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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와 미래공창
<동양포럼>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와 미래공창
  • 박장미 기자
  • 승인 2017.07.02 22: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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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철학·문학대화 준비를 위한 대담

(동양일보) 다음은 오는 8월 14~16일에 동양포럼 주최로 열릴 예정인 한·중·일 철학·문학대화를 위한 사전의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지난 3월 1일 오후 일본 오사카의 타카츠키시(高槻市)에 있는 후카오 요코(深尾葉子) 선생의 자택에서 야마모토 쿄시(山本恭司) 미래공창신문 발행인 겸 편집인의 사회로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과 후카오 선생이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와 미래공창이라는 주제로 나눈 대화 내용을 미래공창신문 재외기자 겸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소 연구원 야규 마코토(柳生眞) 박사가 번역한 것이다. <편집자>

(왼쪽부터) 김태창, 야마모토 교시, 후카이 요코

 

▷야마모토 교시(山本恭司) 미래공창신문 편집장 “보통 ‘식민지화’라고 하면 근대 이후 서양 열강에 의한 인간의 생명과 재산 및 여러 권리들을 강탈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됩니다만 이번은 <혼의 탈식민지화> 총서를 내시고 전문분야 횡단적으로 연구와 언론 활동을 하고 계시는 후카오 요코 오사카대학 준교수와 공공하는 철학의 시각에서 ‘동아시아에 있어서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를 중심 의제로 한 대화 활동을 계속해 오신 김태창 선생과의 진솔한 대화가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저의 생각이 있어서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한국에서 오늘(3월 1일)은 1919년에 조국의 자주독립을 전 세계에 선언하고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강력 규탄하기 위해서 남녀노소가 총궐기했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3.1절이라고 부르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 후의 36년간의 일제 강점기를 포함해서 98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개인적·집단적 영혼의 식민지화·영토화 상황에서의 탈출과 참된 의미에서의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틀림없이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정치적·법률적인 의미에서는 자주독립 주권국가의 지위를 되찾았는데도 불구하고 철학적·사상적·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아직도 말끔히 탈식민지화되고 탈영토화된 영혼을 키우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양(多樣)·다원(多元)·다층(多層)의 영혼의 식민지화·영토화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주제로 삼은 대화집회를 여러 번 개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해서 어딘가 미흡한 성과밖에 올리지 못해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던 차에 우연히 후카오 선생의 <혼의 탈식민지화>라는 책과 그에 관련된 몇 권의 총서들을 읽게 되었고 몇 가지 절실하게 체감한 바가 있어서 우선 한중일의 관심 공유자들에 의한 대화의 장을 마련해서 진지한 공구공론(共究共論)의 기회를 가질 필요가 있고 한·중·일 삼국간의 바람직한 미래를 함께 열어 가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후카오 요코(深尾葉子) 오사카대학(大阪大學) 준교수 “‘혼의 식민지화’라는 의미에서는 동아시아가 공유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 김태창 선생님의 문제 관심이군요.”

 

▷김 주간 “그런 생각을 생각으로 머무르게 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올해 광복절(8월 15일)을 끼어서 8월 14일부터 16일까지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를 주제로 한중일의 학자·연구자·학생들에 의한지역간·세대간·남녀간 대화의 광장을 제가 주재하는 동양포럼에서 개최하려고 합니다.”

 

