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희·루쉰·나쓰메 소세키를 통해 보는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

(동양일보)

조명희 선생의 아호 ‘포석(抱石)’의 뜻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유성종

포석 조명희 선생을 이야기하는 많은 사람들이 ‘포석’은 선생의 자작 호라는

데, 그 뜻이 무엇일까? 왜 ‘포석’이라 하셨을까? 하고 의아해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선 石(석)인데, 이것은 그 어른의 생가 마을에 큰 바위가 있어서 조벽암 선생도 ‘푸른 바위’라고 하셨다니까 쉽게 이해된다. 출신 고향마을을 호로 삼는 예는 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을 호로 삼으

셨다.

그러면 그 돌은 어떻게 보신 돌일까? 그것은 바위이다. 그래서 포석선생의 돌은 바위이고, 바위는 거대하고 부동불변의 우리 땅이고 우리겨레이고 우리나라이다.

그리고 포석선생은 가톨릭 신자인지라, 바위는 하느님께서 제공하시는 생명의 방패요 은신처요 보호소이다.

우리나라 명사(名士) 중에는 石(석)과 巖(암·또는 岩)을 호(號)로 쓴 분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포석선생이 자작한 호는 암석(巖石)을 ‘바라보는 돌’이 아니라, 돌에 ‘뜻을 심어’ 내 나라, 내 겨레로 생각하신 것이 남달랐다 할 것이다.

포석선생은 그 바위를 내 나라 내 겨레 중에서도, 피침(被侵) 피압박 민중의 참혹을 겪는 동포로 의식하여, ‘돌쇠’ 따위로 비칭(卑稱)되는 ‘돌’로 스스로를 겸칭(謙稱)하여 ‘抱石’이라 하신 것이다.

抱(포)가 가지는 뜻을 보면 포는 안을-포 / 품을-포 / 가슴-포 / 아름-포 / 던질-포 등의 훈(訓)을 가지며, 안을-포 / 품을-포에서만 하더라도 ‘끼어 안음 / 지킴 / 가짐 / 쥠 / 둘러쌈 / 갖춤 / 마음속에 가짐’ 등의 뜻으로 쓰인다.

포석선생이 쓰신 抱(포)는 동사로서 抱石은 바위를 안음, 곧 ‘겨레와 나라를 안는다./ 겨레와 나라를 안겠다. / 겨레와 나라를 안았다.’는 포부를 담으신 것이다.

포석선생은 바위를 ‘거대’와 ‘부동’과 ‘불변’의 조국 조선(朝鮮)으로 상징하시고, 그 ‘조국의 운명을 안고 산다.’고 결심하시어 그렇게 지으셨지만, 스스로는 바위를 돌로 낮추시어, ‘抱石’이라 하신 것으로 나는 해석한다.

이것이 백년 뒤의 후생(後生)이 포석선생의 작호에 바치는 변(辯)이다.

 

