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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충청인 Ⅲ - 만해 한용운
그리운 충청인 Ⅲ - 만해 한용운
  • 박장미 기자
  • 승인 2017.05.07 22: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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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치하… 어둡고 혼탁했던 시대 ‘청풍명월’을 노래하다
‘그리운 충청인Ⅲ-한용운’을 주제로 지난 3월 20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왼쪽부터)김용환 충북대 교수, 임병권 충남대 교수,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김혜련 박사가 좌담을 가졌다.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동양포럼 운영위원회(운영위원장 유성종 전 꽃동네대 총장·주간 김태창 박사)는 ‘그리운 충청인’ 시리즈의 세 번째 인물로 충남 홍성 출신인 만해 한용운을 선정, 지난 3월 20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그의 삶과 사람됨, 사상,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과 김용환 충북대 교수, 임병권 충남대 (연구)교수, 김혜련 (교육학) 박사가 함께한 이날 좌담의 내용을 요약,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만해 한용운 선생에 관한 연구자들의 평언은 김우창씨가 ‘궁핍한 시대의 시인’(민음사·1997)에서 서술했듯이 “종교가이며, 혁명가이며, 시인이었다. 어떤 때는 종교가, 어떤 때는 혁명가, 어떤 때는 시인이 아니라 그는 어느 때나 이 모든 것이기를 원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조종현씨의 기술이 더 적실할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해는 어디까지나 끝까지 독립지사였다. 항일 투사였다. 만해의 진면목은 생사를 뛰어넘은 사람이다. 뜨거운 배달의 얼이다. 만해는 중이다. 그러나 중이 되려고 중이 된 것은 아니다. 항일투쟁하기 위해서다. 만해는 시인이다. 하지만 시인이 부러워 시인이 된 것은 아니다. 님을 뜨겁게 절규했기 때문이다. 만해는 웅변가다. 그저 말을 뽐낸 것은 아니고 심장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피로 뱉었을 뿐 이다.(한용운 사상연구‘ 122~123쪽)” 4회 만해상 수상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리영희 교수가 피력한 말에서도 비슷한 묘사를 볼 수 있습니다. “한용운 선생은 우리나라 근대사가 낳은 가장 탁월한 학자이며, 종교인이며, 사상가이며, 동시에 사회운동가이며, 국민계몽가였습니다. 민족이 외세 제국주의의 노예가 되었던 20세기 전반의 전 기간을 통하여 한용운 선생은 그 모든 탁월한 자질을 오로지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서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민족 운동의 실천자로 치열하게 살고 투쟁하다 돌아가신 민족해방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이 오늘 여기서 여러분과 함께 그리고 기리고자 하는 것은 만해 선생의 연구자나 전문가로서가 아닌 영혼의 동향인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입니다. 젊었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제가 만해 선생을 그리워하는 것은 자랑스런 한국인이기 전에 그리운 충청인의 기질, 품성 그리고 충청도의 기풍을 고스란히 아우르고 있어서 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리워하고 기리고 싶어 하는 충청인의 기질과 품성 그리고 충청도의 기풍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차차 말씀드리기로 하고 우선 만해 선생의 생애를 김혜련 박사께서 개관해주셨으면 합니다.”