▷후카오 준교수 “아주 시기적절하고 중요한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김 주간 “한·중·일이 각각 한 명씩 국민 작가로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문학자를 뽑아서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서 비교 검토해 보기로 했습니다. 이 문제는 철학이나 사상보다는 문학에서 더 잘 다루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 단계로 한국의 조명희(趙明熙),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그리고 중국의 루쉰(魯迅)을 새 밝힘 해보려는 것입니다. 세 명 모두 압도적인 문명력(文明力)을 가지고 쳐들어오는 서양 중심의 근대화라는 이름의 격류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자민족과 자국민의 영혼이 식민지화·영토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는 점에서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 자신의 문제 관심은 한국·한국민이 대일본제국부터의 정치적·법률적인 의미에서 탈식민지화·탈영토화는 달성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후의 경과를 보면 중앙(서울)에 의한 지방의·현재세대에 의한 장래세대의·남성에 의한 여성의 재식민지화·재영토화라는 사태가 갈수록 심화되어가고 정치·문화·의식적인 의미에서는 미국·유럽·중국·일본 등에 의한 영토화라고밖에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위기감과 그것에 대해서 사상적·철학적으로 어떻게 대응·대결·대처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다차원적인 식민지 근성과 영토민적 기질의 발본색원을 시도하는 것이 긴급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의미에서 영혼이 자유롭게 된 상태에서만이 한중일의 바람직한 미래를 서로·함께·치우침 없이 창발(創發) 시킨다는 목표가 실현가능하게 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중·일이 각각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의 과정을 제대로 겪어내는 것이 필수불가결의 조건이라는 경험칙(經驗則)을 체득했는데 이것을 다시 증험하고 싶다는 것이 저 자신의 입장입니다. 저 자신의 체험·경험·증험·효험의 결과에 바탕을 둔 신념의 재확인입니다. 진정한 미래공창의 원동력은 정말로 자유로운 영혼 간의 영통(靈通)·영향(靈響)·영화(靈和)를 통해야만 온전하게 발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하면 한중일 각각이 현실적인 현상 면에서는 각양각색이지만 근원적인 면에서는 공통적으로 영혼이 과거에 형성된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한중일이 아직도 상호경계와 적대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다른 여러 가지 요인을 충분히 감안하고서도 영혼이 과거의 주박으로부터 충분히 해방되지 않는 채로 있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후카오 준교수 “저도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동아시아는 교묘하게 분단되고 있습니다. 그 분단에 일본인도 중국인도 모두 놀아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듯 쉽사리 몸과 마음과 넋이 통째로 얽매이게 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만 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라고 생각합니다.”

 

▷야마모토 편집장 “야스토미 아유무(安冨步) (도쿄대학) 교수와 후카오 선생이 함께 쓰신 ‘<총서: 혼의 탈식민지화>의 간행사’에서 “신체에 의해 실현되는 운동을 ‘혼’이라고 부른다”고 쓰셨습니다. 많은 것을 간결하게 표현한 이 한마디에 어떠한 의미를 담으신 것입니까? “혼”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후카오 준교수 “‘혼’과 ‘마음’을 엄밀하게 나누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감정과 마음은 이차적으로 만들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애국주의”가 계속 주입되면 피가 끓고 충성심이 환기되곤 합니다.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되기 십상입니다만 실은 머리에 입력된 것에 의해서 용이하게 조작되는 면이 있습니다. 마음은 신체의 위쪽에 있고 혼은 명치 가까이에 있으며 혼은 존재의 본질이나 전체성과 직결되고 신체에 깃드는 중심이라고 느낍니다. 혼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신체성(身體性)을 가진 생명의 움직임의 역동성을 물심양면에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정된 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깥세상과 항상 교류하면서 삶을 이어가는데 있어서 근원이 되는 혼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신체에 의해서 실현되는 운동’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인간 개개인을 생각하면 국가 레벨의 식민지화라는 문제 이전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모나 어른들에게 양육되고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와서 여러 가지 학습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것을 몸에 지니게 됩니다. 때로는 신체적으로 몹시 위화감을 느끼는 것조차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자기를 거기에 억지로 맞추게 됩니다. 그것은 “목표”가 되기도 하고 이데올로기이기도 합니다만 바로 그러한 것이 성장 과정 속에 심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주박(呪縛)”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주입시킨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져도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주박하고 오히려 그것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그 주박을 없애려고 해도 ‘이것이 없으면 나는 끝장이다. 절대로 놓을 수 없다’라는 확신이 자리 잡게 되기 때문에 좀처럼 없앨 수 없습니다. 이 주박이야말로 언젠가는 인간 사회를 죽음으로 몰아놓는 작용을 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근대 이후의 동아시아에서는 주박의 연쇄가 겹겹이 쌓이고 있습니다. ‘전쟁’의 기억이 다양한 주박을 만들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그것을 망각하려 하고 더욱 견고한 뚜껑 밑에 봉인하려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아 있는 혼은 그것에 괴로움을 느끼고 있을 텐데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밀봉당해 버리면 거기서 벗어나가기는 매우 어려워집니다.“

 

