기도 했었다. ‘동아일보’(1921년 9월 28일자)는 “수천 명의 인부가 운집해 노동하던 광경은 돌연히 자취를 감추고, 화로에 불이 꺼진 것처럼 부두에는 찬바람이 돈다. 배들은 짐을 부리지 못하여 발이 묶이고 되돌아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미 1919년 3·1운동 시기에 고향 진천(鎭川)에서 일제에 항거해 만세운동을 했다가 투옥당한 경험이 있었고, 동경 유학 시절에도 줄곧 민족적 억압을 의식하고 있었던 포석이 부산의 부두노동자 파업을 간과했을 리 없었을 것이다.

1927년 늦은 가을 어느 날, 밤을 새워 달린 기차가 포석을 살포시 부산역에 내려놓았다. 아마도 그는 “울적한 생각이 일제 휑하니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나면, 그래도 조선 안에서는 먼저 부산이 생각난다”(‘단상 수편’)라고 할만큼 객수병(客愁病)을 지닌 센티멘탈리스트였을 지 모른다. 그날 오후, 으레 그랬듯 포석은 동래의 온천을 갔다가 여관이 있는 영주동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을 터라 포석은 바로 여관에 들지 않고 바닷가 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바닷가 어느 토목 공사장의 여성노동자들이 부르는 노동요와 그들이 켜놓은 어스름한 등불에 이끌려 발길 닿는 대로 끌려 가고 있었다.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는 마름들의 횡포에 항거하는 파업현장이었다. “우리가 이 밤에 이 일을 왜 하노 / 에헤 헤헤 에헤요! / 죽지를 못해서 살자고 이 노릇하지 / 에헤 헤헤 에헤요!” 여성노동자들의 애절한 노랫소리에 가슴이 서늘히 내려앉은 포석은 그냥 먹먹한 마음에 담배만 빨아 댔다. 아마도 이 땅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직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인텔리겐챠의 마지막 선택을 생각하며…….

포석의 정신계에 있어서 1927년은 질풍노도의 시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유일한 친구가 갔고, 가난과 배고픔은 형벌처럼 들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지식이나 글을 팔아먹고 살기(‘서푼짜리 원고상 폐업’, ‘저기압’)에 식민지 조국은 포석을 품어 낼만큼의 품도(稟度)를 갖지 못했다. 머리는 서구사조로 무장했으나 몸은 봉건의식을 떨치지 못한 채, 포석은 가족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고뇌하고 있었다.(‘R군에게’, ‘이쁜이와 용이’ 등)

고향을 등지고 서울과 부산을 떠돌며 포석은 민족과 계급의 현실을 목도했다. “케케묵은 소리만 탕탕하는 봉건유물(封建遺物)인 늙은이들, 이것들이 지금은 죽게 되었을망정 한 삼사십년 전에는 승지니 참판이니 하며 높이 걸터앉아서 민중을 호령하며 억압하던 자들……. 자본주 지주들, 놈들은 일본제국주의 세력이 물밀 듯 이 땅에 침입하여 들어 올 무렵에 샘물 같은 웅덩이에 꼬리치는 올챙이 떼같은 무리들, 지금은 지난밤 비바람에 벌레 먹은 풋대추같이 몰락당한 무리들”(‘한여름 밤’)에 억압받고 신음하는 노동자, 농민 그리고 조선인을 친히 목도하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빼앗긴 조국, 동척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더 이상 노력해 농사지을 이유조차 없어졌고, 땅을 부쳐서는 더 이상 입에 풀칠할 도리도 사라졌다. 거기서 “놀고먹는 계급이 생기고, 일하여 먹여주는 계급이 생겼다. 다스리는 계급이 생기고, 다스려지는 계급이 생겼다. 그로부터 임자 없던 벌판에 임자가 생기고 주림을 모르던 백성이 굶어 죽어가기 시작했다.”(‘낙동강’)며 ‘계급의 탄생’을 체감한다. “봇짐지고 어린 아이 업고 바가지 찬 젊은이, 늙은이, 사내, 여편네, 적지 않은 떼가”(‘농촌 사람들’) ‘서간도’로 몰려가야 했다. 억압과 착취가 없고 노동한 만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새로운 땅을 찾아(‘춘선이’) 민족이 이산(離散)한다. 중국이건 러시아건! 조국은 더 이상 밥도 안전도 희망도 제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강도짓을 하지 않거나(‘땅 속으로’, ‘마음을 갈아먹는 사람’) 죽지 못한 사람들만 거지처럼 살아남은 공허한 조선(‘한여름 밤’과 ‘집 없는 나그네의 무리’, ‘새 거지’)은 더 이상 포석의 고향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침내 연해주로의 망명(1928년 8월 21일)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포석은 식민지 모순이 극대화되어 급격한 사회운동이 다양하게 탄생하고 실험되고 있던 20년대 부산과 김해의 사정에 매우 밝았었다. 그런 점에서, ‘낙동강’의 탄생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늘 떠남을 꿈꾸고 있었던 포석에게 ‘부산역’은 종점이자 시작이었을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문학적 상상력이 배태되고 재현되어지는 포석 문학의 ‘지금, 여기’였을 것이다. 청년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노동운동에 형평운동까지 두루 섭렵되고 실천되었던 현장에서 포석이 문학적 희망의 단초를 얻었을 것은 분명하다. “내가 해외에 가서 다섯해 동안을 떠돌아다니는 동안에도 강이라는 것이 생각날 때마다 낙동강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라는 주인공 박성운의 술회를 통해 ‘낙동강’에의 끈질긴 착근성(着根性)을 노정한다.