김혜련 박사 “오늘 이 자리에서 훌륭하신 분들과 함께 한용운 선생을 기릴 수 있어 기쁩니다. 우선 한용운 선생의 일생을 시계열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만해 선생은 1879년에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근대교육은 받지 않으셨고 한학을 수학하셨습니다.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는데 아버지는 홍주 감영 관군으로 농민군 토벌에 가담했다고 합니다. 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설악산 오세암에 머물다가 불가에 입문, 불교지식을 섭렵하면서 교학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대장경을 열람했습니다. 1905년 26세때 홍성에서 2차 의병운동이 일어나 아버지가 의병에 의해 살해되자 백담사로 출가해 불교활동에 전념합니다. 한일합방조약 체결 후인 31세 때에는 강원도 표훈사에서 불교강사로 취임했고 동시에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훈련장을 돌아보며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교육을 하셨습니다. 32세에는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했고 중추원과 통감부에 승려의 결혼을 건의했습니다. 33세에는 이회광이 주도한 ‘원종(圓宗)’에 맞서 송광사에서 승려대회를 열고 조선 임제종 종무원을 설치했고 2년 후인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을 간행했습니다. 36세에 ‘불교대전’을 간행하고 조선불교회 회장으로 취임했으며 39세에 ‘정선 간의 채근담’을 발행했습니다. 1919년 40세에는 3.1 운동 민족 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참여,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로 보완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이다. 이 일로 인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3년간의 옥고를 치러야만 했으며 그 기간동안 ‘조선 독립의 서’를 지어 조선의 독립과 자유를 주장했습니다. 1926년 48세에 ‘십현담주해’와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했고 6.10 만세 사건에 앞서 임시 검속하셨습니다. 1930년에는 김법린, 최범술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 받았고 1931년 월간 ‘불교’의 사장을 역임했습니다. 이때 한국불교의 정체성 문제와 불교계의 각성과 유신의 필요성을 제시합니다. 1940년대에는 창씨개명한 승려가 5000여명에 달했지만 만해 선생은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하셨고 1943년에는 조선인 학병 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평생 조국을 위해 사셨던 만해 선생은 조국 광복을 불과 1년 앞둔 1944년 성북동에서 입정하시게 됩니다. 그의 나이 66세였습니다. 한용운 선생은 일생동안 끊임없는 저술활동을 하셨습니다. 대중에게는 시집이 주로 알려져 있지만 잡지에 소설을 투고하기도 했고 다양한 장르로 그의 이상을 밝히셨습니다. 1914년 발간한 ‘불교대전’은 팔만대장경의 축소판으로 불교의 현대화와 대중화에 기여한 책입니다. 그의 불교유신 사상에 입각해서 불교 전통을 현대 상황에 맞춰 편찬한 것입니다. 

▷김 주간 “기왕에 한용운 선생의 불교사상에 관한 말씀이 있었고 특히 불교유신 사상이 농축된 불교유신론을 거론하셨으니까 그 점을 조금 더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김 박사 “네. 그렇게 하죠. 조선불교유신론의 경우 1913년에 저술됐는데 불교의 성격 자체가 깨달음을 중시하고 중생의 마음이 보살의 정토이며 서방에 극락정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마음이 곧 정토라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진리의 평등주의, 보살과 부처 정신의 구세주의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책 자체가 불교 개혁을 위한 저서였기 때문에 당시 승려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외국유학까지 시켜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줘야 하며 염불당도 폐지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염불의 정성만이 정토로 인도한다면 ‘과보’의 인과를 무시하게 된다고 가르치고 불교의 흥망은 승려의 흥망을 예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포교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산에 있으면 불리하니 사원도 도심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불교의 각종 의식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음식을 차리는 반공양보다는 법공양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것이지요.  승려의 인권회복에 있어서도 개걸이나 기취생활 보다는 직접 생산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승려도 생산을 통해서 승려의 인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승려의 결혼문제도 말씀하고 계신데 계율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결혼을 금지하는 것은 자율에 맡겨야 하는 문제지 국가나 윤리에서 제한하는 것은 포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외에도 윤회지주, 무력지주 등 당시의 풍토를 비판하고 투표를 통해 지주를 뽑아야 한다는 점도 말씀하셨습니다. 이외에도 승려의 단결, 사원의 통할 등 다양한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다음으로 조선불교유신론이 주는 의의를 살펴보겠습니다. 조선불교유신론은 근대성을 수용했습니다. 당시 서구적 근대 개념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인식을 통한 불교개혁론이나 신식학교 설립, 사찰의 변모 등과 같은 근대성을 수용한 것이지요. 조선불교유신론에는 교리적 자부심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근대적 세계관에 적응할 때 필요한 평등주이와 구세주의의 표방이 드러납니다. 조선불교유신론은 대중 불교 건설에 있어 큰 역할을 했고 미신이 아닌 지혜와 깨달음을 강조한 불교를 이야기함으로써 진보하는 현실과 미래 문명 세계에 적응할 수 있는 종교적 우수성이 불교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여러 근대 학자들의 영향도 받았다고 생각됩니다. 불교유신론에서 양계초, 칸트, 베이컨, 데카르트, 육상상, 왕양명과의 동질성을 개진한 것입니다. 불교계의 여러 문제를 정직하게 거론하며 폐단을 바로 잡으려 노력했습니다. 식민성 극복의 의지도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불교의 주체적 개혁을 도모한 것입니다. 일제는 1911년 사찰령을 발표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사찰을 장악하기 위해 전국 1300여개 사찰을 30본산과 말사제도를 확립합니다. 이러한 일제에 맞서 스스로 불교의 주체적 개혁을 도모하려 했다는 것이 큰 의의이자 업적입니다.”

