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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청주인 Ⅲ - 안택수나라와 후생사랑으로 뜨겁되 초연히 ‘스승의 길’을 걷다
동양포럼 운영위원회는 지난 3월 21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스승의 날을 맞아 ‘그리운 청주인Ⅲ-우일 안택수 선생’을 주제로 좌담을 가졌다. <사진·최지현>

(동양일보 조아라 기자)‘동양포럼 운영위원회(운영위원장 유성종 전 꽃동네대 총장·주간 김태창 박사)’는 스승의 날을 맞아 ‘그리운 청주인’ 시리즈의 세 번째 인물로 청주사범학교, 청주고 교장을 지낸 우일 안택수 선생을 선정했다.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윤건영 청주교대 총장은 지난 3월 21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우일 안택수 선생을 기리며 그의 생애와 교육철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좌담의 내용을 요약,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안택수 선생 (1902~1979)

 

△충북 괴산 출생

△청주농업학교(현 청주농고), 수

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 농과대학) 졸업

△음성농업전수학교·청주농업학교·

청주사범학교·청주고·안동사범학교 교장,

안동교육대학 학장 역임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오늘 한국의 현실 상황에서 가장 마음을 슬프게 만드는 것은 진정한 스승이 없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저희 세대만 해도 정치가나 기업가보다는 그리고 연예인보다도 스승이 존경의 대상이었고 삶의 모범이었습니다. 반드시 학교 선생에 국한되지는 않았지만 우리 사회에는 곳곳에 좋은 스승이 있었고 그래서 세상살이가 고되고 힘들었지만 스승의 존재 자체가 위안과 격려와 목표가 되어 주었습니다. 저 자신은 개인적으로 참 스승에 대한 애절한 향수, 노스텔지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5월 15일은 스승의 날입니다. 오늘과 내일의 우리나라와 겨레의 건강과 행복을 생각하면서 이 고장과의 인연이 남달랐던 스승 한 분을 그리고 기리고자 합니다. 더구나 이 고장의 살아계신 좋은 스승의 한 분으로 아주 귀하게 모시고 있는 유성종 위원장께서 직접 발제를 해주시고 청주교육대학 윤건영 총장께서도 자리를 함께 해 주시게 되어 더 이상 기쁠 수가 없습니다.”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이 고장의 스승 한 분으로 우일(宇一) 안택수(安宅洙) 교장을 그리고 기리고자 합니다. 그 분은 워낙 겸손해서 자신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 분의 후배인 청주농고 동창회에서 세운 비석에서 겨우 안 선생의 성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안 선생의 청주농업학교(현 청주농고)와 수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농과대학)의 후배이고 제자였으며, 교육동지였던 서정일 교장은 안 교장의 묘비에서, ‘선생은 천품이 어질고 의로우며 앞을 내다보는 구안(具眼)의 선비이셨기에 말없이 행하고 초연(超然)자약(自若)하여 한결같으니 세상에서 선생을 숭앙하여 따르는 이가 많았고, 그릇이 큰지라 모든 일에 공명하여 어지러웠던 때에 교육을 가꾸어왔으니 겨레의 스승임이 분명하다. 나라를 사랑하신 뜨거운 정성과 옳은 일을 위하여 굽힘이 없는 지기(志氣)와 절조(節操)는 혼탁한 사회를 밝혀 거침이 없었고, 젊은이를 아껴 새 기운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이 오늘의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의 가슴에 그대로 남아 있음으로 하여 후생들의 한결같은 칭송이 이를 잘 밝혀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안 교장은 1902년 4월 27일 괴산읍 서부리 소재 괴산향교 하마비의 옆에 위치한 광주 안씨 광릉군의 37세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부친은 괴산향교의 전교를 하신 분이니, 전통적인 유림의 가풍과 예교로 성장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개명하신 부친의 관견으로, 충북에 하나밖에 없던 중학교(현재의 중고 통합형 5년제 중등학교)인 청주농업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하셨으며(1921년), 또한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진학하고 졸업(1924년)해 수재와 엘리트의 길을 가는 조건을 갖추셨습니다. 1924년 모교의 교사로 부임하셨는데, 그 재임 16년 동안 유일한 한국인 교사라서, 일제의 식민지 교육과 민족차별화 정책 속에서 젊은 지성으로서 고뇌하셔야 했고,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음성농업전수학교의 교장을 맡으셨다가, 광복 직후 1946년에 청주농업학교의 한국인 초대교장이 되셨습니다. 1948년에 청주사범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시고, 1957년에 청주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시고, 1960년 안동사범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셨다가 학제 개편으로 안동교육대학의 학장이 되시고, 1967년에 정년퇴임하셨습니다. 초임에서 퇴임까지 43년 간을 교직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안 교장이 수원고농을 졸업할 당시는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현달할 수 있는 자리가 주어지는 시절이었습니다. 수원고농은 당시의 최고 학부였고, 그 학교 출신이라면 희소가치로 평가받는 인재였습니다. 그분이 길을 청주농업학교로 잡은 것은 모교의 초빙도 있었겠지만, 가정으로 말하면 향교 전교의 아들이라 치교일치(治敎一致)의 유학사상으로 교육의 중요함을 아셨을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의 우리나라 식자들은 민족 해방과 독립을 위해서는 겨레가 깨쳐야 한다고 인식하였고, 교육문화 운동은 곧 독립운동이라고 믿어서, 1923년에는 민립대학 설립기성회를 조직하여 경성제국대학의 개교 이전에 민족의 열망을 보인 일도 있었고, 민족계몽운동을 벌였는데, 농촌을 향해서는 브나로드(vnarod=민중 속으로)운동이 일고 있어서, 안택수 청년지사는 교육자의 길을 선택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그 1924년은 청주중학교가 개교한 해여서 거기에 가실 수도 있었을 것이나, 농업학교라는 수용이 더 큰 학교, 그리고 농촌문제의 심각함이 각성되고 그 운동이 대두되었던 시대상황이 그분을 그러한 소명으로 응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안 교장은 이렇게 교육자의 길을 걸으셔서 20년 만에 광복을 맞았고, 청주농업학교의 한국인 초대교장이라는 영예를 가지고 부임하셨으나, 조국은 그분에게 ‘교육자의 교육’이라는 사법교육의 특수임무를 부과하였습니다. 청주사범학교와 안동사범학교 교장으로 발령하여 안동교육대학의 학장으로 정년퇴직하실 때까지, 그분의 교육 43년의 총 경력 중에서 15년간, 교장직 27년의 반 이상을 사범교육에 종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전 한국에서도 드문 일일 것입니다.