포석 조명희에 관한 단상

충북대 교수 김연숙

2008년이었던 것 같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내가 발표한 주제는 ‘한민족 디아스포라에 관한 연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술대회 및 협약체결을 목적으로 한 방문이었던 만큼, 러시아를 비롯한 다양한 국가로부터 온 한민족 디아스포라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를 안내받던 중 바로 조선인 문학가를 기리는 기념관을 방문하게 되었었다. 바로 조명희 기념관이었던 것이다. 기념관을 방문하는 전후에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는 한민족 디아스포라로부터 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그 즈음에는 이렇게 먼 중앙아시아의 수도에까지 기념관이 세워지는 한민족이 존재하였구나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지금, 조명희의 삶에 관한 글을 쓰게 된 상황에서는 그의 삶의 회피할 수 없는 한 지점에서 거듭해서 생각이 멈추고 만다. 그것은 후에 복권되었지만, 일본의 스파이라는 이유로 스탈린에 의해 사형 당하였다는 사실이다. 그에 대한 놀라움에서 평상복을 입은 선생의 표정과 사형을 당하는 순간의 죄수복을 입은 그의 표정을 자꾸 오가며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비록 식민 상태인 나라의 국민일지언정 그렇게 사려 깊고 활동적이고 우아하던 선생이, 끼니를 걱정하는 빈곤함 속에서도 무구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고 미운 이들까지도 큰 생명의 흐름의 한 부분으로 포용하던, 동무들에게 들로 나가자고 권하고 삶을 개선해 보고자 문학과 시와 연극 등의 활동에 적극적이던 선생의 성품과 삶의 내용을 고려해 본다면, 40대의 사형수라는 그의 죽음을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일제의 박해로부터 탈주할 수밖에 없었던 그 지점으로부터 소비에트로 망명한 이후의 선생의 내면 상태에 대하여 샅샅이 뒤져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언컨대 선생의 죽음의 원인이 선생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여, 선생의 소비에트로의 탈주 이후의 외적인 삶의 행적과 글들을 살펴본다면, 그는 대학에서 조선인들의 교육을 담당하였고 조선 문학을 이끌었으며, 동시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혁명을 격려하는 시들을 썼다. 또한 두고 온 고국을 언급하는 시들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성토가 더욱더 격렬해지는 동시에,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서는 노동 혁명에의 참여를 고무하고 있다. 인과관계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선생의 조선인에 대한 교육 및 영향력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서두에서 말한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전언에 의하면,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한민족들은 교육수준이 다른 민족에 비해 월등이 높아서 거의 대부분이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부지런히 노동하여 집단 농장의 공동체적 삶을 잘 가꾸어 모범이 되었으며, 특히 풍류에 밝아서 지역사회의 연극 등의 부흥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이런 정황에서 본다면,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된 방향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고 부질없이 애쓴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어떤 이유로? 이제 그 시대상을 점검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스탈린의 시대는 제국주의 못지않은 비인간적인 폭력과 잔혹성이 난무한 시대다. 우선 레닌의 후계자였던 스탈린의 인간성 자체도 문제시된다. 우선 그가 강력한 라이벌이던 트로츠키를 멕시코로까지 추적해 도끼로 암살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트로츠키는 멕시코의 유명한 사회주의자이자 민족화가인 디에고 리베라와 푸리다 칼로 부부의 도움으로 은신해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이쯤 되면 세련되고 지성적인 트로츠키에 대한 열등감이 잔혹성으로 표출된 것이라는 해석들에 대하여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리고 그 성품의 잔혹성이 사적 관계에서만 그쳤다면 좋으련만, 그 자신의 정치적 이념 내지는 철학적 빈곤함과 결합되어 공적 영역에서는 더욱 더 곤란한 사태를 빚어낸다.

이 모든 사태로부터 포석의 삶 또한 벗어나 있지 않다. 포석이 소비에트로 귀화하여 기대하고 신뢰한 것은 보편적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것이지 소비에트 중심의 일국사회주의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포석의 다음의 글을 보자. “‘쏘베트는 너이의 것이다 - 사람의 권리 - 공민의 권리를 찾아라 글을 배호아라 - 문명한 사람이 되자! 꼴호즈를 세우라 … ’ 쏘베트 정부는 이렇게 지도하엿다. 군중은 이렇게 실행하엿다.” 포석이 인용하는 보편적인 인간에 개념에 입각한 국제사회주의 노선을 스탈린은 슬그머니 일국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한 것인바, 보편적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고 노골적인 자국이기주의로 선회한 것이다. 그리고 자국 안에서도 자기에게 동조하지 않은 이들을 배척해 버린 것이다. 바로 이런 덫에 포석이 걸린 듯하다.

이것의 의미는 소련 바깥의 사회주의자로 하여금 소련의 국익과 안보를 충실하게 추종하든지 아니면 자체적으로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국내적으로는 공포정치와 반대파의 숙청, 국제적으로는 일국사회주의 노선. 요컨대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암살 및 숙청을 통한 제거와 국제관계에서 자국중심주의! 스탈린은 권력을 잡으면서 농민에 대한 공포정치와 모든 반대파의 숙청을 자행한다. 그리고 강력한 집단화 정책에 의해 집단수용소의 어린이·청소년들이 방치되거나 강제 이주로 죽음을 맞이하게 한다. 이런 파고를 한민족 디아스포라들도 피해갈 수 없었다. 필자는 앞에서 언급했던 우즈베키스탄 방문 중에 그 전후 상황에 관한 설명을 한 디아스포라로부터 직접 매우 소상하게 들을 수 있었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기차에 실린 채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에 내려진 한민족들 중에 절반 이상이 그해 겨울에 얼어 죽었다. 이주를 추진할 때 분명히 전에 살던 것들을 이주해서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이 담긴 증서를 주었는데, 무슨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정해 주지 않아서 하루아침에 오도 가도 못하는 날거지가 되었다.”는 증언이었다. 이런 노선 아래 있는 스탈린에게 양식 있는 이들이 동조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스탈린은 이렇게 동조되지 않는 또는 동조되지 않을 이들을 가려내고 무참하게 숙청해 버린 것 같다. 사람의 인정상 소비에트로 귀화하였다고 조국에 대한 염려를 벗어나 소비에트로 완전히 합치될 것을 기대하는 것은 각박한 처사다. 또한 소비에트로 귀화하였다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소비에트에 동일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가혹한 폭력이다. 이것은 마치 다른 세계로 이주해 간 사람에 대해 기존 사회에 속한 정체성을 모두 포기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국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보편적인 사회질서나 기본적인 인간성에도 맞지 않는다.