▷김 주간 “식민성의 극복과 불교의 주체적 개혁에 중점을 두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식민성 극복’이라는 말 안에 담긴 실질적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영혼의 탈식민지화’라고 표현하면 어떻겠습니까? 정치적 의미에서 한국불교와 한국의 불자들이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화 된 상태에서 해방돼 자주성을 확보하고 한국불교의 원상을 회복한다는 두가지 면이 있지만 한국 불교의 원상을 회복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불교의 모습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한국 불교의 원상회복이 아니고 그때까지의 종교가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율에 얽매이게 하는 것이었다면 식민지화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종교적 속박에서 벗어나 영혼의 해방과 영혼의 자유와 영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풀어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만 벗어나면 된다는 고식적인 생각에서 끝나기 쉬운데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난 후에도 계속해서 여러 가지 면에서 사고와 판단과 행동과 책임이 식민지화의 상태에 되돌아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김 박사 “저도 공감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올바로 이루기 위해서 우선 당면한 긴급과제로서 정치적, 역사적 해방투쟁에 총력을 경주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민족해방과 조국독립은 궁국적으로 종교의 올바른 역할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신념이 누구보다도 또렷하고 강했습니다. 영혼의 탈식민지화가 제대로 이루어져서 자유로운 영혼이 제대로 깨우쳐질 때 비로소 참된 인간해방·민족해방·조국해방의 동력이 가동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임병권 충남대 (연구)교수 “만해 한용운 선생은 기본적으로 ‘창작과 비평’이라는 잡지를 통해 등장했습니다. 만해 선생은 한국에 주로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후 불교인으로도 조명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용운 선생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현재로써는 완전히 확립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아직 한용운 선생에 대한 인식이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했을 당시 조선불교유신론을 처음 접했습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사람으로써 이해하기 무척 어려웠습니다. 내용도 굉장히 어려웠고 우리 정서와 잘 안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오늘은 불교 유신론에 대해 대략적인 의견을 말하려고 합니다. 이 책이 나온 것이 1910년이니 32세에 이 책을 썼다는 것입니다. 삼십대 초반에 이러한 글을 썼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습니다. 어린 시절 한학을 배웠기 때문에 조선불교 유신론에 그러한 내용이 인용돼 있습니다. 저는 만해 선생이 한학 방면에 있어서 천재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20세기 지성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에 설 수 있다고 봅니다. 만해 선생은 불교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부처의 근본 정신을 쫓는 불교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이렇게 종교인으로서 큰 역할을 하셨지만 저에게 있어서 만해 선생은 여전히 시인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대중들에게 크게 다가가는 이미지가 시인인 것이지요. 시 속에서 드러나는 표현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불교인으로서의 한용운 연구나 조명은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더 활발한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해 선생의 불교론이 현재 조계종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깊은 논의가 이뤄지면 좋겠습니다.”