안 교장의 청주사범학교 부임 초의 학생이었던 김효동(전 충북고 교장) 시인은 ‘존경하는 참스승’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습니다.

“안 교장이 광복직후의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부임하시고, 곧 교훈을 내놓으셨는데, 그것이 ‘문질빈빈(文質彬彬)’이었고, 교지(校誌)인 ‘무지개’의 권두언에서 손수 설명하시기를, ‘지식은 정신생활의 양식도 되어야 하고 생명면지속의 양식도 되어야 한다. 덕윤신(德潤身)이라 하였으니 안으로는 덕성을 함양하고 밖으로는 건전한 신체의 발달을 또한 기해야 한다. 이것이 참다운 삶이요, 인간으로서의 임무를 착실히 이행한 것으로서, 그 삶은 영세(永世)의 삶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겉모양의 아름다움과 내면의 아름다움이 서로 잘 어울린다는 뜻이다’라고 하셨다.”

공자가 논한 문질빈빈(文質彬彬)은 질승문칙야 문승질칙사 문질빈빈 연후군자(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논어(論語), 옹야(雍也))입니다. ‘질이 문에 승하면 곧 야하고, 문이 질에 승하면 곧 사하니, 문과 질이 고른 뒤에야 군자라 할 수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요컨대 소박과 문명의 어느 쪽이 이겨도 완전한 생활은 아니고, 잘 균정이 잡힌 뒤에야 처음으로 신사(紳士)라는 것, 그래야만이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교장이 설정한 교훈은 교육학적 용어로는 전인교육(全人敎育)이라 할 것이니, 교육자의 교육을 전인교육으로 해야 그 교육자의 손으로 전인교육이 된다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굉장한 선각이요 선구인 교육개혁의 구호와 실천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김효동 시인은 또한 ‘안 교장선생님은 장차 교사가 될 제자들에게 항상 사혼(師魂)에 대하여 강조하셨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범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일생의 천직이 결정되어 진로가 확정적이므로, 각자가 최선을 다하기 위한 노력이 있을 뿐이요, 그 장래에 맡은 바 직분은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좌우하는 육영사업이니, 극히 중차대하다. 장래 유위(有爲)유능(有能)한 국민을 양성함에는 지도자 자신이 충실해야 한다. 참다운 스승이 됨에 추호의 부족함도 없어야 한다. 민족혼에는 어디까지나 민주주의 정신이 들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참다운 스승에는 사혼이 확실히 있어야겠고, 이 사혼이 건국교육의 주동력이 되어야 할 것이고, 우리 민족정신과 자주독립성을 발현시킬 수 있는 힘이어야 한다.”