포석은 계급해방을 목표로 하는 프로레타리아 혁명을 꿈꾸면서도 깊은 민족해방사상을 겸비한 운동가요 사상가요, 문학가였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진천만을 고향이라 여기지 않고 서울과 부산은 물론 북경과 동경 그리고 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로프스크까지 넘나들 줄 아는 진정한 경계인이었다. 그런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희곡, 시, 소설에 문학평론까지 그 어느 누구도 뛰어넘지 못할 광폭한 문학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포석 조명희의 소설

김승환 충북대 교수

한국소설의 이정표에 해당하는 많은 작품이 있다. 그중에서 포석 조명희(1894~1938)의 대표작 ‘낙동강’은 여러 면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낙동강’의 줄거리는 첫째, 사회주의자 박성운이 걸어온 혁명가의 일대기 둘째, 박성운의 동지이자 애인인 로사가 그의 뒤를 이어 새로운 혁명가로 탄생하는 과정의 두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조명희는 장편의 내용을 단편보다 약간 긴 분량으로 썼지만 ‘낙동강’의 의미는 대단히 크다. 이 문제적인 작품의 마지막은 이렇다.

“그는 로사이다. 아마 그는 돌아간 애인이 밟던 길을 자기도 한번 밟아 보려는 뜻인가 보다. 그러나 필경에는 그도 멀지 않아서 다시 잊지 못할 이 땅으로 돌아올 날이 있겠지.”

‘낙동강’의 주인공 박성운은 삼일운동 때 옥살이를 한 후 5년 동안 간도, 러시아, 중국에서 피압박 민중을 위한 투쟁을 했다. 그리고 조선에 돌아와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했지만 대부분 실패한다. 하지만 박성운의 감화를 받은 로사가 판임관인 교사를 포기하고 혁명가로 태어남으로써 새로운 희망의 싹을 틔운다. 그러므로 박성운의 일대기가 이야기의 주류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로사라는 사회주의적 인간형의 탄생이 이 소설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여성혁명가 로사는 식민지의 어두운 시대에 역사적 전망을 보여주는 새로운 전형(典刑)이다.