▷김 주간 “질문이 있습니다. 한용운 선생이 한국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창작과 비평’을 통해서 였다고 말씀하셨는데 만해 선생이 ‘창작과 비평’을 통해 알려졌다는 사실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임 교수 “‘창작과 비평’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억압됐던 시대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성을 다뤘습니다. 사실 ‘님의 침묵’은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이미 널리 알려진 작품입니다. 그러나 ‘창작과 비평’은 이념적인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억압에 저항하고 민족애를 갖게한 문예지로써 의미가 있습니다. 결국 ‘창작과 비평’은 문예지였지만 문예지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지성이 사라진 시대에서 지성을 이야기하고 특히 저항하는 지성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김 주간 “중학교 교과서에 나온다는 것은 한국에서 일종의 대중성을 갖는 일입니다. 그런데 ‘창작과 비평’에 실렸다는 것은 만해 선생의 저항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가 돋보이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현실을 잘 살펴볼 때, 저항적 지성에 편중된 데서 생기는 폐단을 적절히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공감적 감성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 두가지 인간적 품성을 균형 있게 아우르는 매개적 영성의 올바른 체득을 중시·탐색해야 할 상황적 요청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 저의 현실인식인데 어떻습니까? 저 자신의 개인적 견해로는 만해 선생은 저항적 지성-예를 들면 ‘불교유신론’이나 ‘조선독립이유서’에 잘 나타나 있음- 뿐만 아니라 공감적 감성 -예를 들면 ‘님의 침묵’이나 다른 시나 수필 등에 잘 나타나 있음-을 고르게 갖추신 분입니다. 그 두 가지 자질이 강철 같은 의지=투지에 의해서 처절한 해방투쟁을 끈질기게 이어나갈 수 있는 원동력으로 발동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용환 충북대 교수 “한용운 선생은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시인이자 승려이며 독립운동가입니다. 본관은 청주이고 고향이 충남 홍성이기에 출생으로 보아 전형적인 충청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님의 침묵’을 통해서 조국이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방을 향한 희망을 절규했던 것이죠. 결국 그는 희망과 자유를 함께 그린 시인이셨습니다. 제가 특별히 관심을 갖는 부분은 동북아 시민성의 함양이라는 차원에서 1990년대를 전후해서 주요한 관심이었던 근대화와 사회 진화의 문제입니다. 일본에서 이러한 시도가 먼저 시도된 것은 분명합니다. 일본에 이노우에 엔료(井上圓了·1816~1897)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메이지 시대 기독교의 교세확장에 불만을 품고 불교도의 각성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기독교 창조설의 비과학성을 언급하면서 불교옹호론을 전개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창조한 피조물이 아니라 자유·자치·평등의 천부인권의 주체로서 불교의 인연법칙은 자연의 과학법칙과 상통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자연과학의 논증방식과 불교의 논증방식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강조하며 ‘진화론적 불교’를 모색했습니다. 이 우주 삼라만상은 나아가고 물러서며 열고 합치는 ‘진퇴개합’(進退開合)이 대화(大化)로서 세계변화의 범례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개합을 일본적 관점에서 해석하며 천황제 국가에 개합하는 것이 자연 진화에도 맞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내세운 진화론은 어디까지나 천황제 국가에 복종하며 그 신도의 종교성을 부각시킨 것입니다. 진여연기 관점에서 천황제 국가에 복종하는 사회진화론을 제창하고,  ‘호국애리’(護國愛理)의 국가주의를 표방했는데 여기서의 새로운 각성이 자극 받았을 것입니다. 중국의 근대불교에서 사회진화론을 수용한 인물은 양계초(梁啓超·1873 ~1929) 였습니다. 양계초에 주목할 이유는 사회진화론을 일본과 서구를 통해 수용해 중국이 주권을 회복하고 힘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양계초는 강유위의 사상을 많이 따랐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변법자강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양계초는 그 실패 원인이 민(民)이 계발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도덕 중심 보다 백성이 세력화 되고 백성이 단결해야 중국이 주권을 회복하는 사회가 올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다만 양계초는 개인의 자유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국가의 자유나 단체의 자유에는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개인의 자유는 힘이 없기 때문에 야만상태를 지속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문명자유는 국가를 위한 자유로서 단체와 국가가 자립하지 못하면 노예상태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래서 불교 사상 속에서 보살 사상을 영위하며 일본과 다른 시민적 자유, 사회진화론에 접근했습니다. 