이것은 안 교장이 사범교육의 세 가지 목표와 기능, 곧 △국민적 품성의 도야 △전공과목 실력의 양성 △교직자적 신념의 배양이라는 것을 투철하게 이해하고 철저히 적용하려 하셨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안 교장이 청주고 교장이 되신 것은 1957년이니, 청주고가 중고 분리로 청주중에서 분리하고서도, 아직 고등학교 교사가 따로 지어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사창동에 청주고를 건축해 이전한 것이 1960년 9월의 일이니, 안 교장은 이미 안동사범학교 교장으로 전임한 뒤의 일입니다. 그런데 사창동 청주고의 원형건물은 당시에 전국적으로 아주 드문 건축물이어서, 그 건축의 발상자요 결정자요 주체자인 안 교장은 긍정적인 평가보다, 원통교실이니 원탑교실이니 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더 많이 받으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왜 안 교장은 그런 건물을 취택하셨을까? 짐작컨대 우선 도청 관계자들의 반대가 여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육자들도 생경한 그 건물의 발상에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청주고등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노골적으로 아주 싫은 소리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10여년 뒤에 이전 계획을 세워서 1974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교육감 시절(1984~1991)에, 청주고를 한국 최초의 인문사회의 영재학교로 만들고자 구상했던 사실이 있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그것을 만들지 못하고 떠나서, 지금도 그것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는데, 안 교장은 청주고를 충북 지역을 대표하는 학교로 특성화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안 교장이 옮겨 사신 여러 군데의 주택에는 전답(田畓)과 축사(畜舍)가 있었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멀리 떨어진 곳에 농장을 가졌었습니다. 이것은 선비집안의 생활에 보태는 수단이기도 하였는데, 그 관리를 가족한테 시켰다는 것은 주목거리입니다. 시골 출신이고 농업을 공부하고 가르치며 사신 농학도의 농심(農心)=농자는 천하의 대본을 지킨 것인지도 모릅니다. 안 교장의 청백은 모두가 말하는 것입니다. 안 교장이 자전거로 출퇴근하셨다는 것과 함께, 꼭 따라다니는 수사가 한겨울에도 장갑을 끼지 않으셨다는 말을 제자들이 입을 모아 말합니다. 그것은 검소했다는 표징이라고.

안 교장의 염결(廉潔)에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장점은 공사(公私)의 분별입니다. 공(公)을 사(私)로 이용하지 않고, 사(私)를 공(公)으로 취하지 않음, 곧 이것을 분별해 처신함이 보통사람으로서는 어려운 것인데, 안 교장의 그것은 참으로 한 치의 착란(錯亂)이 없는 절연(截然)한 것이었습니다. 안 교장이 그것을 어기고 벗어났다는 것을 평생을 통하여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안 교장이 사실과는 다르게 차가운 분이라는 인상을 남긴 것이 다름 공사의 엄별이라고 봅니다.

안 교장의 안분(安分)이라는 것도 참으로 고귀한 것입니다. 어떠한 이익과 자리로 유혹해도 길이 아니면 응하지 않으셨고, 당시에 지역 유지들이 참여한 청주로터리클럽에서 상례로 하는 아호(雅號)로 부르는 매너에서, 회원들이 지어준 호가 우일(宇一)인데, 아마도 평생에 처음으로 그렇게 크게 포장(?)해 봤을 것입니다.

