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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치비화(6) / 일사천리로 이뤄진 조선총독부관제 발표·인선
조선통치비화(6) / 일사천리로 이뤄진 조선총독부관제 발표·인선
  • 동양일보
  • 승인 2017.08.20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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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시바다젠사브로(柴田善三郞), 아카이케아츠시(赤池濃), 마루야마츠루키치(丸山鶴吉), 치바료(千葉了), 마츠무라마츠모리(松村松盛), 모리야에이후(守屋榮夫).

■총독·총감의 임명에서 부임까지(2)


 미즈노정무총감 지휘하에 인사 진행
 조선 32도 넘는 더위 속 콜레라 속출
 서둘러 관제개정 주요 보직자 선발
 노구치준키지, 경무국장에 내정
 아카이케아츠시는 내무국장 승낙


 일본인들 ‘조선행’ 좌천으로 생각
 지방사무관 중 제3부장 선임 난항
 이후 속전속결로 총독부 관리 발표
 유능한 인재들 조선으로 데려와


 총독 취임시 조선통치 홍보 필요하자
 기자·육군관계자 초대회 등 마련
 바쁜 일정 속에서 치밀하게 준비

● 국부장(局部長) 임명과 인선
그리고 즉시 조선총독부의 일에 대한 기초 작업에 착수하게 됐고 공식적인 사령은 아직 받지 않았지만 조선총독부관제 발표에 수반하는 인사에 대해선 미즈노정무총감의 지휘 하에 일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10일에는 노구치준키지군이 경무국장으로 내정됐고, 12일에는 아카이케아츠시씨가 내무국장으로 취임할 것을 승낙하게 됐습니다.
총독·정무총감의 취임식은 8월 12일에 거행됐습니다. 그 때에 나의 비서관 사령도 함께 있었습니다.
사이토 총독과 미즈노 정무총감 취임 후 조선통치의 주요사항이었던 관제개정의 발표는 8월 20일에 거행하기로 돼 있어 거기에 필요한 국장·부장의 임명과 신설될 각도의 제 3부장을 인선하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이는 아주 단시일 내에 처리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고심하지 않으면 안 됐던 것입니다. 특히 이 해에는 혹서가 심한 해여서 매일 화씨 90여도(섭씨 32도) 라는 더위가 계속됐습니다. 조선에는 콜레라가 유행 중이었고 일본에서도 여기저기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렇게 지독하던 더위에 아침부터 밤까지 과도한 일이 계속됐습니다. 노구치 경무국장이 장티푸스에 걸려 도중에 세상을 떠나게 됐던 것은 역시 과로가 원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8월 11일 미즈노 선생의 말씀에 따라 노구치씨가 경무국장직을 승낙했습니다.
그 때 나도 선생 댁에서 노구치씨를 만나 뵈었습니다. 그리고 제3부장을 선임하라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둘이서 지방사무관 중에서 부장을 선임하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조금 뒤에는 아카이케씨도 도와서 작업에 참가했습니다. 아무래도 20일 발표에 맞추어야 했기 때문에 매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미즈노선생이 일찍이 내무성에 오랫동안 근무하셨고 또 최근에는 내무대신으로 계셨던 관계로 지방관에 대해서는 상당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지방관의 조선 전임에 대해서 도코나미 내무대신?고하시 내무차관의 충심어린 양해도 얻어냈기 때문에 그분이 희망하는 지방사무관을 채용하는 일을 명쾌하게 승낙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쪽에서 자발적으로 권유하여 기분 좋게 전임할 수 있도록 특별한 배려를 해 주는 처지였기 때문에 만사가 술술 잘 풀일 수가 있었습니다.
이 때 나는 미즈노 총감의 지휘 하에 후보자인 지방사무관들에게 취임을 권유하는 전보문을 쓰게 됐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지방관들에게 조선은 거의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아주 정중한 문구를 써서 취임을 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간절하면서도 장구한 전보문을 썼습니다.