▷김 주간 “이러한 경우의 ‘혼’이란 어떤 것입니까? 저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를 말씀드리자면 혼이란 개개인의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몸과 맘과 뜻을 균형 있게 아우르고 조화롭게 기능하도록 받쳐주는 근원적 생명력=에너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후카오 준교수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김 주간 “저 자신은 영혼의 식민지화·영토화야말로 근본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다름 아닌 반생명·생명파괴·생명부정의 극치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영혼이란 우주생명과 개체생명의 상관연동태인데 그것은 절대로 식민지화·영토화해서는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성역인데 감히 그것을 지배·통제·주박하려는 참월이요 참람이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서 온 생명의 참모습을 되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후카오 준교수 “네.”

 

▷김 주간 “후카오 선생의 경우에는 혼의 식민지화가 어떤 현상으로 나타납니까?”

 

▷후카오 준교수 “저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라는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애니메이션을 실제로 보면서 해설해 보았습니다. 여러 물건으로 무장한 인간의 혼이 그 무장을 잇달아 벗어가는 과정이 멋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하울의 성은 여러 가지 잡동사니를 몸에 걸친 보기 흉한 성입니다만 마법이 풀리는 과정에서 마지막에 널빤지 한 장만이 남게 됩니다. 최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까지 가지 않으면 ‘탈식민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혼의 탈식민지화 과정을 한 번 경험한 줄로 알았습니다만 실제로는 거기서부터 또 수십 년간 다른 잡동사니들을 몸에 걸치고 그것들에 얽매어왔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1년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습니다. 한 번 더 그것(혼을 뒤덮은 잡동사니)을 없애야 되겠는데 한편으로는 ‘이것이 없으면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다’는 고착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그것에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김 주간 “말씀을 들어보니까 제가 실제로 체험한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재식민지화·재영토화와 재탈식민지화·재탈영토화가 끝도 없이 반복되는 계속적인 과정과 서로 일치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후카오 준교수 “말씀하신대로 일단 혼의 탈식민지화가 이루어졌는가 싶으면 또다시 혼의 식민지화가 잠입하게 됩니다. 정말 큰 고통입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것들을 정말 힘겹게 뛰어넘어 왔습니다.”

 

▷야마모토 편집장 “몹시 괴로워하셨을 때는 아직 식민지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습니까?”

 

▷후카오 준교수 “머리로는 ‘이것이 원인이다’라고 알고 있었지만 몸이 말을 안 듣게 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몸을 계속해서 괴롭혔던 것입니다. ‘혼의 탈식민지화’라는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계속 자문하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에 ‘한 번 자기가 있는 자리를 떠나 보라’ 라는 말을 듣고 관동(關東) 지방의 병원에 1주일 정도 스트레스 입원했습니다. 그런 자리가 주어져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마주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금방 불안정해졌는데 ‘그렇게 불안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일단 안정시키고 나서 한 가자 한 가지씩 차근차근 학습을 하게 된 것이 50세를 지나고 나서였습니다.

 

▷야마모토 편집장 “스트레스 입원으로 ‘학습’을 하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의학적인 지식이 도움이 되었다는 말씀입니까?”

 

▷후카오 준교수 “그런 건 아닙니다. 입원이라고 말은 해도 실제로는 별달리 한 것이 없습니다. 그냥 병원에서 세 끼 차려주는 밥을 먹으면서 자기의 정신과 마주 대하고 ‘자기 혼자서 편히 쉬라’라는 지시를 받은 것뿐입니다. 약도 안 먹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저에게는 그런 경험 자체가 없었습니다. ‘아이를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일상의 시간과 정신을 다 써버리고 있었습니다. ‘저 혼자서 편히 쉬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심한 저항감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은 해도 제 몸은 편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편해진 몸에 의식을 돌리고 자기 안에 잠재했던 에너지를 돌릴 수 있게 되었음을 확인하면서 간신히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지난달의 일입니다.”

 

▷야마모토 편집장 “‘혼의 탈식민지화’는 ‘혼의 독립’과 동시 진행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영혼의 독립’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후카오 준교수 “강한 혼을 저도 동경합니다. 하지만 저처럼 투구와 갑옷으로 전신을 무장하고 몸도 굳어져 있는 상태로는 ‘독립한 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몸에 걸친 잡동사니를 벗어던진 혼이 자기 내면으로 숨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재생산되어가는 데에 아마도 ‘독립한 혼’의 참모습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야 겨우 일어서서 재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느낌이 들게 된 상태입니다.”