안 교장은 그래서 ‘군자는 지금 그 자리에 따라 행하고, 그 밖의 일을 바라지 않는다.(군자소기위이행 부원호기외(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중용(中庸), 14-1)’와, 공자의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참견하지 않는다.(자왈 불재기위 부모기정 증자왈 군자사부출기위(子曰 不在其位 不謀其政 曾子曰 君子思不出其位)(논어(論語), 헌문(憲問))대로, 자기의 분수 외에는 남의 일에 참견(參見)도 하지 않고 논란(論難)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안 교장은 평생을, 후생(後生)의 성장(학습)가능성을 경외(敬畏)하면서 봉사한 교육자, 성장(成長)을 일구는(cultivating one’s growth) 교육자로만 초지일관하셨으니, 삼락(三樂)으로 사신 군자(君子)라고 할 것입니다.”

▷윤건영 청주교대 총장 “유 위원장님께서 안택수 선생에 대한 전반적인 얘기를 하셨는데 우선 사범학교에서 미래 교사가 될 학생들에게 모범을 보이신 것이 저에게는 상당히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저도 안택수 선생님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그 분의 제자 몇 분을 수소문해서 대화를 해보기도 했습니다. 안 선생님은 위원장께서 말씀 하신 것처럼 근면하셨고 청렴하셨고 그 시대에 혼란 속에서 많은 학생들이 힘들어 할 때, 시대적인 흐름 속에 청년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굳은 신념을 이야기하시며 중심을 잡아주셨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안에 대해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아 인사 조치를 당했다는 얘기도 들었고, 정치적 입문에 대한 유혹 또는 권유가 있었는데 과감히 뿌리치고 자기 소신을 지키셨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며 풍부한 시대적 식견과 전문성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인이 그 시대에 필요한 스승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진정한 스승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안 선생님은 ‘문질빈빈’의 가장 대표적인 모범을 보이신 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유 위원장 “조심스러운 얘기인데 광복 후 청주사범학교 선생님 중 좌익의 기운을 가진 분들이 가장 많았어요. 청주상고, 청주사범학교 선생님 중 빨갱이라고 지목된 분들이 많았거든요. 그 틈바구니에서 안 선생님이 그 이들을 한편으로 지켜야 하고 한편으로는 눌러야 하는 가운데서 교장으로서 고충이 얼마나 많았을지 생각하게 돼요. 좌경 선생의 과격한 행동의 우려를 적절히 잘 끌어안고 누를 땐 누르고. 다독일 때는 다독인 것입니다. 청주사범학교는 오직 안 교장이 6.25 후까지 이어갔으니 혼자 다 겪으신 거죠. 저는 당시 청주상고 학생이었거든요. 학생도 두들겨 맞고 선생은 감시를 받고 그런 것을 전부를 끌어안고 계셨던 분이 안택수 선생님입니다.”

▷윤 총장 “안 선생님은 9년간 교장을 하셨는데, 6.25 전쟁 등 나라 전체가 혼돈의 와중에 빠져있는 상황 속에서도 사범학교의 교훈을 지어주시는 등 바람직한 교사 양성을 위해 필요한 학교의 제반사항 정립에 큰 역할을 하셨고, 이러한 면에 통찰력을 지닌 분이셨다고 합니다. 안 교장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에 제자들이 참된 스승이 될 수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안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선생님의 제자인 사범학교 동문들이 중심이 돼 모임을 구성했는데 그 모임 이름이 ‘안질빈빈’이었다고 합니다. 사범학교 8회부터 중심이 되어 매달 22일에 모임을 하는데 지금도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안택수 선생님의 조카이신 안병길 선생님, 8회 이신 신채식 선생님, 그리고 안 선생님의 막내아들과도 대화해봤습니다. 그런데 막내 아드님은 너무 나이 차이가 나서 아버지로서의 생각만 나지 교육자로서의 기억은 없다고 합니다. 제자들의 회상에 의하면, 선생님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6년 간 변함없이 같은 모자를 쓰셨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선생님을 근면하고 청렴하신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가장 인상 깊게 얘기하는 부분은 6.25 전쟁이 터졌을 때, 학생들에게 직접 ‘지금 전쟁이 일어났다’는 급보를 전달하면서 파했답니다. 오랜 전쟁을 겪으면서 흩어졌다가 모임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항상 선생님이 중심에 서서 학생들을 다독이시고,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하시면서 모범을 보이셨다고 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선생님은 내면과 외면이 조화를 이루는 참 스승이셨다고 합니다.”