이를 미즈노선생에게 보이자 “이것만으로는 아직도 부족해. 시국이 중대하다는 것과 특별히 국가를 위해서라는 문구를 더 첨가하게”하는 주의를 받고 거기에다가 이를 부가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야기 린사쿠, 신죠 유지로, 야마시타 겐이치, 마츠무라 마츠모리, 세키미즈 타게시, 야무구치 야수노리, 이시구로 히테히코, 우마노 세이이치 같은 제군들의 승낙을 얻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곤란했던 것은 경기도 경찰부장을 인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물색했던 제군이 점점 빠져나가는 식으로 돼 노구치씨도 아주 초조해 했습니다. 교토(京都)의 경찰부장인 후지누마 시오헤이군과 경시청에 근무하는 쇼우리군키군, 가나가와현 경찰부장 오모리(大森)군 등에게도 편지를 띄웠지만 어느 쪽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최후에 아키다(秋田)현에 있는 지바군에게 교섭했습니다. 그러나 지바군에게는 미즈노씨가 친필로 쓴 휘호전보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답장이 오지 않았고 날짜가 긴박해져서 마음을 태우고 있던 중 드디어 지바군의 승낙을 얻어 시간이 임박해서 이를 발표할 수가 있었습니다.
제 3부장 발표와 동시에 총독부 관리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총독 비서관으로 이토 다케히코(伊藤武彦)군, 총독부 사무관으로서 마루야마 츠루기치, 시라가미 유키치, 고바야시 미츠마사(小林光政)씨 등이 임명됐습니다.
그 당시 일본에 있는 사람들은 조선의 상황을 사실대로 제대로 잘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공무원이 조선에 간다는 것은 좌천이라도 당하는 것 같은 생각을 대부분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망한 지방관을 채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아주 많은 일본의 인재를 조선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는 것은 뭐라 해도 미즈노 총감이 내무계통에서 유능한 인사로 알려져 있었다는 점이 주요한 원인이 됐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동시에 노구치씨라든지 아카이케씨가 이에 대한 알선을 위해 진력했던 점, 그리고 그 당시 도코나미 내무대신과 고하시 차관 등의 후원 덕분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서 니시무라 야스키치씨가 식산국장으로 취임하게 된 사정을 잠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들은 바로는 노구치씨가 경무국장, 아카이케씨는 내무국장에 내정됐다고 합니다.
나도 얼마간 이 일을 도왔지만, 아카이케씨가 일부러 오사카에까지 가서 설득해 당시 오사카의 내무국장이었던 시바다 젠사부로씨를 학무국장으로 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중대한 직위인 식산국장을 누구로 할 것인지 결정되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시바다씨를 식산국장으로 하고 학무국장은 조선에 근무하는 사람 중에서 채용하면 어떠냐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니시무라씨는 내가 아이치(愛知)현에 근무할 때 내무부장으로 있었고 그의 인격이나 수완에 대해서는 나도 깊이 존경하고 있었던 터인지라 식산국장으로서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시마네(島根)현에서 사이다마(埼玉)현 지사로 영전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거기에다가 자녀들의 학교교육관계도 있어 가정 사정으로 볼 때 조선부임을 과연 잘 감당해 낼 수 있을는지 걱정이 돼 마음속으로는 그를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추천의 말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8월 18일 니시무라씨가 내게 직접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나는 미즈노선생에게 오랫동안 신세를 진 사람으로 이번에 정무총감으로서 한국에 가시게 되기까지에는 비장한 결심을 하셨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이런 기회에 어떻게 하든지 은혜를 갚고 싶다고 생각하니 가정사정도 있지만, 이러한 일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을 생각이니 염려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읽고 나는 매우 감동해서 즉시 그 편지를 미즈노선생에게 보여 드렸더니 이는 아주 잘된 일이라면서 니시무라군을 식산국장으로 하고 시바다군을 학무국장으로 하도록 하여 니시무라군이 식산국장으로 됐던 것입니다.
그 당시 사정으로 볼 때 조선에 가고자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더군다나 사이다마현 지사로 영전하여 일본에서도 많은 기량을 펼 수 있는 입장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즈노선생의 은혜와 우의에 보답하기 위해 스스로 조선에 취임할 뜻을 밝혀 온 것은 하나의 미담이라 할 수 있겠지요.