1927년 작 ‘낙동강’은 프로문학운동의 방향전환과 관계있다. 그것은 ‘낙동강’이 자연발생의 신경향파에서 목적의식의 프로문학으로 전환하는 상징적 작품이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프롤레타리아문학진영은 마르크스 혁명론을 작품에 직간접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 과정에서 내용이 중요하다는 주장과 형식도 중요하다는 주장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는데, 작가는 조선민중의 고통을 묘사하는 동시에 민족해방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결론은 일치했다. 특히 계급투쟁으로 일제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민족해방의 방략이 많은 지지를 받았다. 조명희의 ‘낙동강’은 그런 프로문학의 방향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작품이었다. 이것은 당시의 시대상황과 시대정신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식민지 상황에서 작가는 어떤 주제로 작품을 쓰든 조국의 해방을 외면할 수 없다. 그래서 저명한 문학평론가 후레데릭 제임슨(F. Jameson)은 식민지나 반식민지의 작가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민족해방의 열망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던 것이다. 1923년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조명희는 조선의 현실을 목도하고 문학을 통한 민족해방의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지배자인 일본제국주의와 피지배자인 조선민중의 관계는 계급적으로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그리하여 조명희는 1925년 결성된 카프(KAPF)의 프로문학운동에 참여하면서 ‘낙동강’을 비롯한 여러 소설에서 무산대중의 고통스런 현실을 핍진하게 그렸던 것이다.

조명희 소설은 초기부터 후기까지 사회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초기작 ‘땅속으로’와 ‘R군에게’에서 피폐한 조선의 현실과 고통 받는 조선민중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중기에 들어 ‘낙동강’과 ‘이쁜이와 룡이’에서 보듯이 사회주의적 전망을 더 강렬하게 표현한다. 한편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한 시절의 소설 ‘붉은 깃발 아래에서’는 유실작이지만 제목만으로도 사회주의적 사상성이 강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명희가 민족해방과 사회주의적 전망을 담아낸 창작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미래를 낙관적으로 인식하는 혁명적 낭만주의와 둘째, 현실을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고리키류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조명희의 소설은 대체로 삼인칭관찰자의 서술시점을 취한다. 그리고 서사의 흐름이 빠르고 단순한 것이 특징이다. 반대로 섬세한 내면묘사가 적으며 문체는 거칠고 투박하다. 이것은 조명희가 서사적 골격을 중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식민지 조선민중들의 애환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조선민족이 나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했음을 증명한다. 그래서 조명희의 소설은 형상화가 부족하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소설사에서 포석 조명희의 의미와 가치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민족의 현실과 민중의 삶을 낭만주의와 리

얼리즘으로 담아낸 포석 조명희의 소설은 한국소설사의 금자탑 중 하나다.

 

조명희의 생명의 영원한 발걸음

카타오카 류(토호쿠대학 교수)

 

조명희는 일본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문학가이다. 물론 한국근대문학의 전문가들에게는 잘 알려진 인물이겠지만, 몇 편의 시와 단편소설이 번역되어 있는 정도일 뿐, 조명희를 주제로 한 논문은 아직 한 편도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시인인 코이케 마사요(小池昌代)씨가 동서고금의 명시 41편을 선정한 ‘출근길 지하철에서 읽는 시집(通勤電車で読む詩集)(NHK出版·2009)’에는 조명희의 ‘봄 잔디밭 위에’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코이케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덟 살인가 아홉 살 때였다. 이 세상에는 ‘시의 힘’이라는 것이 작용하고 있고, 그것은 인간이 살기 위해 필요한 힘이라는 것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확신하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 시라는 것은 삶의 전제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의 언어는, 모래에 스며드는 물과 같이, 피곤한 육신에 스며들어 왔다. 뜻하지 않은 구절을 만났을 때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던 경험이 몇 번이나 있다. 사람들 눈이 부끄러웠지만 시의 작용은 마치 펌프처럼 지하에서 감정을 퍼 올린다. 울려고 읽는 것은 아니지만 뜻하지 않게 눈물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울었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울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코이케씨가 조명희의 시를 읽은 것은 물론 원문이 아니라 김시종(金時鐘·1929~) 번역 ‘재역조선시집(再訳朝鮮詩集)(岩波書店·2007)’에 의한 것인데, 설령 번역을 통해서라도 시인의 직감(直覺)은 프롤레타리아문학의 한 예로 ‘낙동강’이라는 책 이름을 들 정도로 일본의 한국근대문학사에 대한 인식의 틀을 훨씬 넘어서, 조명희의 혼과 직접 공명하고 있는 것 같다.