▷유 위원장 “당시 선생님 중 보도연맹으로 죽은 사람들이 많았어요. 보도연맹 가입했던 사람 중에 A급, B급은 무조건 다 죽였거든요. 오히려 도망간 사람들은 제외해요. 당시 월북한 분도 있습니다. 안 선생님은 교장으로서 그런 문제들을 다 겪으신 겁니다. 끔찍한 거에요. 지금 편하게 교장 하는 것과 비교가 안돼요.”

▷윤 총장 “상고와 사범학교는 상당히 좌편향적인 학생 중심이었고, 청고와 농고는 상당히 우편향적인 학생 중심이어서 항상 대립 갈등이 있었는데, 그 와중에 안 선생님이 사범학교 안정시키고 면학 분위기를 조성한 분이라는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유 위원장 “보통 공립학교 선생님들은 전근을 가니 고민할 일이 별로 없어요. 한국에서 교육자로서 이름 있는 분들은 대부분 사립학교 선생님인 것이 그 분들은 10년, 20년씩 교장을 하는데 공립학교는 5년이면 의무적으로 떠나야 하니까요. 안 선생님은 사범학교에서 오랫동안 있으며 기틀을 만들어 놓으셨으니 그만큼 제자들에게 후일담이 나오는 거죠.”

▷윤 총장 “그 당시에 사범학교가 6회 때부터 남녀공학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그 때 어떤 선생님도 여학생에 대해 존중하지 않았는데 안택수 선생님만 남학생과 여학생을 균등하게 지도하셨다고 합니다. 또 학생들이 배구, 야구 시합을 많이 했는데 그런 때마다 학생들에게 “무조건 이기려 하지 말아라. 오히려 공정하게 해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고 하며 공정하게 지는 것에 대한 가치를 설명하고, 인성교육을 강조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청주고 교장으로 가셔서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고 해요. 그 이유로 두 가지를 기억하고 있는데, 청주고에 원통학교를 지어 놓았는데 불편하니 긍정적이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또 사범학교에 계실 때부터 공부 보다는 사람됨에 대한 강조 많이 하셨는데 청주고에 가셔서도 그런 방식으로 학교를 운영하니 대학 입시 위주의 생활을 하던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안 선생님이 안동으로 가신 것도 인성교육에 대한 소신 꺾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합니다.”

▷유 위원장 “안동은 여기와 공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사범학교는 그 당시 일종의 국립학교니까. 안 교장이 얼마나 사범교육에 대해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느냐 생각해야 돼요. 그 당시 도 간 교류는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이 분은 청주고에서 잡음이 있고 하니 중앙 정부 차원에서 안동사범학교로 옮겨 간 것입니다.”