이노우에 엔료와 양계초의 사상을 만해 선생은 충분히 독서를 하며 이해를 한 후 어떤 자세를 택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당시 사회진화론이 대세였기 때문에 이를 수용은 하지만 비판적 수용을 했는데 강권주의 사회진화론을 극복하고자 불교본연의 평등주의와 진여사상을 부각시켰습니다. 만해 선생은 만물의 생명은 자유이며, 인생의 행복은 평화라는 핵심을 내세웠습니다. 여기서 김 주간께서 말씀하셨던 ‘영혼의 탈식민지화’와 비슷한 사상이 나옵니다. 만해 선생은 연계된 속박을 ‘계박’이라고 하셨습니다. 계박과 자유사이를 식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국가적 자유나 양계초의 시민적 자유는 국가나 집단의 자유인데 이러한 것들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보셨습니다. 결국 이것은 경쟁의 심화와 인간과 인간의 투쟁을 불러 일으킨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지성의 안목을 가지고 양심의 눈을 떠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것이 불교 사상에 있다는 것이지요. 불교사상의 평등주의, 세계주의 또는 후세주의를 자세히 살펴보려합니다. 우선 당시 평등주의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에는 ‘진여실상’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진여실상이 모양 속에 항상 나타나는데 사람들은 모양만 보니 불평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성상원형을 바라보면 진여(眞如)의 평론 자유를 가장 잘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만해 선생이 가장 강조한 것은 생명의 근원은 평등이고 그 평등은 진여실상으로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여실상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구세주의고 이것이 세계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현재 세계시민주의와도 통할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안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만해 선생은 불교사상에 근거한 공공사회 진화론을 모색하면서 평등주의와 세계주의를 추구했습니다. 그의 평등주의는 민중과 함께 하는 불교사상을 말하며, 세계주의는 자국과 타국, 인종과 인종을 구분하지 말고 한 집안 한 형제로 살며 서로 경쟁하거나 침탈하지 않고 민중이 함께 평등하고 자유로운 보살세계를 열어나가자는 주장입니다. 그는 생명본연의 진여자성을 깨달아 보살정신으로 공공사회를 구현하는 길이 중생구제의 길임을 만천하에 천명했습니다. 이처럼 만해는 일국 민족주의를 뛰어넘고 세계시민주의를 옹호함으로 보편으로 나아가, 폐쇄적 자민족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류 가족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공관점을 제시하였기에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불교유신론에서 가장 자주 쓰신 말이 ‘현재와 같은 생존경쟁 시대’라는 표현입니다. 만해 선생은 생존경쟁은 결국 국가중심주의로 발전하고 야만사회를 면치 못하게 만든다고 보셨는데 경쟁사회에서 평화구현으로 나가기위해 승려교육으로 불교미래를 열고자 했습니다. 양계초의 자유가 쟁취에서 오는 것이라면, 만해의 자유는 진여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만해는 대승운동의 공공실천가로서의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그가 꿈꾸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는 결국에는 대승불교정신과 영성개통의 가치를 살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해 선생은 ‘님의 침묵’이외에도 ‘산골물’, ‘모기’, ‘파리’ 등 유고시 17편이 있습니다. ‘산골물’에서는 산에서 나서 바다에 이르는 산골물의 성공비결을 노래하지만 자신은 열패자가 되어 물의 설법을 듣는다 했고, ‘모기’에서는 사람이 사람의 피를 서로서로 먹는 데 반해 모기는 동족의 피를 빨아먹지 않는다고 하면서 모기에 비유하여 경쟁사회를 비판했습니다. 이렇게 유고시, 시조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는데 이는 영성회통을 위한 예술적 표현을 끊임없이 시도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성회통의 핵심은 역설입니다. 세상은 더럽고 추하지만 그 한가운데서 맑고 깨끗한 마음과 삶을 지녀야 된다는 것입니다. 진흙탕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민중과 함께 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만해 선생을 충청인으로 선양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김 주간 “김용환 교수는 주로 출생과 삶의 모습을 통해서 만해 한용운 선생의 충청인적인 측면을 부각시켜 주셨습니다. 저 자신의 개인적 충청인상은 출생과 삶의 모습보다는 사람됨의 밑뿌리와 활력·기력·동력을 공급하는 근원적 생명에너지로서의 영성 각성에 나타나는 특색입니다. 저는 만해 선생의 수많은 저작을 접하면서 두 개의 중요한 상징을 찾아냈습니다. 두 가지 꽃으로 표상되는데 한 겨울 눈 속에 피어나는 매화-雪中梅-와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處染常淨의 蓮花-입니다. 저 자신의 개인적인 해석입니다만 ‘설중매’는 충의(忠義=忠魂義魄)의 상징이고 ‘진흙속의 연꽃’은 청제(淸濟=淸心濟民)의 상징이며 충의의 충과 청제의 청을 아우르는데서 그의 인간형성이 이뤄졌고 그것을 끈기 있게 받쳐주고 지켜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경보씨에 의하면 불교가 긴요히 가져야할 금언일구를 가르쳐달라고 말씀드렸더니 ‘설중매’라는 단 한마디로 대답하셨다는 것입니다.(‘한용운 사상 연구’ 100~101쪽) 또 정인보씨가 돌아가신 만해 선생을 기리면서 쓴 시에 “풍란화 매운 향내 뉘에게 견줄손가 / 이 날에 님계시면 별도 아니 빛날손가 / 정토가 이외에 없으니 흔하 돌아오소서”(‘불교’  813쪽 1945년 8월)이라고 그려 놓았습니다. 