김시종씨의 ‘재역’은, 식민지시대에 출판되어 이후에 이와나미문고(岩波文庫)에도 수록된 적이 있는 김소운(金素雲. 1907~1981)역 ‘조선시집(朝鮮詩集)’을, 재일교포 시인인 김시종씨가 과거의 종주국의 언어의 속박(呪縛)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원시(原詩)로부터 직접 번역한 것이다.

김소운의 번역과 김시종의 번역의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봄 잔디밭 위에’ 제2연의

 

엄마! 엄마! 소리를 내었더니

땅이 우애! 하늘이 우애! 하오매

어느 것이 나의 어머니인지 알 수 없어라

 

에서 “엄마!”나 “우애!”를 ‘재역’에서는 원어의 소리 그대로 가타카나로 표기한 점은 명백한 차이이다. 코이케씨도 이 부분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울고 있는 것 같은 감각,” “인간이 살기 위해 필요한 (시의) 힘”이라는 말은 실로 조명희 문학의 본질을 형용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적 직감(直覺)이 부족한 내가 그래도 조명희의 혼의 울림이 들린다고 느낀 것은, 2014~2016년에 ‘동양일보’에 연재된 ‘조명희평전’에도 소개된 적이 있는 김소운의 조명희 회상(‘비규격(비현실)의 떠돌이 인생’ 21~24회, ‘중앙일보’ 1981.1.29~2.2)이다.

“포석 조명희씨를 대하면 마음은 구김살 없는 소년으로 되돌아간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회상은 “힘들여 밀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포석의 집에 대해 서술한 다음에, “포석을 처음 만난 그날부터 그의 인간적인 매력은 나를 압도해 버렸다”로 이어진다.

포석의 집을 처음 방문한 날, “포석은 소년같은 정열로” 김소운에게 “시를 읽어주고, 시론의 원고를 들려주고 하면서 밤 깊은 줄을 몰랐다.” 그때까지 김소운은 한국・일본 등의 수많은 시인을 만났지만, “포석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준엄한 시인은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밤, 포석의 집에 머문 김소운은 새벽녘에 부인이 포석에게 쌀이 없다고 조용히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포석은 모레까지 갚겠다고 약속하며 김소운으로부터 5엔을 빌리는데, 다음날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약속한 날은 하루 종일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밤 10시경, 김소운의 숙소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까, 전신에 눈을 뒤집어쓴 포석이 서 있었다.

포석은 늦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5엔짜리 지폐를 김소운의 손에 쥐어 준 다음에 “객지 사람의 주머니를 털어서 미안하오. 그럼 잘 자시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눈물겨운 감동으로 나는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고 김소운은 기록하고 있다.

김소운은 또 그의 최초의 시집 ‘출범’에 실린 50~60행에 이르는 조명희의 장문의 서시의 일부를 소개하고 있다: “사랑을 나누고 싶구나! 목숨을 같이 누리고 싶구나!” “굴레 벗은 말같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그 자유를 만나기 위해서 그 사랑을 다시 찾기 위해서-.”

포석의 자신에 대한 준엄함은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고, 억압 없는 생명을 함께 향수하는데 대한 정열적인 희망과 깊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김소운의 회상을 통해서 나에게 울림을 준 것은 조명희의 이와 같은 혼의 외침이었다.

시집 ‘봄 잔디밭 위에’의 머리말에서 조명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술은 색다른 영혼, 제 자신의 전적(全的) 발로이다.” 여기에서 ‘색다른 영혼’이란 무엇일까?

 

공간의 무한의 길을 걷는 우주를 한 불사조에 비할진대 우주 자체나 한 마리의 새나 한 사람의 영혼이 무엇이 다르리오.

한 생명이 굴러나감에 거기에는 반드시 선과 빛과 소리가 있을 것이다. 한 마리의 새가 허공을 저어 끝없이 날아감 같이 우리의 영혼이 심화되고 정화되어 나갈수록에 걸음걸음에 아름다운 곡선과 빛과 소리가 있을 것이다.

 

하나의 생명이 끊임없이 굴러가면서 영혼은 심화되고 정화되어, 아름다운 선과 빛과 소리가 되어 나타난다. ‘색다른 영혼’이란 그 각각 다른 생명의 궤적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한 마리의 불사조에 비유되는 우주 자체의 무한한 발걸음이기도 하다.