 

▷야마모토 편집장 “그것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가 ‘나의 개인주의’라는 강연에서 앞으로는 ‘자기본위로 간다’고 말한 것과 같은 일종의 의식 전환과는 다른 것입니까?”

 

▷후카오 준교수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소세키가 혼의 탈식민지화를 의식하고 있었는지 루쉰(魯迅)은 어땠는지 매우 흥미로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혼을 둘러싼 사회생태학’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물질적·물리적으로 몸 안의 모든 세포들이 작동함으로써 ‘삶’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항상 열려 있어서 외계와 소통함으로서 산다는 것이 성립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과 ‘혼의 독립’이 일치한 상태에서 스스로 경계를 짓고 경계 바깥의 것을 배제한다는 것은 걸맞지 않습니다.”

 

▷야마모토 편집장 “외계와 혼 사이를 차단하던 뚜껑이 열려서 혼이 바깥세상의 공기를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게 되셨군요.”

 

▷후카오 준교수 “자신이 항상 ‘이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외부에 실은 우리를 성립하게 해주는 소통작용이 널리 파급되고 있는 거지요. 그것은 아마도 우주에 퍼져 있는 연기(緣起)와도 같은 것인데 그 안에서 하나의 생명체로 살고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혼은 틀림없이 독립하고 있지만 그 독립이라는 것은 우주적 상호작용 속에서만 가능한 독립입니다. 불교사상에서는 그것을 ‘대아(大我)’라고도 하는 것 같습니다. 혼의 탈식민지화를 함께 생각하는 친구가 최근에 마침내 그 “대아”의 경지를 획득하게 되었다고 말했었는데 저도 빨리 그런 경지에 도달하고 싶습니다.“

 

▷김 주간 “후카오 선생의 책을 읽다보면 ‘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충실하게 산다’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혼의 소리’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후카오 준교수 “매우 어려운 질문입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만 그것은 동시에 달성하기 아주 힘든 과제이기도 합니다.”

 

▷김 주간 “하지만 바로 거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평상시에는 혼의 소리가 들리지도 않거니와 혼의 소리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습니다. 그런 상태가 계속되는 사이에 부지불식간에 영혼의 식민지화·영토화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혼은 늘 외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을 알아듣는 귀가 없거나 혹은 들리는데도 일부로 안 들리는 척하는 것이 아닐까요?”

 

▷후카오 준교수 “오히려 혼의 절규를 차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김 주간 “‘혼의 소리’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후카오 준교수 “여러 형태의 병적인 거부반응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제 경우에는 ‘혼의 부조(不調)의 소리’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여기에 갇히고 있다”라는 신호가 몸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혼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은 그것조차도 느끼지 못하게 되고 혼이 아무리 신음소리를 내고 있어도 태연하고 멀쩡합니다. 임무를 잘 수행해서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사람들, 관료기구 안에서 기계와 같이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혼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 주간 “후카오 선생의 책에서는 ‘혼의 식민지화’가 그릇 속에 뚜껑이 꽉 덮여진 채로 갇혀진 혼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연 그대로의 인격이 아니라 여러모로 위장된 인격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후카오 준교수 “그렇습니다.”

 

▷김 주간 “지금 일본에서는 소위 혼론(魂論) 또는 영성론(靈性論)이라는 것이 여러 분야에서 유행하고 몇몇 대표적인 지식인들이 ‘일본적 영성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음에는 여러 층이 있는데 가장 깊은 층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 혼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점에서 저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혼은 마음과는 서로 분리시킬 수 없지만 그렇다고 같은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저에게는 마음이란 결국 의식이요 그것은 일반적으로 이성 또는 지성+감성 또는 감정+의지로 파악되어 왔는데 비해서 혼이라는 것은 몸과 마음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받치고 있는 보다 깊고 보다 근원적인 생명력=에너지라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해두고 싶은 것은 대다수의 일본인 전문가들이 혼을 마음과 같은 것으로 보는데 반해서 저는 혼은 마음과는 다른 생명력=에너지로 파악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영과 혼을 혼용하는 경향이 한일 양국에 유행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저 자신은 영을 우주적 생명력=에너지로, 그리고 혼을 개체적 생명력=에너지로 구분해서 그 두 가지 생명력=에너지의 상관연동태로 영혼을 새 밝힘 한다는 것입니다.”