가혹한 세계대전을 전후한 이 시대에 대하여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전적인 정치학의 실패이자 도덕성의 실패로 선고하였다. 자본의 팽창욕과 정치적 술수가 교묘하게 결합되어 전쟁으로 격화된 시대에는 양심 있는 지성인들이나 민중들의 생명을 부지하는 것 자체가 벅차 보인다. 중국의 루쉰은 그의 대표작 <아Q정전>에서 민중의 표상 아Q를 통해 이 점을 경고하고 있다. 결국 김선우가 ‘아Q에게 보내는 루쉰의 경고’에서 말했듯이, 아Q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상황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총살되는 개죽음을 맞게 된다. 일본의 지성 소세키의 고뇌도 그의 문학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자신을 고양이로 위치시켜 주변을 객관적으로 살피는 구도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이미 소세키의 고뇌는 예고된다. 그의 다른 소설 <마음>의 주인공은 강제결혼을 피해 집을 떠났지만, 자신이 술수를 써서 친구의 애인과의 결혼을 선언해 버린다. 이 충격으로 친구는 자살하게 되며, 피해자가 더 폭력적인 가해자로 전환된다. 결국 주인공조차도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해버린다. 또 다른 소설 <행인>의 주인공은 아내와 동생을 의심하게 되고 신경증이 격화되어 이를 견디지 못한 주변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는 이야기다. 문학을 통해 폭력과 불신의 사회에 대한 경고장을 보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소세키는 바로 그 자신도 신경증적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병으로 죽게 된다.

어둠의 시대, 폭력의 세기에 민중은 개죽음을 맞이하고, 혁명가들은 민중을 각성시키려 애쓰면서 경고장을 보내기도 하고 사회운동에 투신하기도 하지만 바로 그 자신이 희생당하기도 하고, 양심적 지성인은 세상에 대한 부적응과 시름으로 마음의 병을 앓게 되고 죽음에 이른다. 요컨대 도처에 고통과 병과 죽음의 사신이 휘젓고 다니게 된다.

 

 

피와 땀과 눈물의 대서사시 - 생명·자유·사랑

시인·문학평론가 김영미

일본은 중국과 한국을 침략해 한쪽은 반식민지로 다른 한쪽은 식민지화했다. 이에 대한 저항의 문학 활동을 한 작가가 조명희와 루쉰이다. 그런데 가해자인데도 불구하고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는 강렬하게 저항하고 비판했다. 이것은 일본을 위해 옳은 길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것이 한-중-일 세 사람의 대표적 국민작가에게 찾아 볼 수 있는 점이다. 그들의 작품세계는 우월주의가 만들어낸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에서 그 상대자로서의 타자에 대한 탄압과 소외에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영혼의 탈식민지화·영혼의 탈영토화로 나아가는 과정의 연속선상에 놓인다.

조명희(1894~1938)는 일제치하의 참담한 현실 속에서 자유를 부르짖다가 이국 땅 소련에서 한 맺힌 삶을 마감했다. 대표적으로 희곡 <김영일의 사>, 시집 <봄 잔디밭 위에>, 소설 <낙동강> 등이 있다. 특히 <낙동강>은 식민지 한국인 삶의 실상을 포괄적으로 조망한 궁핍의 서사시이다. 여기에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피식민자들에 대한 지배명분이 아무리 명백하다 하더라도 그 지배가 감당하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그들만의 경험 즉 그들 고유의 정서나 민족의식이 존재하고 있다.

이야기는 낙동강 하구 연안의 농촌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그 묘사는 강물과 들판으로, 인간의 삶 또는 역사의 흐름으로서의 강과 김해평야의 곡창지대로서의 들판이다. “봄마다 봄마다 / 불어 내리는 낙동강물 / 구포벌에 이르러 / 넘쳐 흐르네. // ‥만 목숨 만만 목숨의/ 젖이 된다네. / 젖이 된다네. -에 -헤 -야.”//… “우리는 죽어도 이 땅 사람들과 같이 죽어야 할 책임감과 애착을 가지고 있다.” 라는 표현에서 주인공 박성운은 개인이 아닌 ‘대표자적인 개인’으로 민족의식을 상징한다.