▷김 주간 “두 분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안택수 교장선생의 인상은 ‘외엄내온(外嚴內溫)’, 밖으로는 굉장히 엄격하셔서 싸늘하다는 느낌을 가질 정도였지만 안으로는 균형 잡힌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또 빈틈없는 원리원칙을 실천하는 분이기도 하셨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참으로 어진=‘인(仁)’의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사범’이라는 의식이 강해서 선생은 모름지기 학생에게 모범이 돼야 하고 교장은 교사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1957년 대학을 나오고 1년 간 취직을 못하고 있다가 1958년에 청주공업고등학교에 취직을 하고 그 다음 해에 청주고등학교에 갔어요. 그런데 기억이 뚜렷하지 않았는데 유 위원장께서 정리해주신 것을 보니 1960년에 안동고로 전입을 했다면 제가 청주고에 가서 안택수 교장 선생을 모신 것이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였습니다. 저는 고교 교사 시절에 네 분의 교장선생을 모셨는데 안택수 교장선생은 외엄내온이라는 느낌이었고 윤봉수 교장 선생은 소탈무애(疏脫無碍=수수하고 소탈하며 막힘이나 거침이 없음) 자체였고 고동수 교장선생은 충경청일(忠敬淸壹=하나님을 올곧은 마음으로 섬기는 맑고 뛰어난 인격)의 크리스찬이었으며 김중근 교장선생은 저신강직(底身强直). 몸을 항상 낮췄지만 기어이 자기 뜻을 기어코 관철시키는 분이었습니다. 지금 제가 두 분 말씀을 들으며 생각한 것은 그 때와 비교해 여러 측면에서 크게 다른 21세기 한국에서 교사란 어떤 자질과 역할이 요청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 자신의 개인적인 소견입니다마는 정치가가 미래를 연다는데는 회의적입니다. 정치와 정치가에게는 최우선적으로 현재의 당면 문제를 가능한한 공명, 공정, 공평하게 해결함으로서 국민적, 국가적 갈등, 대립, 분열을 최소화하는데 필요한 자질과 역할이 요청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학교와 교육 그리고 교사에게는 지금보다는 미래에 이 나라 이 겨레의 주역이 될 인재를 키우고 기르는 일에 필요한 자질과 역할이 요청되기 때문에 미래를 여는 것은 교사와 학생이 함께 할 공동과제입니다. 결국 교육이란 미래공창(未來共創-미래를 함께 열다)이며 교사와 학생은 미래공창의 공동주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함께 열기 위해서는 미래공창의 공동주체인 교사와 학생의 영혼이 진정으로 자유롭다는 것이 필수불가결의 선결조건이라는 것이 저 자신의 80여년을 살아오는 동안에 체득한 체험적 사실입니다. 그래서 참교육은 영혼의 탈이데올로기적 정치화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사와 학생이 영혼의 탈식민지화와 미래공창의 길을 함께 더불어 서로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교육과 교사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될 때 우선 일제 강점기의 교육과 교사에게 요구되었던 교육정책과 교육철학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영혼의 식민지화를 철저하게 시행했던 결과와 그 영향이 아직도 여기저기서 감지되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독립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나름대로의 제도화도 진척된 것이 사실입니다만,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너무 과거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측면이 적지 않습니다. 이 점을 제대로 의식화, 문제의식화하기 위해서 일제 강점기의 교육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범교육이라는 것은 일제시대에 들어온 말입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우리나라에 심으려 할 때 반발이 심해 효과적이 아니어서 문화정책으로 바꾼 거에요.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최고급 엘리트와 중간층 엘리트와 대중 세 단계로 나눠 각각에 걸맞는 교육을 폈어요. 최고급 엘리트들은 경성제국대학에 모아 놓고 일본 동경제국대학에서 수련한 뒤 독일에 보내 당시의 최첨단 문물을 정하게 하고 일본인 학자들을 보내서 그들의 지도를 받게 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충실한 신민을 만들기 위해 최고 엘리트를 교화시키는 거죠. 중간층의 엘리트 형성은 중·고등학교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범학교를 만들어서 황국신민에 합당한 인간형성을 기본방침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다름아닌 영혼의 식민지화를 꾀하는 교육이었다는 것입니다. 대일본제국 정부는 혼(魂)이라는 말을 자주 썼습니다. 예를 들면 야마토 타마시(大和魂)라든가 닛뽄타마시(日本魂) 같은 말입니다. 사혼(師魂)이라는 말도 잘 썼습니다. 한국인의 영혼을 일본혼에 종속시키려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과 내일의 바람직한 교육을 생각할 때 과거에 일본에 의한 영혼의 식민지화가 필요했다면 현재는 미국이나 일본 또는 중국에 의한 식민지화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영혼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게 되면 무엇이 가능해지는 것인가? 제가 대학교수, 중·고등학교 교사로서 느낀 것은 항상 우리 보다 앞서가신 선인들의 언행을 선입견이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상태에서 깊이 성찰하고 그 분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시대의 변화로 말미암아 생긴 새로운 차원=미래를 학생들과 함께 열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윤 총장 “역사는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보고 미래를 대비하는 것인데 외람된 말씀이지만 과거 일제시대의 사범학교 때의 프레임으로 현재를 분석하면서 어떤 식으로 가겠다고 할 때는 당혹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지금 현재 교육대학이라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은 일제 강점기에 출범한 그 당시 ‘사범’이라는 개념에서 많이 탈피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의 교육은 과거의 부정적인 면에 대한 성찰을 통해 미래를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만, 과거에 있었던 것 중 