 

▷후카오 준교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 주간 “갓 태어난 아이는 식민지화·영토화 이전의 영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는 가정교육이라는 명분으로 어떤 틀에 맞추려고 하지만 아이는 그냥 “살고 싶다”고 외치면서 자기 나름의 생명력의 발휘를 방해하는 자에 대해서 강렬하게 반항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부모야말로 아이의 영혼을 식민지화·영토화시키는 첫 번째 가해자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정도 학교도 사회도 생명력의 발동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도처에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속박·구속·제약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적나라한 생명력의 발동을 그대로 방치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타자)이 거기에 함께 있기 때문에 잘못하면 약육강식의 수라장이 되고 강자가 자기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약자를 마구 짓밟게 되는 야만상태를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공존의 규칙으로 법률이나 예의나 윤리도덕이 만들어지고 적나라한 생명력을 어느 정도 조정할 필요가 있게 됩니다. 사회나 국가의 기본질서라는 것이 없을 수 없는 조건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억제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지나치면 아이의 생명력을 쇠퇴시키게 됩니다. 그것을 어떻게 적정화·적절화·시중화(時中化)하느냐가 모든 사회에 있어서 기본과제입니다만 현제 상황은 억제가 너무 심해서 젊은이들이 생명력을 발휘할 기회가 막히고 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대다수 젊은 세대의 공통감각이 극심한 좌절감과 절망감인데 그 원인이 미래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희망상실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인데 어떻습니까?”

 

▷후카오 준교수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김 주간 “이와 같은 문제 상황이 확실하게 인식되고는 있습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가슴으로 느끼고 손발로 의미 있는 실천을 통해서 일상생활에서 제대로 문제해결에 함께 임한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측면에서 건전한 사회화 교육도 필요하고 기본적인 예절학습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어떻습니까?”

 

▷후카오 준교수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김 주간 “후카오 선생은 어떤 연유로 ‘혼의 탈식민지화’를 연구과제로 삼게 되셨습니까?”

 

▷후카오 준교수 “아마 유소기(幼少期)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어린 시절은 부모님이 ‘베헤이렌’(‘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의 준말)이나 일·중 우호운동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그러한 사회운동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제 주위에 많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일종의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저에게는 느껴졌습니다. 사회주의나 문화혁명에 경도하고 있는 어른들을 왠지 ‘이상하다’라는 눈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호언장담하는 것과 정반대로 자신의 삶이나 몸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였지만 중학교부터는 속박이 심해지고 교칙에 심한 부조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인간을 틀에 얽매서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고도경제성장의 와중이었는데 왜 사람들은 그렇게 미치듯이 산을 깎아 주택을 조성하는가? 고도경제성장에 열광하는 일본사회는 무언가에 흘렸듯이 스스로의 생태계를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을까’가 저의 모든 물음의 밑바탕에 깔려 있었습니다. 연구자가 되는 과정에서 중국의 황토고원(黃土高原)에 가서 저쪽에서 일본을 보게 되자 ‘일본은 이상한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되고 스스로를 상대화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기실 상당히 ‘이상’한 것에 사로잡힌 채로 인생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쪽은 저쪽대로 일본인이 사로잡혀 있는 것과 다른 것에 사로잡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사로잡히고 있는 것은 일본이 사로잡히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서로가 각기 다른 것에 속박되어 있지만 혼이 자유롭지 않다는 점에서는 똑같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일·중간을 왕래하는 가운데서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바깥쪽의 시점을 가지는 것으로 ‘자기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상대화한다’는 인류학과 역사학이 구사해온 수법을 중국과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면서 학습했습니다. 이 과정을 언어화시킨 것이 ‘혼의 탈식민지화’ 시리즈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야마모토 편집장 “지금 생태계를 가장 심하게 파괴하고 있는 것이 원자력발전이지요. 후쿠시마 원전의 엄청난 사고 이후 원전의 ‘전문가’에 대한 신용은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해설자의 원전 재가동에 의문을 표시하는 발언에서는 절박감이 느껴지지 않고 신문기사에서도 장래세대에의 책임을 지는 현제세대의 배려나 책임을 명확하게 의식하는 발언이 들려오지 않습니다. 국회에서도 원전 피재민의 참상이 언제 어디서 ‘자신의 현실’이 될지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21세기형 ‘문명재(文明災)’와 전면으로 대결·대응·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논의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습니다.”