낙동강을 둘러싼 생존권 문제와 당시 현실의 날카로운 비판이다.

소설의 구조는 투쟁과 투옥의 되풀이, 빼앗김과 쫓겨남, 그리고 끝내 죽음에 이르는 박성운의 생애로 민족의 수난을 대변한다. 민중의 피와 땀과 눈물로 점철된 비극의 중층구조는 현실 삶에서 구조적 모순과 불합리에 맞서는 대중투쟁의 반영으로 미래지향을 전망하고 있는 것이다. “백정이나 우리나 다 같은 사람이다.”, “당신은 최하층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탄 같아야 합니다. 가정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같은 여성에 대하여, 남성에 대하여, 모든 것에 대하여‥또 당신 자신에 대하여서도 반항하여야 하오.” 성운의 발언은 반봉건 인간해방에 놓여진다. 또한 성운의 죽음 후에 그의 애인 로사에 의해 미래적 전망을 확보하게 된다.

그의 작품에서 실천적 담론은 민족의 과거의 삶뿐만 아니라 조국의 미래적 비전을 제시하는 것에 있었다. 이때 재현은 매우 사실적으로 드러난다. 과거를 전면 부정하고 잊는 것은 과거 세대의 고통과 고난도 함께 잊는 일이고, 저항의 근원적인 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미래를 향한 힘이 나올 수 없다는 차원에서 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 작가의 소명은 바로 국민과의 사이에서 만들어진 약속에서 발전되어 나온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그 고통을 스스로 끌어안았다.

조명희에게 억압된 역사를 복원시키고 국가를 역사와 연결하는 방식은 생명에 대한 의지이다. <낙동강>에서 고향 땅에서 길이길이 흐르는 물은 옛날 방식으로 노래를 하는 과거 민족의 고유정서 회복에 있다. 이러한 추구는 영혼의 저항을 통해서 민족의 정서 속에 뿌리박혀 있는 저항의 근원적인 힘이요. 연속적인 저항의 에너지가 발현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명희가 갖는 상상력의 힘이다. 이로써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에너지가 모여 마을과 마을을 잇고, 사방으로 확대될 것이다. 따라서 미래는 진보적이 아닌 순환적인 방식으로 되돌아온다는 믿음이 그의 시와 소설에 내재되어 있다.

조명희의 생명·사랑·자유의지는 그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루어낸 것들이다. 그는 국가의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자신의 어머니의 땅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기꺼이 발가벗은 소설가이고 시인이다.

탈식민주의 작가들은 자신들의 가슴속에 자신들의 과거를 간직하고 있다. 그 과거는 굴욕적인 상처의 자국으로서 다른 관습에 대해 선동적으로, 탈식민주의 미래를 향해하는 잠재적으로 재수정된 과거의 비전으로서, 긴급하게 재해석과 재배치 될 수 있는 경험으로 나타난다는 것에서 그 의의를 발견할 수 있겠다.

 

영혼의 탈식민지화

㈜레이니스트 매니저·역사연구가 김세진

힘 가진 이의 논리를 약자에게 옮겨 심는 식민(植民). 어쩌면 인류역사는 ‘식민과 탈식민의 꼬임’으로 이뤄져 왔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한국, 중국, 일본의 근대는 그 표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세기 초의 국제법은 식민지배를 합법적인 통치행위로 규정했다. 지배자는 피지배자의 땅과 자원, 언어와 전통, 문화를 파괴하며 피지배자를 종속시키고, 심지어 그들 스스로 분열되도록 했다. 식민은 그 폭력성을 여과없이 발휘하며 집단은 물론 개개인의 정신도 깊이 억압했다.