한용운 선생의 탁월한 점은 어려운 종교적 진실을 알기 쉽고 아름다운 시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복종’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남들이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 달콤합니다 /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이 시에서 자유와 복종이라는 두가지 삶의 모습이 나옵니다. 차원 높은 복종과 참된 자유의 변증법이라는 종교적·철학적 묘리를 간결하면서도 청일한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절대복종을 통해서 진정한 자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에게만 복종하면 어떤 인간에게도 복종할 필요가 없으니 인간으로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이죠. 만해 선생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에 쓰셨다는 ‘옥중감회’라는 시가 있습니다. “물처럼 맑은 심경 티끌 하나 없는 밤 / 철창에 새로 돋는 달빛 고와라 / 우락이 공이요 마음만이 있거든 / 석가도 원래는 예사 사람일 뿐.” 티끌 한 점 없는 맑디맑은 마음으로 혼탁한 세상을 비춰보려 노력했던 것이죠. 흔히 충청도를 ‘청풍명월’의 고장이라고 하는데 이 청풍명월을 삶과 사람됨으로 가장 잘 체현해냈던 분이 만해 한용운 선생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만해 선생을 ‘그리운 충청인’으로 기리고 싶은 것입니다. 만해 선생의 심우시(尋牛詩)가 그의 진면목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열 개의 시로 되어있는데 열번째가 ‘입전수수(入廛垂手=저자 가운데로 들어가서 손을 드리우다)’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것인데 여기서 “진흙탕 속에서나 물탕 속에서 마음대로 오가면서도 / 끝없이 웃고 웃는 모습 얼굴에 드러내지 않네 / 다른 날 아득한 고통의 바다 속에서도 / 다시금 연꽃을 불속에 피게 하리” 오염된 세상에서 청정한 마음을 지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일제 치하는 더럽고 추악하고, 어둡고 빛을 잃은 시대였습니다. 그런 절망적인 시대상황속에서 만해 선생은 세상의 오탁을 깨끗이 씻어주는 청풍이였고, 어둠을 부드럽게 밝히는 달빛이었습니다. 한용운 선생은 탁월한 한국인, 독실한 불자, 강직한 독립운동가, 고매한 불교 학자였지만 그러한 것을 전부 밑바탕에서 바쳐준 것은 진정한 충청인의 에토스와 충청도의 하비투사가 체화 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나친 아전인수요, 견강부회입니까?”

▷김 교수 “아까 연꽃에 관한 말씀을 하셨는데 저도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입에 연꽃이 피게 하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의 법달이라는 사람을 인용한 것인데요. 법달은 7살에 출가해 법화경을 3000회나 독파했다고 합니다. 어느날 큰스님이 오셨어요. 큰스님에게는 오체투지해야 하는데 머리가 땅에 닿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랬더니 큰스님이 법달에게 ‘마음이 밝아야 그 뜻을 알지 외우기만 하면 입술에 연꽃이 피지 않는다’고 했다고 합니다. 만해 선생은 선에 대해서 무척 부정적으로 생각하셨어요. 참선이 독선이 될 수 있다고 하시면서 혼자 마음을 밝힌답시고 공에 빠지는 것은 시장의 배추장사보다 못하다고 했습니다. 선에 안주해서 공에 떨어지는 사람은 진정한 연꽃을 못 피운다는 것이지요. 만해 선생은 삶에 수반되는 계박적 번뇌와 망상에서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늘 고민하셨던 것 같습니다. 계박을 계박으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한데 대중들은 계박을 정당화하다보니 묶여 있는 줄을 모르는 것이지요. 계박 상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고 그때야 비로소  모든 번뇌와 망상에서 벗어 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해 선생은 한가지 일에 늘 집중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 박사 “만해 선생은 구두선도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의 폐단을 지적하시면서 의미없는 선이라고 하셨습니다. 맑은 마음을 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닌 이상 무의미하게 앉아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마인드 풀니스(mindfulness)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의 목적이 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해탈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선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된다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만해 선생이라면 더불어 사는 삶을 혼자만 깨닫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보살의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임 교수 “오늘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꼈던 것은 만해 선생의 힘의 원천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였습니다. ‘님’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자신이 믿는 그 ‘님’이라는 가치를 위해서 그의 모든 것을 거기에 바쳤던 것이죠. 민족대표 33인 중에서도 그분의 님에 대한 헌신이 아닐까요.”