 

▷후카오 준교수 “원전으로 물이나 공기를 오염시키는 것은 인간 스스로를 해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악순환의 공포를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원전이 언젠가는 인류에 대해 가공할 복합 재해를 가져온다는 것이 확실한데도 그것을 정지시킬 수 없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야마모토 편집장 “원전 재가동의 국책에 ‘NO’의 뜻을 표시하지 않는 지식인은 ‘반지성인(反知性人)’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학력과 지성의 높낮이는 곧 연동하지는 않습니다. 코이데 히로아키(小出裕章) 교토대학 조교(助敎)가 원자력 전문의 과학자로서 ‘원전 반대’를 외치고 경종을 울렸습니다만 인문계의 지식인은 대부분 ‘나랑 상관없다’는 자기규제 속에 숨어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타자와 장래세대와 공진(共振)할 수 있는 자기 혼에 뚜껑을 덥고 그릇과 과학만능 이데올로기에 의해 혼마저 식민지화 당하고 있습니다. ‘혼의 탈식민지화’를 주창하고 계시는 후카오 선생은 전문가의 그러한 자기완결적인 학문적 자세에 친숙하지 못하고 계시는 게 아닙니까?”

 

▷후카오 준교수 “이른바 아카데믹한 학술 활동에 참가하면 저는 자꾸 몸 상태가 안 좋아지고 그래서 계속하기 힘들어집니다. 이른바 ‘전문가’로서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면 아무래도 거부반응이 일어나게 되니까 결국 어느 학회도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야마모토 편집장 “후카오 교수가 논문이나 학술잡지 등을 통해 발표하시는 내용은 ‘학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탈식민지화된 혼이 온전하게 작동하는 세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는 실천 활동의 한 가운데에 계실 때 가장 충실감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닙니까?”

 

▷후카오 준교수 “그건 그래요. 그 밖의 일에 몰두하려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탐구’는 앞으로도 계속할 것입니다. 그것은 학문의 영역에서 권위자가 되려는 것도 아니고, 그 영역에만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항상 어딘가로 향해서 현 위치로부터 탈출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김 주간 “한자문화권에서 쓰는 ‘학문(學問)’이라는 말은 본래 ‘배운 것을 되묻다’, 혹은 ‘묻는 방법을 배우다’는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서양에서 말하는 ‘사이언스’의 번역어로서의 ‘학문’과는 그 의미하는 바가 다릅니다. 지금 후카오 선생이 말씀하신 것은 오히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학문’과 가깝다는 느낌이 듭니다. 메이지시대 일본에서는 서양에서 전래된 ‘사이언스’라는 말을 과학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전문분야별로 나누어진 분과학문(分科學問)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거지요. 과학이란 분화된(科) 학(學)이라는 거죠. 분할된 범위에 한정된 실증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정된 전문 분야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하게 알고 있지만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거의 완전히 무지몽매한 학자를 자주 보게 됩니다. 정말로 중요한 ‘인간’, ‘사회’,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전혀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저 자신은 어려서 조부로부터 현대어로 발하자면 사상·철학·문학·종교·도덕·윤리·역사 등등을 아우르는 동양고전 중심의 인간 형성학을 배워 익혔고 대학과 대학원 그리고 서양식의 분과학문으로서의 정치학과 철학을 연구 교수했으나 어떤 특정 전문 분야에 특화되는 것이 생리에 안 맞아서 언제나 새로운 강좌를 창설해서 저 나름의 생각을 학생들과 자유 활발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저 나름의 분야횡단적인 디스코스(담론)를 시도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자리에서가 아니면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 같은 문제를 함께 논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니까요.”

 

▷후카오 준교수 “수업이 그대로 탈식민지화의 생생한 과정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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