일본인 모두가 “제국만세!”를 외쳐야 했던 1906년 발표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1867~1916)의 <도련님>은 주인공의 거침없고 통쾌한 정의로움을 마치 스타카토처럼 경쾌하게 표현했다. 소세키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 <마음(1914)> 등의 작품에서도 당대의 식민적 사상에 물들지 않고 주체성을 지닌 자아를 이야기 한다. 중국의 루쉰(鲁 迅·1881~1936)은 식민지배에 종속되고 과거에 매몰되어 무기력한 중국민중을 향해 각성할 것을 호소했다. <광인일기(1918)>에서 “4000년이나 사람을 먹어 온 역사를 가진 우리. 처음엔 몰랐으나 이제는 확실히 알았다. 참다운 인간은 보기 어렵구나”라고 말하고, 조명희(趙明熙·1894~1938)는 <낙동강(1918)>에서 ‘스스로 폭탄이 되라’고 죽음으로써 외친다. 두 작가는 식민을 극복하기 위한 출발점이 바로 ‘나’임을 인식했다. 철저하고 진솔한 자아비판을 통해 과거의 나를 넘어서라고 말한다.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식민잔재를 해체하고 거부하는 과정을 탈(脫)식민이라 한다. 오늘날 외형적인 독립을 이뤄낸 동아시아 각국은 탈식민에 성공했을까? 일본은 신성한 나라 즉, 선민의식이 역사인식의 시작이다. 신념체계가 국가주의로 연결되는 지점에 천황이 있다. 헌법 1조부터 8조까지가 천황에 대한 내용으로 이뤄져있는 이면에 과격한 민족주의의 이빨이 감춰져 있다. 천황제로 대변되는 정신적 식민상태는 의식적으로 재학습되며 무의식중에 일본인 스스로를 억압시키고 있다.

중국은 세상의 중심이 곧 중국이라고 여긴다.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제 입맛대로 바꾸는 것은 물론 중화주의를 바탕으로 강력한 국가정책을 추진한다. 육해상에서 실크로드를 일구겠다는 일대일로 정책 근간에는 대국굴기 정신이 흐르고 있다. 한국의 사드배치를 둘러싸고 보인 다양한 행태들과 노벨평화상 수상자 류사오보의 사례는 중국의 식민상태를 엿보게 해준다. 일본과 달리 스스로 이빨을 드러내며 의식적으로 중국인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나라다. 친일파로 일컬어지는 세력은 일제에 철저히 순응했고, 해방이후 혼란스러운 정국을 틈타 살아남아 현대한국의 근간을 만들어갔다. 식민지배에 항거했던 이들이 되레 천대받는 사회가 됐다.

게다가 한반도는 이념갈등의 최전선이었다. 한국전쟁 휴전이후 남북은 강력한 국가주의 정책을 추진해왔고, 지금까지 분열과 대립을 계속해오고 있다. 한국사회 내부의 끝없는 이념논쟁과 타협 없는 대립은 자본제일주의, 외모지상주의 등 다양한 기류와 맞물리며 한국인 스스로를 끊임없이 식민상태로 전락시키고 있다.

각자는 물론 서로를 억압하는 식민을 극복하는 정점에 다름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공생(共生)이 있다. 하지만 한중일 모두가 자국중심, 자민족중심의 덫에 빠져 영토와 주권 등 기초조건에서부터 다양한 마찰이 끊이지 않고 있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경제분야를 제외하곤 공생에 대한 논의를 찾기 힘들다. 스스로의 식민성을 극복해야만 상대에 대한 이해도, 관용도 이뤄질 수 있다. 국가는 물론 개개인도 마찬가지다. 정신이 지식·이념·사상 등에 매몰되어 자아가 자아로 존재하지 못하는 상태를 정신(영혼)이 식민화된 상태로 빗댈 수 있다. 앎이 늘어나고 소유가 많아지는 것이 행복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는다. 더 나아지고자 하는 모든 활동이 실은 자아를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식민은 지배에 순응하기를 강력히 요구한다. 그런 식민을 이겨내는 과정은 고되고 힘들다. 식민에 익숙한 기존의 모든 것들이 탈식민을 거부하며 자꾸 발목을 붙잡기 때문이다.(어쩌면, 탈식민은 영원히 이뤄낼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탈식민의 원동력은 각자의 내면에 고요하게 담겨 있다. 지식의 노예가 아니라 지식의 주인이 되는 것, 깊이 잠들어 있는 ‘나’를 발견하고 그 진실된 외침을 추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곧 식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오늘날, 진정한 지피지기(知彼知己), 진실된 지기(知己)가 절실한 이유다.

‘식민의 소유물이 될 것인가, 식민을 극복하고 삶의 주인이 될 것인가?’, ‘정신을 억압하는 모든 식민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을 가졌는가?’ 110여 년 전, 세 나라의 세 작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나인가?’, ‘나는 행동하는가?’

 

 

국가와 개인의 탈식민지화

서강대 사회과학부 학생 안지선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식민지는 착취식민지이다. 단순히 한 국가의 멀리 떨어져 있는 영토가 아니라 비정상적인 힘의 관계 속에 예속되어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식민지였던 국가는 다른 국가에 종속되어 자신의 주체적 문화를 잊어버린 채, 자신을 속박한 국가에 점차 동화된다. 특히 근대에 나타난 식민지들은 불평등의 관계 속에서 극심한 착취를 경험하였다.

