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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진 작가와 떠나는 쿠바여행(11) 마부가 된 임금님
김득진 작가와 떠나는 쿠바여행(11) 마부가 된 임금님
  • 김득진 작가
  • 승인 2017.08.10 2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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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수탉 홰치는 소리가 들리고, 창이 서서히 밝아온다. 식사를 마치고 흔들의자에 앉는 순간 마부가 된 임금님이 나타난다. 마차는 어디에 있는지, 국립공원까진 얼만큼 가야하는지 끝내 말 한 마디 없다. 속은 건 아닐까 하면서도 그를 뒤따른다. 오 분쯤 걸으니 조랑말에 묶인 리어카가 저만치 보인다. 저걸 두고 꼬체로 국립공원 트래킹하자며 꼬셨나 보다. 왕비와 열한 살짜리 왕자가 나 먼저 마차에 오른다. 왕실 전용 마차에 끼어 탄 나는 리어카 흔들림에 맞춰 그들에게 머릴 조아려야 한다. 왕실 얘기가 오가는 사이 지나치는 백성에게 안부를 묻기도 한다. 자전거 탄 사람은 영지 소식을 아뢰는 척 마차 난간을 잡고 다리의 힘을 뺀다. 그의 꾐에 빠져든 건 어제 저녁 무렵이다. 트래킹 거리며 소요 시간도 알려주지 않고 무턱대고 요금부터 말했다. 찜찜하지만 트래킹 계획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아홉 시 출발하면 어떨까 묻는 말을 묵살한 마부가 명령했다. 일곱 시 반까지 여기로 오라고.   

마부로 변신한 임금님. 겉모습 어디에도 마부란 게 드러나지 않는다. 트래킹 요금 바가지 씌우고도 태연하게 웃는 모습, 조랑말에 리어카 달고 다니면서도 온 세상이 제 것인 양 당당한  마부. 임금님따위 부럽지 않아 보인다.


한 시간쯤 달린 왕실 마차가 주춤거린다. 마부가 고삐를 당긴 탓이다. 곧이어 마차는 비포장길로 접어든다. 마차 흔들림이 장난 아니어서 바지가 헤지거나 엉덩이가 짓무르거나 탈이 날 것 같다. 그깟 일 쯤 별건가 싶은지 왕실 마차 푹신한 안장에 앉아 시가를 물고 있는 마부, 과연 임금님답다. 백성의 불편 따윈 무시하는 태도에마저 위엄이 깃들어 있다. 열 살 즈음 아이가 말을 타고 고만고만한 애들이 모인 곳으로 온다. 그걸 본 마부가 말을 세워 왕비며 왕자를 내려준다. 이십 분 남짓 더 달린 마차는 나무틀에 소 두 마리를 엮어 밭갈이 하는 농부 곁에 선다. 농부에게도 잊지 않고 안부를 묻던 마부가 내게 손짓한다. 내려서자마자 달려온 농부가 조랑말과 리어카를 분리하고, 풀밭으로 말을 몰고 가 풀뿌리 짬에 고삐를 묶는다.   

나무판자에 쓸렸던 엉덩이가 쓰라린 걸 봐서 상처가 난 것 같다. 절뚝거리는 걸 보고도 마부는 태연하다. 그가 산을 바라보는 동안 고삐 묶인 조랑말을 살펴본다. 앞쪽 넓적다리에 도드라진 숫자가 보인다. 그 순간 내 엉덩이의 낙인은 어떤 숫자일까 상상해 본다. 말처럼 낙인을 찍어 신하로 만든 그의 신통력 또한 임금님답다. 그가 나에게 고갯짓을 보낸다. 본격적으로 산을 타야하니 잔말 말고 따라오란 뜻이다. 까마득한 정상을 가리킨 그가 눈앞의 산이 죄다 영지인 양 어깨에 힘주는 걸 잊지 않는다. 구배 완만한 밭을 지날 무렵 방목 돼지 한 마리가 보인다. 본래 못 생겼지만 풀어 놓은 탓에 몰골도 제멋대로다. 그런 뒤 마주친 송아지는 돼지 덕을 톡톡히 본다. 김기택 시인이 순한 감옥이라 일컫는 눈동자며 등의 얼룩이 그보다 예쁠 수가 없다. 마부는 못나고 예쁘고를 가리지 않고 영지에서 자라는 것마다 공평하게 사랑을 베푼다. 평등이 혁명 이념인 쿠바의 정신을 오롯이 물려받은 게 틀림없다.   

헛간으로 들어간 마부가 나무절구와 절굿공이 곁에 선다. 달려온 여자가 자루에서 시커먼 곡물 한 주먹을 꺼내 그에게 바친다. 어두운 데다 색깔까지 검어서 뭔지 도무지 짐작되지 않는다. 체면 따윈 벗어던진 마부는 절구 속 곡물을 절굿공이로 연신 내리 찧는다. 절구질로 곡물의 옷을 벗기는 과정이다. 잠시 후 닭발 같은 손으로 퍼 올린 커피를 눈앞에 들이댄다. 알갱이를 살펴봤지만 쓸 만 한 건 하나도 없다. 벌레 먹거나 깨져도 상관하지 않고 볶아 커피를 끓이나 보다. 모카 포트 꺼내는 걸 본 내가 바삐 헛간을 빠져나온다. 시큰둥한 마부를 앞세워 한 시간쯤 헉헉거리며 산을 오른다. 앞질러 간 마부가 널따란 밭에 멈춰 선다. 키 높이의 나무를 칼로 싹둑 자르는 걸 봐서 거기도 영지인가 보다. 잘린 나무 단면을 살피는 사이 빨리 오라며 나무 자르듯 칼을 휘두른다. 샌들 탓에 뒤처진 걸 알면서도 운동 좀 하라며 빈정댄다. 배려라곤 모르던 마부가 내 걱정하는 걸 보면 뒤끝이 장난 아니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덩그러니 지어진 산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담한 산장에서 장 동건 같은 남자가 웃으며 나와 마부를 영접한다. 내민 의자에 퍼질러 앉는 걸 봐서 더 이상 오를 의사가 없나 보다. 나는 산장 뒤편을 돌아본다. 손바닥만 한 텃밭엔 허브도 기르고 있다. 모히또 생각이 간절하지만 해갈에 뒤따를 더위가 두렵다. 나는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마부는 맥주 한 병을 들고 나온다. 마부가 된 임금님, 그가 마시는 맥주도 쁘레시덴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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