● 문화정치에 대한 훈시
그리고 조선의 부임전의 일로서 내가 관계했던 일을 말씀드리면, 첫째는 총독·정무총감 취임 시, 과거 조선통치에 관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드려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은 8월 22일부터 진척됐는데, 22일에는 재경신문기자 초대회가 츠기지(築地)에 있는 정양헌(靜養軒)에서 있었고, 23일에는 추밀원, 내각, 척식국, 법제국, 대장성, 내무성, 육군관계자들을 위한 초대회, 그리고 24일에는 조선문제연구자 특히 사카다니(阪谷), 요시노(吉野), 츠나시마(網島), 구와키(桑木)와 같은 사람들의 초대회가 있었습니다.
25일에는 총독·정무총감에 대한 총리대신의 송별회가 관저에서 있었고, 육군대신이 주최하는 송별회가 같은 날 밤 고이시가와(小石川) 가이락구엔(階樂園)에서 거행되는 등 아주 바쁜 일정 중에 부임 준비가 이루어졌습니다.
8월 28일 아침 급행으로 드디어 총독·정무총감 두 분이 부임의 장도에 오르게 됐습니다. 그 사이에 있었던 고심담을 하나 말씀드리지요.
먼저 사이토총독의 신정(新政)에 대한 훈시를 어떤 내용으로 할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이는 어쩌면 내가 할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미즈노선생에게 비서관으로 발탁된 나로서는 될 수 있으면 그 초안을 내가 만들어 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무계통에 오랫동안 근무했던 나로서는 조선총독의 훈시 초안을 만들기가 상당히 힘에 벅찬 일이었고, 대체 어떤 내용으로 해야 좋을까 하는 것이 내가 고심했던 점이었습니다. 나는 먼저 신문에 실린 조선통치에 관한 논설을 독파하려고 노력했습니다. 3월 소요(3.1운동) 이후에 나온 신문들을 모두 발췌해서 쭉 훑어보았습니다. 또 잡지·신문 등에 나타난 조선통치에 관한 비평도 읽었습니다. 그리고 8월 20일에 발표된 조서와 하라다카시 수상의 담화도 참고했습니다.
특히 주의를 기울였던 점은 사이토 총독, 미즈노 정무총감이 신문기자나 그밖에 각지에서 발표한 말씀 속에 깃든 통치방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한 마디 한 구절도 빠뜨리지 않도록 주의해서 수집해 보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략적인 복안이 정리됐으나, 완전을 기할 생각으로 아카이케씨에게도 니시무라씨에게도 터놓고 상담해서 의견을 들었습니다. 드디어 23일부터는 이를 문장으로 만들기 시작했고 대체적인 성안(成案)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미즈노 총감에게 보여드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략적인 안이 완성된 것은 바로 출발 전날이었습니다. 이것을 내가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이세(伊勢)에서 교토(京都)를 거쳐 오사카호텔에 도착했을 때 그 원안을 니시무라씨와 아카이케씨에게 보이고 글자를 정정해 고치도록 한 후, 미즈노 총감에게 보여드렸는데, “그런 대로 좋은데, 단 문화정치를 행할 것이라는 것을 적당한 곳에 삽입하도록 하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넣어 문안을 다시 만들었습니다.
9월 1일 부산에 도착하여 대지(大池)여관에 머물렀을 때 다시 한 번 미즈노정무총감에게 보여드리고 총독에게도 보여드리자 그 정도면 아주 좋다고 하셨기 때문에 안심했습니다.
이 훈시가 9월 3일 국·부장 회의에 붙여졌습니다. 그 회의에서 행정이외에 사법이라는 표현도 첨가하면 어떨까하는 고쿠분산가이(國分三亥)씨 등의 의견이 있었으므로 이를 넣은 후 두 세 문자를 수정해서 발표하게 됐던 것입니다.