▷김 주간 “저 자신은 만해 연구자나 전문가는 아니고 만해 애호가의 한사람입니다. 고등학생때는 음악시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음악과 시에 몰두했었습니다. 특히 영어와 프랑스어의 시가 좋았습니다. 한국 시인으로는 한용운을 존경했고 박목월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박목월의 충고로 시인의 길을 포기했고 아버지의 강권에 못이겨 음악을 버리지 않을 수 없어서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후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영어와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쳤고 그리고 대학에서는 라틴어와 그리스어까지 가르치면서도 시와 음악에 대한 열정만은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에 미국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고 인디아나대학에서 어학훈련을 받는 도중에 레바논에서 온 유학생으로부터 카릴 지브란(Kahlil Gibran·1883~1931)이라는 미국에 이민했던 레바논 시인의 ‘예언자’를 선물로 받아 읽게 됐습니다. 저는 답례로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몇편을 뽑아 영어로 번역한 것을 줬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레바논 친구는 저의 번역으로 읽은 한용운을 전에 읽은 인도시인 라빈드나드 타고르의 시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다고 이야기 하면서 한용운의 사람됨과 시와 사상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싶다고도 말했습니다. 저도 카릴 지브란의 시들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고 타고르(Rabindranath Tagore·1861~1941)의 시 ‘키탄자리’를 함께 읽고 느낀 바를 서로 이야기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브란도, 타고르도, 만해도 영어로 번역된 것을 통해서 서로의 이해를 갖게 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영어로 번역된 것을 읽어본 소감은 충후(忠厚)하고 청일(淸逸)한 시정(詩情)이 공통점으로 표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 자신은 충청인의 기품이 만해는 물론 지브란과 타고르에서도 그들의 시속에 현현되어 있는 것 같아서 세계에 산재하는 충청인적 정감을 느낄 수 잇어서 공감되는 바가 더 컸을지도 모릅니다.”

▷김 박사 “오늘을 계기로 한용운 선생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끝까지 민족적 충절을 지키고 세상의 오탁속에서도 올곧은 청지(淸志)를 굽히지 않고 그야말로 매화처럼, 연꽃처럼 살다 가신 선생님을 되돌아 다시한번 생각하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김 교수 “만해 선생이 오욕이 가득찬 세상에서 청풍이 되고 암울한 시대에 명월이 되어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민중의 지팡이가 될 수 있었던 그 힘의 원천이 무엇인가 생각해 봤습니다. 그것은 모든 외적인 속박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영혼이 갖는 힘이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악랄한 일제의 국가권력으로도 강압할 수 없었던 영혼의 자유는 국가도 넘어서는 님을 향한 일념 복종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어떤 한 가지에 복종 하는 것이 바로 자유의 비결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만해 선생은 늘 삼귀의를 실천하셨던 것 같습니다. 삼귀의 가운데서도 ‘승’은 청정함을 의미합니다.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을 21세기에 맞춰 생각해 보면 각자 자기 생명의 ‘불’, 올바름의 ‘법’, 청정함의 ‘승’에 귀의함으로써 일종의 정신적 가치 창조를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자유롭고 충실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주간 “그동안 저는 청주가 이름값을 못하고 더럽고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탁주·오주·염주로 변질되어가는 것이 안타깝고 마음과 몸이 심히 아플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날마다 아침, 낮, 저녁 세 차례씩 집 주변 청소를 해왔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쓰레기는 버려지고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거의 절망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만해 한용운 선생의 설중매(엄동설한에서도 아름답게 꽃피우는 매화)와 염중상정(오염된 세상 한 가운데서도 늘 맑고 깨끗한 모습을 지킴)의 연꽃 이미지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더러움 속에서도 늘 깨끗했던 영혼의 모습을 새삼 상기하게 되고 나름대로 삶의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충청인의 기질과 품성 그리고 충청도의 기풍을 잠시 잊고 안달했던 스스로를 다시금 깨우치는 청량한 바람이 돼 주셨고, 어둡고 우둔한 영혼을 부드럽게 밝혀주는 달빛으로 늘 가까이서 함께 해주시는 영혼의 동향인 만해 한용운 선생이십니다. 저에게는 그렇게 느껴집니다. 오늘 여기서 여러분과 함께 진정한 충청인 만해 선생을 그리고, 기릴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박장미/사진·최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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