‘색다른 영혼’을 지닌 생명이 자신을 전적으로 발로시킬 수 있으면, 우주 전체의 생명도 암흑이 된다. ‘김영일의 사(死)’에서 마지막으로 김영일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죽는다.

 

거기 새 세계가 열리니. 그러고 다 같기 ‘나’라는 참된 마음을 믿게. 위대하며 진실한 ‘나’라는 것 즉, 신을 믿으란 말이야. 세상이야 학대하든 말든 ‘나’라는 것을 존중히 여기게.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게. 사람이란 다 사람이니···.

 

여기에서 서술되고 있는 것은 단순한 개인주의의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나’라는 ‘색다른 영혼’으로, 그런 영혼을 지닌 자기와 타자 모두를 존중하고, 서로 사랑하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를 조명희는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아직 극히 소수이지만, 조명희가 ‘작은 새와 같은 시인’이 많다고 평가한 일본에도 포석의 혼의 울림이 들리기 시작하고 있는 것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그의 영혼이 ‘공간의 무한의 길’을 여전히 걷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번역 : 조성환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포석 조명희 단상 1 : 탈주

김연숙 충북대 교수

시들 중에는 시인의 시상(詩想)과 심상(心狀)의 구조를 직접화법으로 간결하게 표현하여 한 폭의 회화처럼 시상(詩象)을 그려내는 경우가 있다.

그로부터 시인의 영혼의 비밀이 누설되면서 그 신비가 드러난다.

처음 접한 포석의 우아한 시 ‘경이’는 그의 이력1)이 주던 강한 이미지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심혼이 갈망하던 영성과 그에 비례하여 상처로 다가왔을 수난과 모욕의 고통에 대한 나의 공명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시상(詩想)의 특이성은 생명에 대한 경외감과 찬사다.

그것은 생명의 흐름과 생명의 율동2)에 대한 감지로부터 우주생명 내지는 우주 덩이를 대면하여3) 찬사와 축원의 기도를 올리는 영성에 이른다.4) 일반적으로 우주생명이라든지 생명의 흐름 등등의 말들은 한 눈에 잡히지 않아서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런데 포석의 경우 다복한 이삭들, 툭 떨어져 내리는 밤톨 한 알, 책상 위에 놓인 도토리 한 알, 예쁘게 생기지 않은 주인 노파의 딸 등에서 우주생명을 구현하는 개체생명의 얼굴을 본다.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하나의 생명의 흐름으로 느끼고 그 속에 발현되는 각각의 개체적 생명체들의 존엄함을 각성한 포석이기에, 그 존귀한 생명체들이 겪는 수난과 모욕에 대한 고통을 회피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어진 사람이야말로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다”라고 공자가 말하였듯이, 포석의 생명에 대한 사랑이 클수록 반-생명적인 것에 대한 미움과 절망은 컸던 것 같다. “나는 인생에 절망을 가졌으며, 인간을 무던히 미워하여 왔었다”5) 라고 말하는 포석의 절망과 미움의 대상은 무엇인가? 바로 거짓된 인간6), “이 말세 인간의 더러운 냄새, … 올곧지 않는 만족에 망둥이 같이 날뛰는 어리석은 자의 웃음, 생쥐인간이나 좋아하는 맛 같지도 않은 행복”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미워하는 것으로 그칠 수 없는 것에서 포석의 고뇌는 깊어지는 것 같다.

“무엇도 모두 다 숙명의 흉한 탈을 쓰고 제 세계에서 논다. 그것이 무엇이 제 잘못이리오. 무엇이 그리 미우리오.7)” “아아 그들은 다 불쌍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볼 때, 포석은 악인에 대해서조차도 연민을 가진 듯하다. 동시에 심층에서는 이들 모두를 포용하려고 애쓰는 듯하다. “사람에게 만일 선악의 눈이 없었던들 서로서로 절하고 축수하올 것을”8) 이라는 포석의 말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상기시킨다. 결국 모든 것을 구분하고 분별하는 것으로부터 시비가 생기고 미움이 생길 뿐, 이들이 없다면 모두가 생명의 흐름을 구성하는 우주덩이의 한 부분으로 서로를 위할 것이라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한 덩이의 우주생명을 깨닫고 미운이도 불쌍하게 생각하는 고결한 품격을 지녔다고 해서 삶의 고통에 무뎌지는 것은 아니다.