시공간을 초월해 인간이라면 지녀야 할 것을 찾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의 중심을 잡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렇다면 미래에 주인공이 될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를 양성하는 교대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지금 교수님이 말씀하신 문질빈빈의 다양한 해석 속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교수님이 말씀하신 내용 중 상당히 많은 부분이 현재 추진 중인 2015개정 국가교육과정에 많이 반영돼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4차 산업혁명의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고 하는데, 거기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것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엘빈 토플러의 사회변동론 관점에서 보면, 농업 사회에서는 토지에서 부를 창출하였고 그에 따라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고 근면한 것이 핵심 가치였다면, 산업혁명 시대에는 자본으로 공장에서 제조업을 통해 부를 창출하였고 그에 따라 관리와 지배가 중심 가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식과 정보를 기반으로 하는 정보혁명 시대나, 지금 4차 산업혁명으로 명명하고 있는 지능정보화사회에서는 인간의 머리 즉 뇌에서 부가 창출되는 시대로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의 교육은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거나 기억하기 위한 교육이라면, 미래의 교육은 스스로 지식과 정보를 찾아가고 그것을 해석하면서 학생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학습자 중심 교육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전통적 리더십에 근거한 과거의 교육은 능력 있는 사람이 앞에서 이끌고 갔다면, 현대의 리더십에 근거한 미래 교육은 학생들 당사자가 스스로 가진 잠재적 능력을 개발하고 최대화할 수 있는 비전의 리더십, 섬기는 리더십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양과 본성을 전제로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고 그 속에서 찾아갈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논리로 보면 문질빈빈이라는 개념이 현재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최근에는 교수학습모형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예를 들어 프로젝트형 학습법은 교사가 일방적으로 과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 대해 학생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로드맵을 짜서 해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4차 산업 혁명을 말할 때 이런 얘기를 합니다. 데이터 영토에서 정보를 모으는 것은 인공지능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단순히 정보와 지식을 모으거나 관리하는 능력을 넘어 지혜의 단계에까지 가야 한다는 겁니다. 외형적으로 정보를 머릿속에 넣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충분이 이해하고 더 나아가 생활 속에서 실천과 체험을 통해 삶의 지혜를 체득 또는 터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 학교 현장에서의 교육이 단순히 이론적인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는 수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과 실습이 많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즉 이미 말씀드렸듯이 학생들이 가진 잠재능력을 발현하고, 스스로 현실 속에서 문제를 찾고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함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문질빈빈이라는 개념이 현대적 관점에서도 충분히 논의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의 교육은 실용적인 역량을 강조하면서도 인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상상력과 창의성을 강조하면서도 바른 인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2015개정 국가교육과정의 비전이 ‘바른 인성을 갖춘 창의인재 양성’이라는 것이 그것을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초등교사를 양성하는 교육대학에서도 교수님이 말씀하신 내용대로 바른 품성과 다양한 역량을 겸비한 예비교사 양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더욱더 그러한 측면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런 것을 학생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아직은 부족함이 많습니다. 최근 제가 신문에 칼럼을 쓰며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상상력 함양’이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농업 사회는 토지가 있어야 하고 산업 사회는 공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토지와 공장이 없으면 거기서 부를 창조할 수 없어요. 그런데 정보화 사회는 인간이 두뇌를 가지고 두뇌 기반 부를 창출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물적 자원은 부족하지만 인적 자원이 풍부한 우리나라는 많은 잠재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교육이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창의성이 풍부한 인재양성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현실과 가상공간이 공존하고, 인간과 지능화된 기계가 공존하는 시대에 교육은 국가 경쟁력의 기반이 됩니다. 상상력을 기반으로 무한한 디지털 영토를 개발할 수 있는 가상공간이 존재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혁명이 일어나야 하는 겁니다. 