식민지의 영향을 받은 크게 받은 지역들 중 동아시아는 삼국의 특수한 역사적, 지리적 역학관계에 의해 평균적인 식민지보다 특이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현재 근대의 식민지배가 끝난 지 어느덧 100년을 향해 가고 있지만 아직도 식민지였던 국가 개인들의 정신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의 문화에서도 식민지 정신은 잔존한다. 이런 상황은 식민지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동아시아 소설가들의 작품 속에서의 개인적 및 정치적 식민지화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비판적 고민을 한다.

루쉰과 조명희는 한참 그들 나라에서 개화의 움직임이 활발할 때 태어나 그들의 문학작품으로 시대를 계몽하려 했다. 루쉰은 자신의 조국이 세계의 변화를 쫓으려고 노력하는 중 일어났던 신해혁명의 실패를 통해 당대 중국인민들의 생각의 문제점을 꼬집고, 조명희는 조선에 일어나버린 일본의 식민지배를 탈피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루쉰은 영혼이 종속되어버린 아Q를 통해 탈식민지화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Q는 일반적 사람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는 이상한 사람이다. 아Q는 항상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Q를 무시와 멸시로 대한다. 하지만 소설 후반부에서 아Q는 혁명이 정확히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 하나로 피상적인 혁명 단원이 된다. 혁명 당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니 아Q는 힘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결국 피라미드의 최하층으로서 사지가 찢기게 된다. 이는 당대 중국인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말은 ‘신해혁명’을 통해 변화를 추구하지만 행동은 말의 정확한 뜻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아Q는 분명 혁명당원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의 목적에 있어서는 무지했다. 아Q는 피상적인 현상에 급급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혁명이라는 커다랗고 뜨거운 불빛에 영혼이 종속되었고, 마침내 그의 모든 것이 재로 변해버려 살아갈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는 하나의 외부에서 유입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국가의 개인을 예속시키는 개인의 정치식민지화 모습이다.

루쉰의 ‘아Q정전’은 외부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 개인의 식민지화에 대해 서술한 반면 조명희의 소설 ‘낙독강’은 개인의 영속적인 식민지화에 대해 서술한다. 주인공 박성운은 끝없는 독립투쟁 끝에 귀향하여 사회주의자로서 실천적 계몽운동을 통한 독립투쟁을 계속한다. 그는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나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하던 가치를 쫓던 사람이라는 것에 주목하면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이룬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했다는 것은 과연 자신의 가치를 쫓은 결정인지 당시 일본에 종속된 상태에서 당장 눈 앞의 선택지 중 평등을 기치로 한 것이 사회주의뿐이어서 인지 알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박성운은 일본에서의 탈식민지화를 위해 다시 사회주의의 식민지로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그가 외래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주체성을 살린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며 민중들을 계몽하려고 했다면 독립이라는 이상향에 빨리 가까워 질 수 있었을 것이다. 외국의 틀에 맞추어진 이데올로기의 적용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난무했을 것이고, 이는 후의 독립운동의 방향성에 대한 대립으로 확장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현재 중국과 한국은 위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아직도 고민하고 있다. 중국은 1980년대에 들어 경제개방 정책을 실시하는 등 중국만의 독특한 정치문화를 만들어 나가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는 국가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국민 모두가 종속되어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국가가 개인에게 가지는 영향력의 문제가 큰 중국과는 달리 한국은 개개인의 영속적인 식민지화가 문제이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끝난 지도 어느덧 약 70년이다. 물론 식민지배의 영향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이미 사회 내에서 만연해진 자기비하 분위기는 한국적인 것들을 포기하게 만든다. 이는 정치적 선택에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외국이 한국에 미치는 영향은 막강하다. 그런 분위기에 젖어 평생을 산 한국의 사람들은 자연히 그런 압도적 영향력에 종속되고 이는 영혼의 식민지화라는 문제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근대에서 비롯된 식민지성 사슬을 끊어버리고 국가적 자존감을 회복하여 결국 국가의 개개인들이 주체적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두 작가를 통해 살펴본 영혼의 탈식민지화의 가능성