타자 윤리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굶주림의 깊이를 헤아려 보았는가?”라는 물음이 시사하듯이, 자녀는 의복이 없고 아내는 매 끼니를 걱정하는 구차한 ‘불구 걸식자 같이 애달픈 삶9)은 어떤 것으로도 진정되기 어렵다. 게다가 ‘남의 혼’10) 이 득세하고, 고역장 같은 삶 속에서 마소처럼 사는 것도 모자라11) “지옥에 칼부림하는 망나니의 이 가는 소리에 관을 바라본 희생수와 같이 떨면서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통곡하는”12) 이러한 생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끝없는 암야(闇夜)의 바다가 전개’13)되고 있다.

이런 사태가 영원히 지속될까 공포에 떠는 포석은 ‘아아 내 영은 다시 소리 없는 울음을 끊어 울도다’14) 라고 절규한다. 이제 급기야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참아내야 하는 것인지’15),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다. ‘아아 나는 어디로 갈까’16), ‘굴종이냐 방랑이냐 그 무엇이냐?’

방랑! 이렇게 포석의 탈주가 일어난다.

1) 포석 조명희는 일본 제국주의의 박해에 대항하던 독립운동가, 카프 창설회원, 소련으로의 망명, 소련작가동맹원 활동 중 사형이라는 실천적이고 혁명적인 삶의   이력을 지녔다.
2) “오 영혼이여! 大律呂여!  내 심장에 뛰는 핏소리여!...” <태양이여! 생명이여!>)
3) “너는 선악을 초월한 우주 생명의 현상이다.” <어린 아기>
4) “아아, 이 장려한 대지를 나는 무엇으로 찬사를 바치리?”, <생명의 수레>)  
5) <알 수 없는 축원>
6) “바둑이는 거짓이 없나니라. 그러나 이 몹쓸 인간에게는 거짓이 있나니”, <바둑이는 거짓이 없나니>
7)  <생의 광무>
8)  <인간초상>
9) “생이란 불구 걸식자의 애닯은 다리, 나는 구차히 삶을 원치 않는다.” <형적없이 무너져 가도다>’
10) “남의 혼이여! 멀리 가거라. 끝없는 세계로 멀리 날아가거라.” <고독의 가을>
11) “생이란 고역장에 염일하 우마도 분수가 있지.” <형적없이 무너져 가도다>
12) <형적없이 무너져 가도다>
13) <내 영혼의 한쪽 기행> 
14) <내 영혼의 한쪽 기행>
15) “우는 것은 못난이의 일 다만 참아 감도 어리석은 일 우슬 수는 물론 없다. 그러면 너는 어찌 하려는가?”
  <번뇌>
16) <형적없이 무너져 가도다>
 

 

 

 

 

생명과 생활의 부조화에서 개벽을 꿈꾸다

- 한국 사상으로 읽는 조명희 -

조성환 서강대 철학과 강사

조명희의 시를 관통하는 주제는 ‘생명’이고, 그의 소설을 지배하는 테마는 ‘생활’이며, 그가 지향한 세계는 ‘살림’이다. 생명은 만물을 생성하는 우주의 근원적 힘이고(“우주생명”), 생활은 그 힘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사회적 활동이며, 살림은 생활 속에서 자기를 표현하는 인문적 행위이다. 그는 생명과 생활의 불일치 사이에서 번뇌하고, 살림 없는 생활을 보며 아파한다. “생명이 뛰노는 생활”을 그리워하고, 모두가 하늘인 세상을 동경한다. 그래서 민중들의 혁명을 꿈꾸고 우주적인 생활을 회복하고자 한다.

조명희에게는 대자연의 생명력이야말로 철학과 종교의 궁극적 원천이다.