시대에 뒤지지 않는 교육개혁을 통하여 미래 사회를 우리가 선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대는 이제 속도의 경쟁을 하고 있고, 한번 뒤처지면 영원히 낙오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이 국민의 에너지를 소모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유 위원장 “윤 총장님께 하나 오해가 될 만한 소지가 있는 것을 말씀드릴게요. 사범교육을 우리는 교사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는 것이지 사범교육이라는 용어 자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청주사범학교나 지금의 청주교육대학교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양성하기 위한 교원 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교사 양성 학교의 기능을 생각한다는 것이지 전체 인문학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원 교육이 지향해야 할 것이 미국의 진보주의 학자도 사회 개조에 교사가 참여를 하는데 사회에 관한 지식을 철학에서 찾고, 사회 개혁의 수단을 인간 지성의 향상에서 찾는다는 데서 인간성의 낙관론적인, 거의 신앙에 가까운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안택수 교장의 문질빈빈을 해석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김 주간 “안택수 교장을 기리는 유성종 위원장의 말씀 가운데 농심(農心)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저는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농사짓는 마음이 스승의 마음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사회가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자신의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저도 한 때 농사를 지어봤어요. 제가 서양화 중에서 쟝 프랑수와·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교육은 어린 마음에 씨를 뿌리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속에 담은 씨입니다. 그 씨가 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교사에게는 희망이 필요한 거지요. 씨를 뿌린다는 것은 근원적 생명력을 어린 학생들의 마음속에 심고 키우고 자라게 해서 장차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더라도 나름의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어린 학생들의 타고난 생명에너지를 반생명적인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의 횡포로부터 묶어주고 그들의 근원적 생명력이 자유롭고 온전하게 발휘되도록 협력하는 일이 바로 교사의 기본적인 역할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교사는 다른 직종의 사람들 보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윤 총장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안택수 교장선생님이 ‘무지개’라는 사범학교 교지에 문질빈빈에 대해 설명하면서 ‘덕윤신(德潤身)’이라는 표현을 하셨어요. 많은 덕을 쌓고 인격 함양을 하면 그것이 밖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교사가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면서 교사로서의 품격, 사명감, 자긍심 등을 갖추고 나면 외면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저는 문질빈빈이라는 단어와 덕윤신이라는 두 단어가 이상적인 교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핵심 덕목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유 위원장 “‘대학’에 나오는 ‘부윤옥덕윤신(富潤屋德潤身)’이라는 말인데 재산이 많으면 집이 윤택해지고 덕이 쌓이면 몸을 윤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김 주간 “저는 이 말을 조금 다르게 해석합니다. 덕(德)은 우주생명이고 신(身)은 개체생명입니다. 우주생명에 각성하고 지각하면 개체생명이 새롭게 바뀌어 충일하게 됩니다. 이것은 누군가의 이론이 아니고 저 자신이 일상적으로 실천하고 있어서 몸과 마음과 넋으로 체감, 체험, 체득한 바입니다. 매일 아침 일찍 계속하는 호흡 수련을 통해서입니다. 호흡은 몸 안에 쌓인 낡은 공기를 밖으로 내보내고 우주생명이 생생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반복순환 운동입니다. 우주적이고 근본적인 생명에너지와 개체생명의 생명력이 상관연동함을 터득하면 개체생명이 훨씬 더 윤택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인간 안택수님을 우리 셋이 그리고 기려봤습니다. 젊은 세대도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 자신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좋은 사회란 좋은 스승이 곳곳에 계시는 사회입니다. 우리 고장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는 작고 약한 곳이었을지 모르지만 교육이라는 면에서는 어디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고 더구나 안택수 교장과 같은 훌륭하고 좋은 스승이 계셨기에 살만한 고장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청주를 저는 아주아주 좋아했습니다. 일찍이 공자께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마을의 인심이 어진 것이 아름다운 일이니 사람들의 마음이 어질고 두터운 곳을 택하여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할 수 있겠는가? 청주는 누가 무어라고 해도 아름다운 도시이고 그것은 산과 들과 거리가 아름답다기 보다는 청주라는 고을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질고 착해서 아름답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는 조건 중의 하나로 어진 스승이 계셔서 어진 인품을 보여주는 것이 믿음직한 실효가 있을 것이며 인간 안택수님은 바로 그런 어질고 좋은 스승이었다고 저는 기억합니다. 엄격하지만 어진 분이었다고. 그래서 그분이 새삼 그리운 것입니다.”

<정리·조아라/사진·최지현>

 

조아라 기자  museara@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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