서강대 철학과 학생 유일환

영혼의 식민지화는 정신이 무엇인가에 얽매여있어 자유롭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누군가의 영혼을 얽매는 것은 한 사람일수 있으며, 사회적 조건일 수도, 세계 자체일수도, 자기 자신일수도 있다. 조명희의 단편선과 나쓰메 소세키의 장편 ‘행인’ 안에는 정신적 자유를 잃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조명희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이유로 영혼의 식민지화를 겪는다. 소세키의 ‘행인’에서 특히 ‘이치로’라는 인물이 정신적 식민지 상태에 처해있다. 두 작가는 서로 다른 양상의 식민지화를 보여준다. 조명희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극심하게 가난한 사람들이다. 가난 때문에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며, 가족은 붕괴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조명희의 현실 인식은 ‘사회에 죄가 있다’는 말로 나타난다.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 위에 군림하는 사회 구조에 잘못이 있다. 즉 조명희의 문제의식은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소세키의 ‘행인’에서도 비슷한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화자의 형인 이치로는 심하게 번민하는 인물이다. 그는 대인관계, 특히 아내와의 관계에서 불만을 느낀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다고 느끼지만 그 상황을 극복할 방법을 찾지 못해 방황한다. 독자에 따라서 문제의 근원을 다르게 판단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치로에게도 역시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사회적 도덕 사이에서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는 솔직한 감정과 순수한 사랑에 집착하지만 사회적인 관습과 규칙은 격식을 중요시한다. 이 때문에 이치로의 불행은 사회와의 갈등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조명희 단편에서 사회는 물질을 제한하고, 소세키의 ‘행인’에서 사회관습은 인간의 행동을 제한한다. 이는 두 작가의 작품에서 인물들이 자유의 한계를 느끼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 한계는 개인 안에서 영혼의 식민지화로 이어진다. 조명희의 세계에서 물질적인 부는 불평등하게 분배되어있다. 그래서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돈에 집착하게 되고 가난에서 벗어나는 데에 골몰하게 된다. 이는 물질적 조건에 의해 영혼이 식민지화된 상태이다. 소세키의 경우 이치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자신이 정말로 의지하는 바에 따라 운명을 결정할 수 없다. 순수한 행위에 앞서 그것을 제한하는 사회적 조건들이 그를 얽매어 버린다. 때문에 이치로는 어떤 선택이 옳은 것인지 좀체 믿지 못하는 상태, 자신 및 타인의 감정과 행동을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것이 이치로가 겪는 영혼의 식민지 상태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사회적 모순과 개인의 번민, 크게 이 두 가지 조건에 의해서 영혼의 식민지화가 발생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영혼의 탈식민지화 역시 이 두 가지 조건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요컨대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위해서는 사회의 변화와 개인(자기 자신)의 변화 모두가 필요하지만 둘 중 하나에 더 집중할 수가 있다. 조명희는 사회개혁에 더 비중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직면한 물질적 불평등의 문제 자체가 사실은 사회의 변화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사회주의 혁명을 통하면 가난한 사람들의 정신이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혁명에 가담하는 일은 개인의 변화 역시 반드시 필요로 한다. 부조리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며, 문제를 직면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갖는 일은 자기 자신의 극복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세키는 행인에서 개인의 변화에 더 무게를 둔 것 같다. 이치로가 원한 진실한 세계는 모든 사람들의 가치관과 연관되는 이상적인 세상이다. 그리고 이는 자신마저 초월하여 스스로도 구체화하기 어려운 세계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이 경우 사회 자체를 변화시키는 일보다는 사회적 편견을 초탈한 자신의 정신적인 경지가 더 요구된다. 그렇기에 소설 후반부에 종교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했을지 모른다. 다만 이 방법은 조명희의 사회주의 운동만큼 구체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소설은 이치로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여전히 방황하는 상태로 끝난다.

자신의 식민지 상태를 자각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탈식민지화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는 점에서 위대한 일이다. 조명희와 소세키의 인물들에게는 그런 점에서 희망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이치로는 자신의 고통에 겨워 죽지 않도록 자신이 처한 문제를 직시하고 정면으로 돌파해야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조명희처럼 사회 변화에 투신할 만큼 심하게 부조리한 구조 속에 살고 있지는 않으며 이치로처럼 개인적 고뇌에 전념할 만큼 물질적으로 안정돼있지도 않다. 어느 정도의 개인적 문제가 있고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불안하다. 이런 경우일수록 식민지화 상태를 자각하는 일에 둔감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할 일이다.

 

 

아Q와 박성운과 이치로가 함께 만나는 순간, 그곳

서강대 신학대학원 수료생 김용한

루쉰의 <아Q정전>에서 주인공 아Q의 집은 사당(祠堂)이다. 미장(未莊)의 신주를 모신 그곳에서 그는 쉼을 얻었다. 타인의 죽음을 기억하는 깜깜한 방 안에서 아Q는 과연 파국을 예감했을까? 목이 ‘싹둑!’ 잘리러 가는 길에서 그는 ‘늑대의 눈알’을 떠올린다. ‘언제까지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그의 뒤를 따라오는 것!’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그의 영혼을 물어뜯는다. 체제에 의해 압살당한 아Q의 몸은 티끌로 흩어진다.