그것은 ‘믿음’의 최종 근거이자 신비한 ‘경이’ 그 자체이다. 인간은 대자연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고, 그런 의미에서 모두가 한 부모로부터 나온 한 형제에 다름없다.

그래서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대자연은 ‘하느님’이나 ‘신’으로 인격화되고, 새로 태어나는 생명체는 ‘우주의 걸작’과 ‘신의 모델’로 축복받고 신성시된다. 아이의 탄생은 ‘우주생명의 현상’이자 신성한 ‘님과의 만남’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두 개의 부모가 있는 셈이다. 하나는 선천적인 부모로서의 자연이고(‘땅의 어머니’, ‘자연의 아들’) 다른 하나는 후천적인 부모로서의 양육자이다. ‘천지부모’‘『해월신사법설』’는 인간의 탄생과 성장·소멸을 관통하는 ‘저절로 그러한’(自然) 우주적 생명력이고, 사회부모는 그 생명력을 길러주는 도우미로서의 인간이다. 모든 인간은 이 선천과 후천의 에너지가 결합되어야 비로소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우주의 자식인 아이일지라도 ‘밥’이 없으면 생명은 고갈되고 사랑이 메말라진다. ‘밥’은 생명과 생활을 이어주는 매개물이다. 인간은 밥을 통해서 우주의 생명력을 공급받고(‘人依食’ ‘해월신사법설’), 그 밥은 노동을 통해서 주어진다. 밥은 자연과 인간의 협업의 산물이다(‘天人相與’ ‘해월신사법설’). 바로 여기에 가장의 역할이 있다. 어미새가 모이를 구해다가 아기새에게 먹이듯이, 가장은 일을 해서 밥을 먹인다. 이것이 생활의 영역이다. 생활은 자연의 ‘생명의 바퀴’를 굴리는 사회적 활동이다.

그 활동이 능동적이고 자유로우면 ‘살림’이 되고, 수동적이고 위축되면 ‘살이’가 된다. 살림은 생명이 뛰놀고 사랑이 넘치며 자기가 살아 있는 생활이다. 예술과 철학 그리고 종교는 모두 살아 있는 자기의 표현이다.

조명희가 산 시대는 생활이 파괴되고 ‘살림’이 ‘살이’가 된 세상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생활권외로 추방된” 타자들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고생살이”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

그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살이’를 살지만 ‘살림’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계속해서 글을 쓰고 문학을 버리지 못한다. 그에게는 살이에 고갈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살이’의 세상을 ‘살림’의 세계로 전환시키기 위해 그가 선택한 길은 ‘사상’에 의한 ‘혁명’이다. 그 사상의 핵심은 자유와 평등이고 그 주체는 민중과 타자이다. 새로운 사상에 눈을 뜬 민중들이 혁명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 새 세상은 불평등한 신분과 윤리적인 차별을 넘어서, 모두가 ‘밥’과 ‘생명’을 공유하는 공공세계이다.

그런데 그는 사회변혁의 사상적 동력을 바깥에서 찾지 않고 내부에서 찾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의 전통적인 ‘하늘사상’이다(그가 사회주의에 공감한 것은 이 사상의 현대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은, 고대 한국의 ‘공공적인’ 제천행사나 단군신화의 ‘홍익인간’ 이념에서 엿볼 수 있듯이, 하늘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고 존엄하며 자유롭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 하늘이 차별적인 신분제와 정신적인 식민지에 의해서 상실된 것이다. 조명희의 혁명은 이 빼앗긴 하늘의 회복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개벽사상’을 잇고 있다. 개벽의 키워드는 ‘자생’이다. 즉 ‘스스로’ 살 길을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다. 조명희는 “우리는 우리의 살 집을 장만하지 못해” 왔다고 개탄한다.

그리고 그 원인을 남의 땅에다 남의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즉 줄곧 ‘기숙사’에서 ‘집 없는 나그네’로 살아온 것이다. 더부살이를 청산하고 자기 집을 짓는 것, 이것이 그가 생각한 ‘살림’이다.

그래서 그의 혁명은, 단순한 정치적 혁명이나 제도적 개혁이 아닌 생활의 개벽이고, 그것의 사상적 동력을 ‘하늘’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사상의 맥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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