● 대묘능(大廟陵) 참배
또 한 가지 부임도중에 있었던 일을 참고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드디어 8월 28일 아침 급행으로 도쿄를 출발하게 됐습니다. 그 때에 전송 인파가 너무 많아서 플랫폼 인산인해를 이루어 사람으로 파도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이는 사이토 총독, 미즈노 정무총감에 대한 충정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라 생각됐지만, 그 당시 사람들이 조선통치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중대성을 자각하고 있었는가도 반영됐다고 생각됩니다.
일행은 총독·총감 및 영부인 그리고 국장급으로는 니시무라, 노구치, 비서관으로는 저와 이토(伊藤)씨 부부, 그리고 시즈오카(靜岡)에서 온 아카이케씨와 마루야마군이 함께 타게 됐습니다. 이 때 노구치씨도 일행 중에 있었는데 기차를 탈 때부터 기분에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좀 폭 쉬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기차 안에서는 아무 일도 없이 괜찮았습니다.
고베의 니시미야(西宮)에 친척이 있으니까 잠깐 들러 보겠다하여 나고야에서 일행과 도중에 헤어져 마루야마군과 함께 내려갔습니다. 우리들은 나고야에서 내려 간사이선(關西線)으로 갈아타고, 우지야마다시(宇治山田市)로 향했습니다. 밤이 돼서야 그곳에 도착했고, 총독과 영부인은 五二會호텔에, 미즈노총감 및 부인은 十五樓에 머물게 됐습니다.
이튿날 아침 함께 양궁(兩宮)을 참배하고, 일행은 궁중악이 연주되는 가운데서 정중하게 기원을 올렸습니다. 이 때 신관(新官)이 지어 올린 축사는 그 내용이 아주 훌륭하고 알차 축사를 듣고 일동은 모두 새삼스럽게 우리들의 사명의 중대성을 깨달을 정도였습니다.
부임 초에 내외 양궁을 참배하자는 것은 사이토 총독, 미즈노 총감의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이는 부임 전 조선통치를 위해 지성을 경주할 것을 하나님 앞에 맹세하겠다는 노력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됐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들은 아주 감격했던 것입니다. 양궁 참배가 끝나고 29일 밤 교토에 있는 자와분(澤文)에 머물게 됐는데, 야마다(山田)에서 교토로 오는 기차 안에서 미즈노 총감이 다음과 같은 시가를 지어 읊으셨습니다.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해 / 신심(神心)마저 감동할 수 있도록 이루어 간다면 / 어찌 백성들이 복종하여 따라오지 않겠는가?” 라고 읊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받아 아카이케씨가 “오랜 역사 속에서 거칠 대로 거칠어진 고려의 황야를 / 아침햇살 눈 부시는 빛나는 국가로 성장시키리. / 풍랑이 아무리 거칠게 밀어닥친다 해도 / 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할 고려의 백성들! / 통치의 완성을 서두르는 마음을 더욱더 굳건히 하여 / 조선에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위업을 이루리.”
위의 두 수의 시를 읊으셨는데, 이들 시가 속에서도 미즈노 총감을 비롯한 간부들의 고심과 그 포부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자와분(澤文)에 도착하자 경성으로부터 전문이 와 있었는데 조선의 형세가 아주 심각하고 총독을 암살하겠다는 계획이 세상풍문으로 들려오고 각지에서는 소요가 발발할 우려가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도 도조(東條) 해군대좌와 후쿠토리(福鳥·당시 총독부 촉탁임) 중위 두 사람에게 일행보다 먼저 출발하라는 명령을 내려 즉시 출발하게 됐습니다.
30일 아침 일찍 함께 모모야마능(逃山陵)을 참배하고 나서 정오에 오사카호텔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노구치 경무국장의 발열이 시작돼 39도 4부의 고열이 계속되고 있다는 보고에 접하게 됐고 내가 총독·정무총감을 대표하여 니시미야(西宮)에 있는 병원에 가서 병문안을 드렸습니다.
이때에 오사카부 사무관이었던 시노하라 에이타로(條原英太郞)군을 함께 병상에서 보게 됐는데 아무래도 이렇게 심한 병에 걸린 상태에서 함께 조선에 가는 것은 무리이고 함께 갈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유감이라며 총독과 정무총감에게 잘 말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건강이 회복될 것이라고 믿으니까 회복되면 꼭 같이 참석해서 봉공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평시에 노구치씨가 아주 건강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열은 높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쾌차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노구치씨의 병명은 악성 장티푸스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결국은 노구치씨와 최후의 결별을 하게 됐는데 참으로 슬픔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30일 밤 총독은 오사카 주재 신문기자들을 호텔에 초대하여 격의 없는 간담을 나누셨습니다. 그 날 밤 8시 35분 미즈노총감과 영부인, 아카이케 등이 앞에서 출발하였고 우리들은 총독과 함께 다음날 아침 오사카를 출발하여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하였는데 콜레라 때문에 연락선이 하루에 한 번밖에 출항하지 못하게 돼 선발로 갔던 마루야마군과 거기서 만나게 됐습니다. 봉래환(蓬萊丸)이라는 배를 타고 총독·정무총감이 함께 부산으로 건너가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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