조명희의 <낙동강>에서 어둠을 뚫고 강을 건너, 어머니의 젖꼭지 같은 땅으로 돌아왔던 박성운은 결국 영구(靈柩)에 실려 긴 행렬을 이끈다. 성운의 몸을 관에 담아 떠나보내던 날, 흩날리던 깃발은 성운의 혼을 기억하게 하고 되살아나게 한다. 그의 연인, 로사의 만장(輓章)은 그리하여 죽은 자에 대한 넋두리가 아닌, 끈질긴 생명력에 관한 진득한 선포의식이 된다. 그것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적 저항만을 지시하지 않는다. 그녀의 시선은 애인이 걸어온 길과 결코 잊지 못할 생명의 땅을 향해 있다.

소세키의 <행인>에서 지로의 형인 이치로는 H씨의 보고(報告) 가운데 신이 되고, 절대가 된다. “고독이여, 너 나의 고향인 고독이여!”, “죽거나 미치거나, 아니면 종교에 입문하거나, 내 앞에는 이 세 가지 길밖에 없네.”여기서 이치로의 말들은 절규와 같다. 여자의 정신(spirit)을 얻지 못한, 학문적 탐구의 지난(至難)한 장벽 앞에서 점차 그에게는 깨침을 향한 길이 열린다. 이치로는 단연코 절대를 경험하여, 생사를 초월하는 순간에 대해 강조한다.

우리는 이들 세 인물들의 삶을 통해 낭만적인 인생만을 떠올리진 않을 것이다. 단지 모든 이들 앞에 놓인 죽음이라는 진실과 거듭 대면할 뿐이다. 그 앞에 다다랐을 때에야 사람은 가장 평등해진다. 누구도 삶의 끝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곳에 어쩌면 공공적인 대화의 장이 마련되어 있지는 않을까? 그곳은 생애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원초적인 종교적 각성이 공유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절망스런 깨우침의 순간이 오히려 생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가 되는 것이다.

과거 일본제국이 내지(內地)와 외지(外地)를 구분하고 문명으로 포장된 식민지 침탈을 지속할 때에도, 본토와 식민지는 죽음이라는 뒤틀림 가운데 뫼비우스 띠의 안팎처럼 서로 잇닿아 있지는 않았는가? 식민지에서 저지른 폭압들이 다시 본토에서는 인격의 파탄 장치로 작동했던 것이다. 체계의 날카로움과 충격파로 다가온 서양 근대의 광풍 속에서 아Q와 박성운과 이치로는 결국 동전의 앞뒷면처럼 서로 맞붙어 있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에 나름 대처하였고, 앞의 둘은 점점 죽음으로 내몰렸고, 나머지 한 명은 암흑 같은 외로움 속에서 종교적인 탈출구를 찾았다.

영(靈)의 한자를 풀어보면 그 안에는 하늘의 빗방울들(雨)과 셋의 입(口), 정교한 솜씨(工)와 사람 둘(人)이 있다. 여기서 ‘사람 둘’은 하늘을 떠받들며 대화하는 사람 둘이 아닐까? ‘정교한 솜씨’는 땅으로부터 하늘로 이어진 생명나무를 떠올리게 한다. ‘하늘의 빗방울들’과 같은 은하수 아래에서 ‘셋의 입’, 아Q와 박성운과 이치로가 함께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면 거기에는 분명 탈각(脫殼)의 눈물이 있을 것이다. 일자무식의 아Q와 다지다해(多知多解)한 이치로는 서로 절망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박성운과 아Q는 함께 비통한 죽음을 떠올리며 껴안을 것이다. 셋은 그렇게 각각 거기서‘나’가 되는 동시에 ‘우리’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먼저 침묵을 생산적인 대화의 한 방법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 흐름 속에 지속되는 광기와 분열 가운데 함부로 건넨 말들은 화해가 아닌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침묵은 불통이 아니며, 몰이해가 아니다. 단지 때를 기다리는 것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에는 심오한 진리의 언설과 깨달음이 담겨있다. 침묵을 깨는 작업은 오직 따스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일, 손을 맞잡아 상대의 체온을 느끼는 일에서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을 속박에서 벗어나게 할 최초의 몸짓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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